[383호 커버스토리]
# 01
나는 개입니다. 인간인 당신들은 나만큼 이성적인 피조물이 아니므로 어떻게 개가 말을 하느냐고 하겠지요. … 하지만 개도 말을 한답니다. 단지 우리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할 뿐이죠.1)
나는 개입니다. 인간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요즘 큰 인기를 누리는 반려동물인 개입니다. 현대인의 상당수가 도시에서 살게 되면서, 우리 견공 중 상당수도 실외에서 집을 지키며 인간을 보호하던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났죠. 대신, 우리는 실내로 들어와 인간과 함께 살고, 때로는 잠자리까지 함께 나누는 반려동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인간들 사이에서 우리가 생명체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는지에 관한 관심이 부쩍 올라갔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수천 년 동안 인간들은 함께 사는 우리를 꽤 못살게 굴었습니다. 문명에 적응시킨다면서 때리고 굶기기도 했고요, 우리 중 대다수는 평생 짧은 목줄에 묶인 채 살아야 했습니다. 24시간 집을 지키고 인간을 위해 힘을 다해 봉사하고도, 우리는 ‘개’라는 이유로 인간이 먹고 남긴 짠 음식을 주식으로 먹다 병에 걸리기 일쑤였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인간은 우리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고 산 채로 몸을 갈라 뇌나 장기를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를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처럼 사고파는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죠. 예쁘게 생긴 애들이 번식견이 되어 좁은 철창에서 몸이 상하도록 임신과 출산을 반복합니다. 가장 슬픈 일은 인간들이 싫증이 났다거나 번거롭다는 이유로 함께 살던 우리를 몰래 버린다는 사실이죠. 그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우리는 천성적으로 인간을 따른다는 거,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한다는 거.
사실 인간들이 막 대한 것이 우리만이겠어요? 알고 봤더니 인간은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피부색, 성별, 출신 지역, 정체성, 사회계급, 종교가 다르다고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상한 존재더라고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양심적인 인간들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서로 최소한의 존엄과 가치는 지켜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가더군요. 더 나아가 일부는 동물권이니, 동물윤리이니, 동물신학이니 하며 저희에게도 관심과 호의를 보여주시던데,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합니다(그런데 저희가 지금껏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걸 고려하면, 사실 이게 감사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우리는 실수한 보호자에게도 곧 꼬리를 흔들고 다가가 얼굴을 핥아주는 매우 관대한 존재입니다).
보호자랍시고 저랑 한집에 사는 인간이 매우 게으른데, 그런 천성과 안 맞게 책과 글로 먹고살고 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라는 옛말처럼, 저도 곁눈질로 그 한량이 요즘 관심을 가지는 동물신학이란 주제를 조금 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학문과 실천의 영역을 확장하며 자신들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자기와 다른 존재와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역시 우리의 친구, 인간은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주로 서구 문명에서 형성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분석, 동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 동물에게 권리 개념을 사용하는 철학적 기초 등 큼직큼직한 주제를 다루더군요. 이러한 이론화 작업이 놀랍고 의미도 있는데, 솔직히 당사자로서 말씀드리자면 우리 개라는 종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조금 더 말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 옛날 인간의 친구가 된 것은 다른 동물에겐 없는 견공만의 특별함과 덕목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고양이나 원숭이, 금붕어, 햄스터, 도마뱀 등 타자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길.)
어느 날 제 보호자가 검정 래브라도레트리버 사진으로 표지가 장식된 얇은 책을 보고 있더군요. 그 인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으로 뛰어올라가 봤더니 제목이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2)였습니다. 저자는 11년간 함께 살던 래브라도 커비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이 반려견과 가졌던 깊은 교감과 우정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질문하더군요. 원래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이 단지 개를 기른 경험을 나누는 달콤한 감상문은 아니라는 점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The Grace of Dogs: A Boy, a Black Lab and a Father’s Search for the Canine Soul》(강아지들의 은총: 한 소년, 한 래브라도, 그리고 강아지의 영혼에 대한 한 아버지의 탐구). 네, 바로 이겁니다! 인간과 강아지의 끈끈한 관계 이면에 놓인 근원적 질문은 바로 우리 개에게도 ‘영혼’이 있냐는 거죠.
오랜 세월 자신만 영혼을 가진 것처럼 우쭐대던 인간들이 제목을 보고 당황하거나 흥분할 표정이 눈에 그려지는군요. 저자 앤드류에 따르면, 반려견 커비와의 관계에는 단지 자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뭔가 끈끈하고 심오한 바가 있었답니다. “일상의 경험에서 영적 의미를 찾고 연구하는 것”(15)이 사명인 실천신학자답게 앤드류는 반려견이 줬던 행복과 위로, 치유 등을 그냥 가볍게 넘어가지 않고,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이 얇은 책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이 작품에서는 옛 신학의 권위를 빌어다 교리 논쟁을 벌이느라 개의 개다움을 묵살하는 조직신학의 전형적 실수는 없더군요. 게다가 “다양한 상황별로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어 … 통역이 따로 필요 없이 강아지와 관계 형성이 가능한”3) 아동 목회 전문가로 인정받는 앤드류보다 이런 주제를 더 잘 다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4)
# 02
아이에게도 부모한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공부도 못하고 느릿느릿한 아이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이나 슬픔이 있다. 나는 자주 검둥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집에 돌아가기 싫어”, “학교는 재미없어” 같은. 검둥이는 그런 나를 잠자코 바라봤다. 눈물이 맺힌 듯한 눈을 하고서.5)
지난 수백 년간 인간은 개의 본질을 연구하고자 이상한 방법을 써왔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공감 능력을 활용하는 대신, 자신의 똑똑한 머리를 믿고는 개의 유전자나 뇌 구조, 사회적 행동방식 등을 분석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으로는 인간들이 자신의 본성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개에게 영적인 면이 있는지를 발견할 리가 없죠. 그렇다고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고 우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학이 인간중심주의에 오래 오염되다 보니, ‘개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 형상이 아니다’, 혹은 ‘개는 원죄가 없기에 구원의 은혜를 받을 대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들이 주인공이 된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놓고는 우리가 궁금해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질문과 답변을 자기들끼리 주고받더군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동물의 유사성과 차이를 알고 싶다면서, 한동안 침팬지나 오랑우탄, 고릴라 같은 유인원을 주로 연구했습니다. 여기에는 외모도 유전자도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이 자신과 가장 가깝고, 그렇기에 개보다는 유인원이 더 우월한 동물이라는 전제가 깔린 것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접근에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외모나 유전자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개체가 인간과 지속해서 삶의 공간을 공유했는지로 판단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견공을 따라올 동물이 과연 지구상에 있을까요? 잘 알다시피 반려견이 인간과 맺는 관계는 다른 동물보다 훨씬 상호적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는 다른 개와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인간과 함께 사는 것을 그것보다 더 좋아한다는 거죠. 왜 종이 다른 인간과 개 사이에 이런 불가사의한 우정이 생겼을까요.
제가 신학자이자 개의 친구로서 앤드류를 좋아하는 이유는 ‘동물’이란 모호한 범주에 매달리는 대신, ‘개를 개’로 이해하고자 동물인지행동학과 비교심리학 등을 진지하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개에게 “스스로 사람과 관계를 맺는 영적 결속 능력과 우정의 깊이”(17)가 있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 한마디에 큰 영감을 받은 앤드류는 개의 본성과 행동에 관한 여러 연구물을 섭렵하고는, 결국 인간 외 다른 동물 중 개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행동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러 동물로 실험을 해본 결과, “강아지들은 인간 영아처럼 사람의 얼굴에 주목해 협력을 구하고 반응하는”(37) 유일한 동물이었답니다. 비록 침팬지처럼 앞발을 사용해 도구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의 눈을 오래 응시하고 표정을 읽어내고 이에 반응하는 능력은 우리를 따라올 동물이 없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는 것은 풍요로운 삶과 연계되고, 타인의 얼굴을 주시함으로써 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을 곧 구원으로 이해합니다. 개가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도, 인간과 개가 서로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이를 통해 언어로는 표현 못 할 생각과 감정까지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커비와의 관계에서 왜 단순한 친밀함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까지 느꼈는지 궁금해하던 앤드류는 바로 여기서 유레카(eureka)를 외칠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다소 낯선 주장 이면에는 고대·중세와 달리 ‘영혼’을 비실체론적으로 이해하는 현대신학의 흐름이 놓여있습니다. 즉, 과거에 영혼은 인간만이 가진 비물질적인 실체이고, 거기로부터 인간만이 배타적으로 소유한 이성, 언어능력, 종교성이 나온다고 봤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과 개의 관계에 영적인 것이 있다는 말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영혼론이 영혼을 몸과 구분된 실체로 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성서를 자세히 보면 인간의 영혼과 몸을 통일체로 파악하고, 존재론적 범주 대신 관계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죠. 이런 새 관점에서 보자면, ‘영혼’이라는 추상적 명사 대신 “심오한 관계성의 자각 또는 만남”(51)을 묘사하는 ‘영적’이라는 형용사가 신학적 대화에서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영적 특성을 실체가 아니라 관계 중심적으로 볼 때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도 새롭게 인식됩니다. 앤드류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영적 교감은 다른 것,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배우자든, 친구든 그들과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깊은 의식”으로, “이러한 삶의 공유는 아름답고 심오하며 흔히 사랑이라 불리기도 한다”(45)고 강조합니다. 그러고는 실체론적 언어의 영향이 짙은 옛 신학의 범주로는 영적 경험의 풍성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도 인정하죠. 대신, 그는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의 2011년작 《인간 진화 속의 종교》(Religion in Human Evolution)에 나온 종교적 욕망의 세 가지 특성인 ‘공감과 유대감과 놀이’에 주목하고는, 이를 인간과 개 사이의 영적 관계를 분석하는 중요한 틀로 삼습니다. 지성이나 이해력이나 언어가 아니라 공감과 유대감과 놀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저희야말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에 뒤지지 않을 종교적 개(canis religioni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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