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기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근주 전임연구위원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주요 교단들로부터 이단 시비를 받아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은 2019년(104회 총회) 그가 예장합동 소속 교회에서 특강을 못 하도록 결의했다. 예장합신 경기북노회는 2021년, 그가 협동목사로 있는 일산은혜교회에 “김근주 목사와 여성 목사 사임”을 권고했다(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어 교단을 탈퇴했다). 올해는 예장합신 107회 총회에 김근주 목사와 느헤미야의 신학을 조사해달라는 헌의가 올라왔고, 예장통합 107회 총회에서 김근주 목사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린 상태이다. 아래는 이 상황을 염두에 둔 일산은혜교회 교인의 글이다. ― 편집자 주
말의 폭력
포털에 ‘김근주 목사’를 검색하니, 아이러니하게도 ‘전광훈 목사’가 계속 따라붙는다. 두 사람은 어울릴 사이가 아님이 분명한데, 이 괴이하고 생경한 조합이 피드에 도배되어있다. ‘이단’ ‘이단성’이라는 단어는 뉘앙스만으로도 우리를 섬뜩하게 멈춰 세운다. 이는 참으로 위협적인 말이라, 본질이나 진위와 상관없이 배제와 배척의 심리를 발동시킨다. 교회와 기독교 울타리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단’이라는 용어는 표식만으로도 척결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특히 특정 인물에게 그 말이 덧씌워질 때, 많은 이들은 한 개인의 인격을 난도질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격 살해의 유용한 도구는 ‘말’이었다. 교묘한 위장술로 둔갑한 말은 사실과 진실을 은폐하기에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유신의 터널을 거쳐온 세대라면 아마도 ‘새마을운동’ ‘국민교육헌장’ ‘국민체조’ 같은 단어를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노래 가사와 문구를 떠올릴 것이다. 한쪽엔 군홧발을, 다른 한쪽엔 말의 권력으로 한 시대의 정신을 검붉게 훼손시킨 유신의 망령은 지금도 현실 곳곳에서 출몰한다. 그 무시무시한 세뇌의 언어를 우상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영화 〈자산어보〉의 명대사 “주자는 참으로 힘이 세구나”를 씁쓸하게 떠올린다. 사악하고 나쁜 말의 지독한 독성이 한 개인과 공동체의 영혼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정직한 말
김근주 목사는 최근 몇 년간 논란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단 시비’ ‘이단성’이라는 말들은 그의 부정성을 강화하는 데 동원된 언어에 가깝다. 부정의 언어는 부정의 낙인 효과를 만든다. 이는 상식에 반하는 질타와 욕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정당화한다.
한 신학자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로 기록된 연구를 논의해야 할 자리에 증오와 혐오의 말들이 넘쳐나는 현실.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를 정상적이라 여길지 의구심이 든다. 소위 교단과 교계의 권력 집단과 추종 세력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잣대와 기준으로 논의의 핵심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무시무시한 칼날의 언어로 한 개인을 모질게 몰아세울까? 그의 글과 말에 대한 정당한 논의는커녕 가혹한 말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의 속내가 김근주를 향한 미움과 싫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정작 교단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지점이 있다. 이처럼 맹신적 동맹 집단 같은 한국교회를 한없이 한심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비극적 상황을, 과연 교단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 정도 상식만 갖춰도 김근주 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 중 차별받고 억압되어 마땅할 존재는 어떤 것도 없다. 대상이 유색인종이든 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말이다. 신대륙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데 신학적 논리를 제공했던 제국의 교회처럼, 노예제를 옹호했던 백인들의 교회처럼, 유대인 학살에 눈감았던 파시즘의 교회처럼, 난민과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작금의 교회처럼 부끄러운 짓을 또다시 반복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이 해방되고 장애인이 해방되는 길이 역사의 흐름이고 방향이었는데, 이를 막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고 보는가? 불과 몇 년만 지나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한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교회와 종교의 타락은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대중의 이해가 환상적으로 결합했을 때 만개한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은 언제나 약하고 아프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다. 불편한 진실은 뒷전으로 밀리고 진실에 닿으려는 목소리들이 부상할 때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일제히 공격의 총알이 발사된다.
김근주 목사는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성서유니온, 2017) 머리말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말씀이 오늘 우리 현실에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색”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발 딛고 서야겠다는 다짐”이라 밝혔다. “진리 자체와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 사이의 간격을 고민”하는 일은 그로 하여금 신학자, 목사, 선생으로서 역할과 지식인의 책무를 방임하지 않도록 만든다. 김근주 목사는 자기 역할과 사명에 충실한 학자이다. 그는 성경 말씀이 주는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가르치기에 힘썼다. 만약 그가 정치적 헤게모니, 학문적 카르텔, 기득권의 이해 집단을 옹호하는 데 복무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초래됐을까.
김근주 읽기를 함께하자
1998년 미국 시애틀 공공도서관에서 시작된 ‘한 도시 한 책 읽기’(One City One Book)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확장되어 독서의 중요성을 알렸다. 특히 2001년 시카고에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선정해 도시 전체가 함께 읽으면서 인종차별과 갈등으로 반목했던 주민들의 인식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어떤 읽기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인식을 고양시킨다. 함께 읽는 행위는 대화적 상상력으로 우리 문제를 진단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를 낳기도 한다.
정직한 독자라면 저자가 쓴 말을 바르게 읽고 소화하려 애쓸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이란 ‘사람을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떠도는 말, 억측, 예단, 정치적 음해로 한 사람을 재단하지 말자. 증오와 혐오의 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탈출시키자. 흑색선전, 유언비어, 괴소문에 둘러싸인 우리 자신을 구출하자. 맹목의 신앙과 추종의 언어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자. ‘김근주 읽기’는 정직하게 그를 함께 읽고 생각하자는 단순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신학자이자 목사, 선생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인 그의 생각과 분투를 함께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일산은혜교회 이광하 담임목사는 사무엘상 7장 말씀을 전하며 “가장 깊고 절망적인 상황은 아무도 울지 않을 때, 아파도 부르짖지 않을 때”라고 말했다. 아무도 울지 않는 시대에 울음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귀한 존재이다.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에 울어야 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의 말은 귀담아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함부로 정죄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온하다.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진단할 줄 모를 때 그 집단은 늪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정직하지 않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정직성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김근주 읽기를 함께하자! 기독교 개혁의 맨 앞에 서있는 한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부터 다시 듣고 배우자. 그의 앎을 나의 앎, 우리의 앎으로 만드는 일이 너무도 절실한 오늘이다.
강경희
출판도시 갤러리 지지향 대표. 문학평론가이자 전시비평가로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일산은혜교회 교인이며,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