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호 책과 사람]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 저자 김희준 박사

누군가 내게 ‘다시 읽고 싶은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첫손에 꼽힐 책은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쓴 《한나의 아이》(IVP, 2016)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될 의도가 없었다”라는 인상적인 첫 문장이나, 미국 텍사스 벽돌공 아들로 태어나 ‘노동’을 배우며 자라난 그가 2001년 〈타임〉지에서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었다는 점, 스스로 말하듯 “교회가 미국적인 삶에 순응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일로 경력을 쌓아”온 그가 “미국적인 삶을 대표하는 잡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아이러니, 하우어워스의 삶에서 드러나는 인생의 복잡성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인 친구들과의 우정까지. 처음 프리즘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건너뛰며 읽었는데도’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다채로움에 눈을 반짝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돌아보면,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쓴 책의 번역본을 전권에 가깝게 샀고 1회독씩은 해온 듯한데, 뭔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 번역 출간된 책들이 하나로 꿰어지지 않고 낱낱이 분절되어 읽히는 듯한 기이한 감상에 젖곤 했다.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쌓아 올려야 하우어워스의 신학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막연했는데, 그 막연함을 해소하는 길을 가이드해줄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김희준 박사가 쓴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IVP)이다. “드디어 한국에서 김희준 박사의 책이 출간되었다! 그의 저술은 내가 지금껏 해 온 작업의 핵심을 명료하게 짚어준다”라는 하우어워스 본인의 추천사까지 딸려있으니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김희준 박사를 12월 1일 판교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는 ‘성품과 도덕 주체자’ ‘비전과 덕’ ‘이야기’ ‘공동체’ ‘교회’ ‘하우어워스 비판적 읽기’ ‘교회 됨을 넘어 증인으로’ ‘한국에서 하우어워스 읽기’라는 챕터와 부록인 하우어워스에 관한 ‘핵심 키워드’ 및 ‘주요 저서 가이드’ 등으로 구성되어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인터뷰에는 책 출간을 둘러싼 이야기와 하우어워스 이해를 심화해서 살피는 데 도움을 줄 내용 몇 가지를 담았다.

김희준 박사는 2011년 유학을 떠나 미국 칼빈 신학교(Th.M.)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위클리프 칼리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올해 1월 귀국하여, 현재 ‘큐티엠’ 영문편집장으로 일하며 대학교 출강및 영어예배부 설교, 집필 및 연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김희준 박사는 2011년 유학을 떠나 미국 칼빈 신학교(Th.M.)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위클리프 칼리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올해 1월 귀국하여, 현재 ‘큐티엠’ 영문편집장으로 일하며 대학교 출강 및 영어예배부 설교, 집필 및 연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는 어떤 책인가.

미국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윤리학 개론 입문서다. 하우어워스의 저술을 보면 반복되는 용어가 있다. 성품, 덕, 공동체, 교회, 비전, 우정…. 신앙인의 일상 단어라 생각하기 쉬운데, 단어들에는 각각 철학적이면서 신학적인 배경, 함의가 있다.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여 더 풍성하게 하우어워스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칼 바르트와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논문 내용과 추가 연구까지 포함하여 한국어에 맞게 다듬었다. 하우어워스에 관한 책이 이미 많이 나와있는 해외와 달리 한국은 하우어워스 전공 학자가 쓴 입문서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하우어워스를 제대로 이해하여 신앙생활에도 응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낸 책이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신학자에게 관심을 갖고, 연구 주제로 삼게 된 개인적 배경이 궁금하다.

미시간 칼빈 신학교(Th.M.)를 졸업한 후 철학 배경에서 칼 바르트의 조직신학을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토론토 대학교 위클리프 칼리지(Ph.D.)로 진학했다. 위클리프 칼리지에 속한 조셉 만지나 교수가 바르트의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만지나 교수가 토론토 대학교 리지스 칼리지 존 버크만 교수와 공동 진행한 박사 세미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윤리학’을 들었다. 존 버크만 교수가 하우어워스 제자이고 친구라서 하우어워스 박사가 직접 방문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목소리부터 완전 깬다.(웃음) ‘이런 사람이 세계적인 신학자야?’ 싶을 정도로, 중후함과는 거리가 먼 하이피치 목소리에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느낌이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무척 평범했던 점도 인상 깊었다. 일상에서 겪은 다른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좋았다. 생물윤리부터 시작해 비즈니스 윤리까지 넓은 범위의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는 점도 흥미로웠다. 하우어워스에 대해 관심을 두고 공부해보니, 칼 바르트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학자를 꼽았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더라.

- 이 책은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윤리학에 대한 한국교회의 오해들을 비중 있게 짚는다. 하우어워스를 오독하게 된 한국적 배경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크리스텐덤 배경이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기독교 제국이 사회를 지배한 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비슷한 아우라가 존재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한국교회는 ‘우리는 세상을 지배한 적이 있어.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다시 이 땅을 점령하고 말 거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세계화, 미국화 등 다양한 원인이 있겠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20세기 초부터 한국에서 민족운동, 독립운동, 해방운동 등 민족을 되살리는 운동을 하는 데 가장 활발히 사용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운동에 뛰어들었고, ‘민족적 기독교’라는 특이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 기독교 민족주의가 해방되고 6·25 전쟁 이후까지도 영향을 미쳤는데, 남한의 사회 지도층 인사 중 이에 강하게 연관된 인물이 많았다. 민족주의 색채 때문에 한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한국교회 역할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 등 한국 사회가 원하는 방향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뒷받침하기 위해 신학적이고 기독교적 목소리를 계속 내줘야 한다는 어떤 결박에 묶여있는 것만 같다. 이 때문에, 하우어워스 메시지를 한국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서 해석하는 잘못이 발생한다. 하우어워스를 소종파주의로 오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우어워스가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전제하는 상황이 크리스텐덤이기에 맥락이 다르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예시로 드는 인물은 키에르케고르, 본회퍼 등이다. 키에르케고르 당시 덴마크는 기독교 제국주의 문화로 가득한 상황이었고, 본회퍼 당시 독일도 나치를 지지하는 제국주의 교회가 다수인 상황이었다.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지만, 크리스텐덤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참된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기회이자 도구로 사용될 여지는 충분히 존재한다.

- 하우어워스에 대한 오해와 오독에는, 그의 저작이 다양한 주제로 띄엄띄엄 번역 소개된 상황 또한 한몫했으리라 여겨진다. 《한나의 아이》 이전에는 다른 신학자(윌리엄 윌리몬, 장 바니에 등)와 협업하는 공저자로 알려졌던 것 같다. 현재 16권이 출간되었는데, 단독 저서는 8권이다. 출간된 책을 봤을 때 하우어워스가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읽혀왔다고 평가해야 할까.

전반적으로 학술서들이 빠져있다. 하우어워스가 해온 작업이 초기부터 잘 정리돼있지도 않다. 이 상황을 설교에 빗대면, 주해 설교가 아닌 주제 설교를 모아놓은 느낌이랄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보통은 대중에게 쉽게 읽힐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책 위주로 먼저 번역해서 내게 되니까.

유학하는 11년 동안 귀국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2021년까지 한국 학계 흐름을 잘 몰랐다. 현재 북미권에서 진행되는 논의를 보면, 후기자유주의와 여성주의 신학을 넘어, 포스트-포스트모던까지 이야기하는 추세다. 귀국해보니, 한국은 여전히 니버를 논하고 있더라. 193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머물러있는 느낌이다. 칼 바르트와 그 이후를 악마화하기도 하고, 슐라이어마허나 바르트를 신정통주의자로 이해하는 흐름에서 딱히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젊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흔히 대안으로서 예일학파로 대표되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여러 신진학자에게 주목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조지 린드벡, 존 밀뱅크 등이다. 이 중 가장 대중적으로 접근 가능한 학자를 하우어워스로 생각하고 살펴보는 듯하여, 그나마 그에게 관심 있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출간된 하우어워스의 학술서 몇 권은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넓어진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초기 사상을 이해하는 입문서로 두 축이 되는 학술서 《교회됨》과 《평화의 나라》가 번역 출간되었지만 별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한나의 아이》가 반응이 괜찮았다는 소식을 듣고 신기했다.

-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에 시급히 번역 소개돼야 할 하우어워스의 책은 무엇이라 보나.

《The Hauerwas Reader》(2001)라고 본다. 하우어워스는 한 권짜리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쓴 경우가 많지 않다. 소논문을 하나씩 쓰고 발표하다가 주제별로 쌓이면 묶어서 출간하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따라서 책으로 엮이지 않은 주요 논문이 많았는데, 하우어워스의 두 제자 존 버크만과 마이클 카트라이트가 일부를 선별해 묶었다. 특히 1990년대부터 2000년까지 쏟아진 글들, 중후반기 하우어워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엑기스 위주로 담겼다. 논문들이 원본 그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장점도 있다. 하우어워스가 자기 글을 고쳐서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기 때문이다. 두 제자가 각 글 논지를 더 명확하게 수정하고 해설을 붙이는 식으로 재편집했다. 챕터마다 더 읽어야 할 책, 논문도 소개한다. 7백 쪽이 넘지만, 완독을 요하지는 않는다. 안락사, 전쟁, 폭력 등 주제별로 읽으면 된다. 가이드나 색인도 되어있다. 하우어워스에게 관심 있는 신학생이나 학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하우어워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개념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도덕 주체자’(moral agent)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하우어워스에게 개인과 공동체의 구별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가 내리는 공동체와 교회에 대한 정의는 무척 두껍다. 하우어워스 윤리학을 ‘신학적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그의 사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이해, 이를 재해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 이해, 아퀴나스를 덕 윤리, 공동체 전통으로 해석하는 매킨타이어도 고려해야 한다. 매킨타이어 영향도 받았지만, 하우어워스가 주장하는 행동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이해하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연결을 봐야 한다. 삼위일체의 내재적 관계성과 역동성이 특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 한 분인 하나님이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알아감으로써 하나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이고, 관계는 주체가 객체를 알아가기 위한 어떤 지적 관심이다. 이 지적 관심은 호불호가 명확하다. 고로 객관적인 것은 없다. 절대 관찰자적 입장이 될 수 없고, 모두가 참여자적 입장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스스로 있으면서 존재 자체가 내재적으로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다. 인간 또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창조됐기에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다. 한 사람을 예로 들면, 그 사람은 존재 자체가 주체이면서 관계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사랑의 관계를 맺는 공동체적 존재로서 한 사람, 한 공동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순수한’ 개인은 없다. 개인은 항상 공동체로 있고, 공동체 또한 개개인들이 살아있는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덕이 생겨나게 하는 끊임없는 역동성이 담보된다. 역동성이 일어나는 공동체는 기존 이야기와 전통에 도전하거나 반대할 수도 있고 다른 목소리도 낼 수 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성자-성령이 역동적으로 내재적인 관계를 끊임없이 완전하게 이루는 것처럼 공동체 안에도 역동성과 관계성이 일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하우어워스가 볼 때 개인/공동체, 교회/세상, 이성/감성, 이론/경험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일은 쉬운 길이다. 분리하는 일 자체가 계몽주의 기획과 칸트가 세운 윤리학과 철학의 프레임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 하우어워스는 이를 거부하고, 애초부터 다른 대안을 이야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으니, 기독교 윤리와 사회 윤리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 ‘시간’을 비롯한 갖가지 개념들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 진짜 사회는 하나님 나라이고, 진짜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으로서 영원이지 않겠나. 해석을 통해 주요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로 사회정의, 사회 윤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말이 안 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행위, 개별 성도와 교회 공동체가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곧 윤리의 실천이다. 특정 정치적 의도, 개인 욕심이나 야망을 품고 이 개념을 잘못 쓰면, 극단적 급진주의자나 극우주의자가 선동하면서 배타적 논조를 이어가는 데 이용될 위험성이 있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한나의 아이》를 통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금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하우어워스를 논할 때 흔히 ‘내러티브’를 강조한다. 《한나의 아이》는 내러티브 신학 방법론의 정수와 다름없는 작품이다. 하우어워스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편하게 읽어도 즐길 수 있고, 입문서를 읽고 심화된 상태에서 읽으면 또 그것대로 즐길 수 있다. 하우어워스 작품 중 거의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우어워스 사상에 담긴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를 곱씹으며 읽을 때 왜 그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서 친구들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오는 묘미가 있다.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자서전(Memoir)을 풀어가는 것이 하우어워스의 독특한 점이다. 자서전 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부분이다. 보통 바이오그래피나 자서전은 내가 뭘 했고 뭘 했다는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른 사람을 언급해도, 그때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도까지 말한다. 반면 《한나의 아이》는 친구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우어워스가 그들을 통해 뭘 배웠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자신을 그들 사이에 위치시킨다.

- 왠지 처음 읽을 때 ‘왜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지?’ 싶더라.

한 주체가 객체를 알아가는 일은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주체가 객체를 알게 되면 앎으로써 객체를 닮아간다. 즉 성부는 성자를 더 앎으로써 하나가 되고, 성자는 성자로서 성부를 알아가면서 하나가 된다. 성령까지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서로를 사랑의 편향성을 지닌 지식으로 완벽히 앎으로써 관계를 맺는다.

하우어워스가 《한나의 아이》에서 아들 애덤에 관해 말할 때 ‘내가 그와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단순히 수사적 언어가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하우어워스와 아들 애덤이 강요나 억압 없이 서로를 알아가면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하우어워스가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알아갈 때 성령 하나님이 그 사이에서 일한다는 말이다. 하우어워스는 친구라는 객체를 강요나 억압이나 조종 없이 내면에서 더욱더 알아갈수록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셈이다. 이 이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관계를 통해 서로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것을 요구받으며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 되어간다.

하우어워스가 생전 모르는 사람이 연락해서 편지를 써달라거나 팟캐스트에 출연해 달라거나 뭘 해달라고 부탁해올 때 가능한 한 다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이유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열려있는데, 거절해야 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안 된다’고 칼같이 말한다.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있으면 ‘그거, 잘못된 거야’ 분명히 말하고, 논문에서도 친구들 주장 중 비판할 점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복음서에 적혀있듯이, 예수께서 형제가 잘못할 경우 ‘맞설 수도 있다’가 아니라 ‘맞서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하우어워스가 이해하는 친구의 관계, 곧 우정과 사랑의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서로 온전케 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이처럼 하우어워스에게 공동체, 교회, 도덕 주체에 대한 이해의 레이어는 매우 두껍다. 덕, 성품, 비폭력 등도 이 안에서 연결돼있다.

2013년 10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평화’를 주제로 강연 중인 스탠리 하우어워스 박사. (출처: 플리커)
2013년 10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평화’를 주제로 강연 중인 스탠리 하우어워스 박사. (출처: 플리커)

- 《한나의 아이》에서 많은 이가 인상 깊게 보았던 대목은 하우어워스의 아내 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처 앤은 양극성장애(조울증)에 시달렸고, 하우어워스와 아들 애덤의 삶은 고통스러운 나날로 점철되었다. 결국 이혼을 요구하고 하우어워스를 ‘버린’ 앤은 그 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다가, 자신의 친어머니와 같이 50대 초반의 나이에 울혈성 심부전으로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하우어워스의 ‘후기’를 보면, “앤의 삶이 나의 신학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반대 논거가 되는지 내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매케니는 말한다”라는 비판이 등장하기도 한다.

몇몇 여성신학자가 지적한 내용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앤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당신이 쓴 내용을 반박하지 못한다. 당신은 말을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세계적 신학자이고 앤은 논리적으로 자기 생각을 풀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정신질환자 아니었나. 앤에 대한 이야기를 사용하는 일은 폭력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비판하는 자기기만 아니냐?’

《한나의 아이》는 하우어워스가 친구들에게 요청을 받아 쓴 책이었다. 하우어워스는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이야기하려면 앤을 빼놓고서는 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그의 입장에서 최선은, 앤을 아는 사람에게든 책을 통해 앤을 알게 된 사람에게든 ‘앤은 적(敵)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일이었다. 하우어워스는 ‘삶은 비극이다’라는 주장을 위해, 혹은 비극의 일부로 다루기 위해 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앤은, 결국 하우어워스가 다 받아들이지 못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끌어안으려 노력해서 지금 자신이 되게 한 ‘삶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무척 힘들었던 선물이었다. 이에 대한 다른 설명은 어려울 듯하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앤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잘 보면, 앤을 언급할 때 그와 하우어워스 둘만의 이야기로 다루지 않는다. 항상 주변인들이 언급된다. 앤과 하우어워스를 같이 알았던 주변인들 이야기가 함께 언급되며 동행한다. 그런 면에서 자기기만으로 보기 힘들지 않을까.

- 하우어워스에게 영향을 끼친 존 하워드 요더와 장 바니에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세계적인 신학자 존 요더는 많게는 100여 명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지적장애인 생활 공동체 라르쉬를 설립한 철학자 장 바니에는 생전 6명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보도가 사후에 나오기도 했다. 하우어워스는 요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했고, 바니에와 함께 책을 냈다.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윤리학 관점에서 요더와 바니에를 둘러싼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자리에 하우어워스가 있다면, 존 요더와 장 바니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확언하면 확언했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저지른 폭력이 얼마나 파괴적이었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는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말하기도 했다. 한 가톨릭 미디어와 인터뷰할 때도 다시 한번 장 바니에가 저지른 잘못을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의나 책에서 존 요더와 장 바니에를 언급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우어워스는 그들을 ‘보라’고 말한다. 그들을 롤모델 삼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 도로시 데이 등 어떤 ‘전형’으로 보여지는 유명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특정 행동이나 일정 기간 동안의 삶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까지 살펴서 보라는 의미다. 그들 자체를 하나의 전형이나 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요더나 바니에는 책망받았을 때 자기 정당화를 시도했다. “실험이었다” “상호 합의했다”는 식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자신들이 쌓아온 작업들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을 저질렀다.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자기기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다만 바니에가 저지른 폭력이 있다고 해서, 그가 세운 라르쉬 공동체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영광을 증언한 일들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폭력을 잊거나 덮는 행위 없이, 폭력도 함께 기억하면서 그들이 남긴 것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냐는 말로 인간의 약함과 악함까지도 핑계대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폭력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치유와 돌봄은 즉각적으로 급히 일어나야 한다. 그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하우어워스 신학은 요더나 바니에를 거치지 않더라도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있다. 하우어워스가 요더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신학과 윤리학이 요더 것과 똑같지는 않다. 앞서 말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기반해서 보면, 요더를 몰랐어도 예수의 비폭력 윤리와 신학을 완성도 있게 작업해 왔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말에 하우어워스 박사는 ‘아니다’고 반대하겠지만 말이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현재 한국교회 상황에서 하우어워스 신학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시급한 영역은 무엇이라 보는가.

‘비폭력’이지 않을까. 우리 목사님이나 우리 교회를 건드리면 죽음이나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이 있다. 특히 정치적 반대 집단을 향해 내뱉는 말만 봐도 그렇다. 폭력적 기운이 차있다. 하우어워스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갖고 있는 힘을 내려놓는 것을 배우는 데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그에게 힘은 얻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우리에게는 참된 주권이 없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이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증언하며 따라가는 삶이 증인 된 제자도의 삶이다. 교회의 교육, 설교, 양육, 예배 등에서 비폭력 담론이 시작돼야 한다.

비폭력이라고 하면, 반론처럼 따라붙는 말이 있다. ‘북한과 전쟁 나면 총 안 들 거냐’는 물음이다. 하우어워스는 국가 간이든 공동체 간이든 정치적 폭력성에 의해 폭력이 이미 발생했을 경우에는 비폭력적 수단이나 평화적 해결책이 끼어들 여지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전한다. 이미 폭력으로 시작한 것은 폭력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명확히 말한다. 물론 그것이 폭력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정당성을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한국은 아직도 휴전 중이니, 이미 폭력이 벌어진 상황이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닫아야 하느냐? 아니다. 전국 동사무소 숫자보다 교회 숫자가 더 많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 정부를 막으라는 말은 아니지만,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창조적 대안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비폭력이 비현실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존의 틀 안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이미 만들어진 구도 밖에서 사고해야 창조적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진행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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