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호 책과 사람]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저자 박영호 목사

1세기 교회를 다룬 책이 연이어 출간되는 가운데, 국내 저자의 책인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IVP)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8월 초 출간 이후 온라인서점 기준 종교 분야 도서 판매 순위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책이 널리 읽히게 된 주요 원인으로는 난이도 조절과 팩트 체크가 꼽힌다. 저자인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는 학계의 연구를 성실하게 반영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썼고, 모르는 부분은 비워 두었다. 흔히 알려진 1세기 교회의 모습 중 상상력으로 치우친 부분을 ‘사실’(fact)과 ‘자료’에 터해 균형을 잡았다. 상상력의 과잉을 걷어내고 여백을 만들자 오히려 초대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듯했다.

박영호 목사는 미국 예일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신약과 초기 기독교 문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장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18년부터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박영호 목사는 미국 예일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신약과 초기 기독교 문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장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18년부터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의 판매량이 종교 분야 상위에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사람들이 많이 읽어주니까 보람이 있어요. 기독교 서적이 전체적으로 판매량이 저조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출판사나 글을 연재한 〈하나님 나라 QT〉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감사한 일이죠. 

- 2016년도부터 연재하신 글인데요. 지금처럼 1세기 교회에 관한 관심이 높진 않았던 때 같아요.

5년 전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1세기 교회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어요. 이후에 관련 책을 출판사들이 많이 내면서, 그것이 독자들의 필요나 욕구에 의해 호응을 얻게 된 것 같아요. 

- 왜 사람들이 1세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보시나요? 

그동안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면서 1세기 초대교회와 관련한 텍스트는 많이 접해왔는데요. 텍스트를 자주 접했을지 몰라도, 그때의 구체적인 정황이 어땠는지를 알 기회는 많지 않았어요. 1세기 사회 상황이 어땠는지, 당대 텍스트와 현실의 관계가 어땠는지 살필 기회가 없었던 거죠. 최근에 그리스-로마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대중적인 책이 소개되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1세기 그리스-로마에 대한 학문적 논의들은 1990년대부터 진행되었는데, 그 연구들을 대중적으로 소화한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 이 책의 부제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회사적 성경 읽기’입니다. ‘사회사’라는 말이 좀 생소합니다. 

쉽게 말해, 사회사는 정치사(political history)와 대별되는 개념입니다. 보통 로마의 역사를 다룰 때, 카이사르 같은 장군들의 전쟁 이야기로 서술하는 방식을 정치사라고 한다면, 그 전쟁에 참전한 일반 백성 관점에서 쓰는 방식을 사회사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를 목표로 합니다. 세계 역사의 연구 방향은 사회사로 확장된 지 오래입니다. 사회계층 문제, 평민의 삶, 가족관계 등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요. 

- 전문 연구자와 대중 사이에서 난이도 조절에 성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쉽게 쓰시면서도 주요한 학계의 주장들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시거든요. 

요즘 나오는 1세기 교회 관련 서적 중에는 전공자인 제가 읽기에도 다소 어려운 책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성서학자가 많은데요. 저 스스로 성서학자로서 어떻게 교계에 기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국 사회와 교회의 맥락에서 필요한 주제를 다루면서 전문적 연구의 결과를 대중적으로 소화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한 것이지요. 제 경우는 연재를 하게 되면서, 늘 독자를 염두에 두면서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맥락을 단순화하기는 어렵고 반드시 들어가야 할 자료도 있었기 때문인데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서도 핵심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탓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 목사님은 왜 1세기 사회사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기본적으로 우리 기독교의 출발인 예수님도 1세기 사람이고, 바울도 1세기 사람이잖아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1세기 당시 실제적 삶인 사회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제 일생의 관심사인 ‘교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교회란 뭘까? 1세기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관심을 계속 기울였는데, 그것은 곧 오늘의 교회를 위한 질문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오랫동안 교계는 실제 모습을 탐구하기보다는 특정 교회론에 맞추어 1세기 교회상을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바울이 처음부터 교회의 청사진을 그려놓고 교회를 만들고 이끌었다는 견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어요. 바울의 관념 속에 완료된 교회의 형태가 존재했다고 믿고 이를 좇았다는 말인데, 사실은 바울도 교회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거든요. 오히려 실험정신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 실험정신이요? 

바울이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써준 편지(몬 16절)를 보면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하는데요. 바울은 이전에는 하지 않던 고민을 하게 된 거죠. 완성된 청사진이 있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복음이 어떤 갈등을 일으킬지 가늠하기 시작한 거예요.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고민을 시작하고, 복음이 현실의 삶과 밀고 당기고 부딪히면서 신학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거죠. 바울은 디모데전서(6:1-2)에서는 또 다른 경향을 보여요. 격의 없어진 주종 관계에 제동을 걸기도 하죠. 속도 조절이 필요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거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 중에는 노예인 이를 위해 돈을 모아 해방해준 기록도 있어요.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를 넘어서는 사회를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과 노예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핵심 진리에 이르렀음은 분명합니다. 그 씨앗이 평등 사회로 이어지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 책에 바울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행 16:16)을 마주치고도 며칠이나 참았던 이유도 설명하는데요. 사회사의 관점에서 읽으니 더 명확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귀신이 나가자마자 노예의 주인들은 바울을 고소하지요. 그 여종에 대한 주인의 권리, 당시 로마적인 삶의 근간인 가부장(paterfamilias)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울도 며칠을 고민한 겁니다. 공화정 시대의 가부장은 노예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생살여탈권까지 갖고 있었어요. 황제정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바울의 행위는 중대한 범죄였던 거죠. 바울은 복음만을 전하고 싶었지만, 복음은 로마 세계 전체를 흔들게 됩니다. 

-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구조적 죄를 드러냈던 것 같습니다.

사회 속에서 구조화된 죄와 대결해야 하는 거죠. 여자의 생명보다 나의 이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문화와, 그 근간이 되는 로마적 삶의 방식 자체가 죄인 거죠. 그런데 삶의 방식에 녹아있는 이런 죄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눈물 흘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죠. 삶의 방식 자체를, 사고방식을 전복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도 죽이고, 바울도 죽였죠. 죄에 맞서 가장 근본적인 대결을 걸어오는 이들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 아닐까요?

- 이 책의 영어 부제가 ‘The first Christians in their social world’입니다. 번역하면 ‘그들의 사회적 세계 속 첫 번째 그리스도인’인데요. 그 ‘세계’에 대한 여러 오해를 교정하는 부분이 많이 눈에 띕니다. 

‘사회적 세계’(social world)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그들이 살고 또 그들이 이해했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사회적 세계를 말합니다. 미국에서 백인 동네끼리는 가깝게 느끼고, 흑인이 사는 동네면 물리적으로 가까워도 더 멀게 느끼는 것이 사회적 세계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살던 세계”라면, 또 하나의 의미는 “그들이 만든 세계”입니다. 흑인 친구들이 생기니까, 그 동네가 가까이 느껴지더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적 세계가 바뀐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사회에 적응하고, 한편으로는 맞섰습니다. 중심은 복음이었고요. 그리스도로 인한 “새창조”가 현실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그들이 창출해낸 ‘사회적 세계’라 할 수 있죠.

- 그 세계에 대한 입체적 이해 없이 초대교회의 특정 단면이 강조되고는 하는데요.

일례로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배우자’고 하지만, 정말로 그게 가능해지려면 실제 초대교회 공동체의 세계관이 지금 우리 교회에 작동하고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취업을 못 해서 힘겨워하는 교회 청년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사람들이 종교적 언어로 이런저런 말은 많이 해주는데, 정작 교회 내 세계관이 좋은 대학 간 청년들을 더 칭찬하고 연봉 높은 청년들에게 임원을 맡기는 문화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세상 기준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세계관이 작동해 사회적 약자들이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곳일 뿐이지요. 초대교회에는 삶에 지친 이들이 많았어요. 세상의 세계관이 그들을 실컷 조롱할지라도 교회에 자기 삶을 걸어도 좋을 세계가 작동되고 있었죠. 이렇게도 살아지네, 나의 모든 인생을 걸어도 좋겠구나, 하는 역동성이 있었어요.

인터뷰는 9월 초 광명시의 한 카페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는 9월 초 광명시의 한 카페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1세기 교회의 모습을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온 이들의 코를 찌를 듯한 땀 냄새로 가득했을 곳’으로 그려내셨어요. 비슷한 표현이 책에 여러 번 반복됩니다. 

당시의 사회적 계층과 경제적 수준을 고려하면,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 수준’으로 보입니다. 다수는 한밤중에 여행하던 친구가 방문해도 먹을 것을 내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죠.(눅 11:5-8) 로마 사회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슷한 형편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렇기에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IVP)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책임에도, 예배 장소로 여유로운 로마의 한 개인 주택을 묘사하고 있는 점 등은 아쉬운 대목이죠. 

-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을 고려하니까 신약성서에서 헌금에 대해 기록된 부분이 새롭게 읽히더라고요. 

구체적인 추정이나 상상이 가능해지죠. 먹고 마시는 횟수를 줄여서 헌금을 냈을 것이고, 비상금을 내기도 했겠지요. 바울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준 헌금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쓴 것이고요. 반면 고린도 교회로부터 온 헌금은 받지 않아요. 고린도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달리 공적 자금을 운용하지 않았어요. 유력한 개인에게 돈을 받는 일을 경계한 거지요.

- 관련해서 로마 사회의 다른 조직들은 물질적으로 크게 기여한 특정 개인을 특별대우하거나 기념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기독교 공동체는 그렇지 않았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권을 주거나 명예를 돌리는 문화와 거리를 두었어요. 당시 영예를 돌리는 일이 정말 흔했거든요. 요즘 교회 주보에 이름을 적듯이 흔한 문화였는데, 바울은 경계했어요. 물론 부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부자들의 기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위계로 작동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죠. 바울의 시대에는 적어도 복음의 영향력이, 즉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세계관이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작동했고, 실제로 그렇게 대했어요. 당시 사회가 너무 계층화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일이 오히려 전복적으로 보인 셈이죠. 바울이 그리스도인 모임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 ‘에클레시아’의 기본 정신이 평등입니다. 불평등한 질서가 다스리는 사회에서 평등을 복음의 중심에 놓고 그 정신을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 세속적인 조합, 에클레시아 셋을 비교하자면, 혹자는 종교단체라는 점을 들어 회당과 에클레시아를 비슷하게 보지만, 제가 보는 사회사 관점에서는 오히려 회당과 조합이 비슷했고, 에클레시아는 회당이나 조합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어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의식이죠. 

- 예를 들면요? 

고린도전서의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6:4)라는 구절은 곧 ‘왜 에클레시아에서 가볍게 여김을 받는 세상의 재판장에게 의지하느냐’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력한 재판장이 있어 모두가 그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어도, 에클레시아(교회 공동체)에서는 그 사람 앞에서 기죽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힘을 많이 쓰는 사람들도 에클레시아에서는 그 위계의 역학 관계가 효력을 잃는 거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지위보다 더 고귀한 지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그 자의식대로 살기를 바랐고, 거기서 약간만 이탈해도 견책했습니다. 

- ‘에클레시아’를 주제로 박사 학위논문을 쓰셨고,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는데요. 바울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대표하는 핵심 조직인 ‘에클레시아’ 개념을 사용하게 된 맥락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신다면요?   

‘부름을 받은 공동체’라는 어원이 있습니다만, 사실 어원보다는 그들이 속한 사회적 세계에서 바울이 ‘에클레시아’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언급하셨듯이 에클레시아는 본래 아테네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조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바울 시대의 에클레시아 모습은 매우 어지럽습니다. 사도행전은 에베소에서 벌어진 소동을 전하며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19:32)라고 표현하지요. 에베소 에클레시아의 이 모습은 그리스 정치의 쇠락을 보여주는 스냅숏이에요. 숙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은 결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울과 베드로를 죽이지요. 반면, 사도행전 15장은 교회가 두 동강 날 만한 위기를 극복해가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모습을 전합니다. 이성과 분별력을 갖춘 이들이 성령의 이끌림으로 토론을 거쳐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모습이지요. 이런 정치적 지향을 포함한 종합적인 의미로 바울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썼고, 이는 곧 하나님의 거버넌스를 가진 곳이라는 자의식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도 많은 문제를 노출했지만, 적어도 이런 자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지요.

- 교회 구성원 중 하층민이 대다수임을 감안할 때, 바울서신이 그들의 지적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편지였다는 언급이 흥미로웠습니다.

재미있는 지점이죠. 로마서나 에베소서는 굉장히 논리적으로 짜인 글이었어요. 당시 서민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던 관행이 있었지만, 대체로 대여섯 줄 정도의 일상적 언어의 편지였습니다. 로마서를 읽으라고 하면 다 잠들었겠지요.(웃음) 그러나 ‘자기가 읽는 일’과 ‘남이 읽어주는 것을 따라가는 일’은 별개이거든요. 초대교회 교인들은 논리적인 편지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그 글의 논리에 노출되는 거죠. 모범 문장을 따라 읽고 외우면서 그 논리가 내재화되는 과정을 밟았고, 자연스레 기독교 서클 내에 논리성을 갖춘 사고를 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어요. 당시 지식인 계층에서나 쓰는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문서 문화가 생겨난 거죠.

- 예수님은 지식으로는 결코 고도로 훈련된 지식인을 이길 수 없었을 것 같은데, 그의 가르침이 당대 지식인 엘리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추정하자면, 내적 확신 때문이었겠죠. 당대의 지적 풍토를 생각해보죠.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라는 재미있는 묘사가 나옵니다. 진리 추구보다는 학문의 겉모양을 중요시했다는 거죠. 지금 한국에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이 소비되는 풍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적 풍토는 어땠을까요? 치열한 지적 게임을 하던 시기였지만, 어떤 틀에 갇혀있었어요. 예수님의 거침없는 가르침은 그 틀을 깨뜨렸습니다. 답답한 틀을 벗어나서 진리를 가르쳤을 때,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과 달랐다고 하잖아요. 청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고요. 지식인들이 설계한 지적인 감옥에서 그것을 터뜨리고 나오니까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저는 기존 학문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예수님의 담대함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에서 온 거로 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자의식도 ‘기탄없이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 섣부른 비교는 피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의 교회 모습과 대비되는데요. 

한국 교계에는 절망적인 일들이 많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될 때 세상에 복음을 드러낼 수 있을 텐데요.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조급함이 문제인가 싶어요. 모든 인생을 걸고 순종해가며 맺어야 할 열매를, 한순간에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들이 아닌가 싶어요. 각각 교회 사정에 맞게 작은 변화부터 시도하며 지혜를 모아야겠죠. 어떤 완성된 교회상이나 이상적인 청사진을 놓고 내달리기보다는, 침착하게 의미 있는 걸음걸음을 내디딜 때인 것 같아요.

진행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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