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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는 ‘국가’를 무엇이라 하는가?
[316호 커버스토리]
[316호] 2017년 02월 22일 (수) 11:45:55 박영호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goscon@goscon.co.kr

최근 어느 일간지에 하버드 대학교의 글쓰기 교육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그중 이런 대목이 신경을 건드렸다.

“미국 대학들이 이렇게 글쓰기를 강조하는 것은 글쓰기가 깊이 있게 사고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하버드 대학교가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국가 경쟁력’이라는 목표를 공개적으로 내걸었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하버드 대학의 프로그램을 기자의 평소 가치관 프레임 속에서 소개한 결과이다. 그 프레임에서 최고의 선은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의미 있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노력이 ‘국가’를 위해 바쳐져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안에 내재된 뿌리 깊은 국가주의의 발현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배운 윤리 교과서는 “국민 윤리”였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이 과목 앞에 왜 하필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할까? 학창 시절 때 중요한 ‘식’에서 늘 낭독하고, 암송하기도 한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민족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정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일까?

우리 안의 뿌리 깊은 국가주의
지나간 옛이야기만이 아니다. 모든 가치를 국가라는 이름 아래에 배열하는 ‘국가주의’는 지금도 우리 사고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빼어난 미모에, 재력 든든한 부모, 준수한 남자 친구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이를 볼 때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전생이라는 표현에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다. 이 말에 담긴 내세관이 딱히 기독교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말들이 전생과 윤회에 대한 구체적인 사고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에 내재된 더 중요한 믿음이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은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예도 들어볼 수 있겠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 갔느냐는 질문을 중·고등학생들은 이렇게 한다. “그럼 이순신 장군은 지옥 갔어요?” 절대 지옥 가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의 누구보다 선한 것이 확실한 사람의 예가 이순신이다. 애국을 최고선 혹은 절대선으로 보는 입장은 여기서도 강고하다.

애국이 왜 나쁜가, 나라 사랑이 무엇이 문제인가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애국’이 아니라 ‘애국주의’이다. 나라 사랑이 잘못이 아니라, 나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를 압도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모두가 개인의 이익을 구하고 사리사욕을 챙길 때, 나라와 민족이라는 대의를 품고 이에 헌신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국가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며, 한 인간의 삶의 목표라고 할 정도로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과 ‘국가’의 경쟁
이에 대한 성서의 시각은 분명하다. 무엇이든 절대가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는 맘몬(물신)이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성서는 우리의 충성을 놓고 하나님과 경쟁하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 규정한다. 경제가 우상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은 ‘정치’와 ‘국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사실, ‘신약성서의 국가관’이라는 제목은 당혹스러운 주제다. ‘국가’(國家)라는 단어가 개역개정 구약성경에는 서너 차례 등장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나라” 혹은 “왕국”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를 말하는 성서신학의 중요한 언어다. “하나님 나라”는 성서 전체의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생경하다.

사실 국가라는 말 자체가 복잡한 개념이며, 수상한 조어이기도 하다. 《맹자》에 국가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근대 한국어의 어휘에 중요한 단어로 들어온 것은 일본을 통해서이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나라[國]와 천황 가(家)에 대한 충성을 하나로 합쳐, 둘을 동일시함으로써 천황 중심 이데올로기의 중심단어로 삼은 것이다. “충성”의 대상으로서의 “국가”는 21세기 한국인들의 심층 심리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에 충성한다’고 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무엇에 충성하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다시 국가라는 말의 모호성이 문제가 된다. 국가라는 말이 나라 전체, 백성과 그 주권 심지어 그 문화적 전통까지를 포괄하기도 하고, 단순히 정부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왕정시대에 충성의 대상은 왕조, 사실은 왕 개인을 향한 것이었다. 

“죽도록 충성하라!”
신약성서에서 국가의 이러한 본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로마 황제를 짐승으로 형상화하고, 하나님께 향할 경배를 요구하는 악한 세력으로 규정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국가권력이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는, 하나님보다 더 궁극적인 충성 대상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우상이다.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가 담긴 요절이 “죽도록 충성하라!”(계 1:10)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충성은 단순히 무력에 의해 강요되는 것만은 아니다.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매매를 금한다는 말의 이면에는, 짐승에게 경배할 때 경제적인 풍요가 약속된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결국, 우리의 충성을 놓고 벌이는 하나님과 국가(우상)의 경쟁은 ‘약속과 약속의 경쟁’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가져올 평화와 번영의 약속과, 하나님이 가져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공동체에 서신을 쓰면서 수신자들을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부른다. 첫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에클레시아에게”라고 쓰고 있다. 에클레시아는 당시 한 폴리스의 자유시민 전체를 회원으로 하는 정치집회, 민회(民會)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데살로니가전서 전문가인 돈프리드(K. P. Donfried)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allegiance)을 표현하는 문구를 그대로 빌려왔음을 지적한다. 그 자리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충성의 대상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의도는 빌립보서 3:20-21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시민권”이라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폴리튜마”(πολιτευμα)로 일정한 정치체제를 갖춘 정치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부를 의미하기도 하는 이 단어는 우리말 ‘국가’의 복합적인 뉘앙스에 가장 가까운 단어이다. 만약 국가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규명해주고, 따라서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실체라면, 이 땅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국가가 없다. 하늘에 그들의 국가가 있을 뿐이다.

황제인가, 예수인가
그러나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대로 악을 제어하고, 선을 장려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잠정적으로 또 한시적으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의 정부에 그리스도인들은 순복하고, 시민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긴장 가운데 그리스도인과 국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의 시민으로서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되, 자신의 정체성(뿌리)을 이 땅의 국가에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민족중흥을 위해서도,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목적을 아는 사람들이다.

빌립보 시(市)는 로마의 “식민지”였다고 사도행전은 보도한다.(행 16:12) 현대의 식민지는 수치스러운 딱지이지만, 당시의 빌립보는 그 시민들이 로마 시민들과 똑같은 법적 특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식민지였고, 이는 자랑스러운 특권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자신들과 로마와의 특수한 관계를 자랑하며, 이 특권을 자신들의 정체성 기반으로 삼았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 뿌리를 로마 정부에 두는 빌립보 시민들의 정체성과 그 삶의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자”(소테르)라는 말 역시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테르(σωτηρ)는 전쟁 중에서 포위된 성을 구해줄 장군, 혹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회복시켜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단어이다. 로마의 이데올로기는 황제가 소테르라는 것이며, 당시 빌립보 시민들의 자부심은 황제를 소테르로 믿고 살아가는 세계관에 근거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소테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가(혹은 이 세상의 국가가) 줄 수 있는 약속과 그리스도(하나님의 나라)가 약속하시는 바를 선명하게 대비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자기 정체성의 뿌리로 삼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교회”(에클레시아)의 생활 방식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로마제국의 국가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여!”
빌립보서 3장의 하늘의 폴리튜마 선언은 로마제국 차원의 국가주의뿐 아니라, 빌립보 시의 특권적 지위를 정체성의 뿌리로 삼는 소국가주의 사고와도 대결하고 있다. 주후 1세기는 로마제국 내에서 각 지역의 애국주의적 열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의 상황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이 큰 부흥을 가져오자, 엄청난 반작용이 생겨났다.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 모형을 만들어 장사하던 이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구호는 단순하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여!” 이 구호에서 우리는 애국주의와 종교의 결합을 본다. 표면적으로 종교와 정치가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데, 사실 이 구호를 외치는 내적인 동기는 경제적이다. 에베소라는 도시국가와 아르테미스라는 여신에 대한 충성을 외치는 것이 자신들의 장사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다.

 

   
▲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르테미스 상 (사진: ko.wikipedia.org)

애국과 종교를 구실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재현된다. 세상 최고의 애국자인 양 나섰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나니, 갖가지 사리사욕을 채울 뿐 아니라, 집무실에 출근도 제대로 안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안보를 가장 강조하는 정당의 국회의원들이 오히려 군대 안 다녀온 비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경우 애국주의는 다른 이익을 챙기기 위한 구호로 쓰일 뿐이다. 애국주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게 되면, 애국의 간판 아래 이기적인 동기와 윤리적 결함을 숨기기 용이하게 된다. 오죽하면 새뮤얼 존슨이 “애국주의는 악인들의 최후의 피난처”라고까지 했겠는가?

문제는 애국주의의 감성적 구호가 잘 먹힌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여!” 하는 구호는 삽시간에 극장을 군중들로 가득 차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군중들은 애국주의적 구호에 충동되었을 뿐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인지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 19:32) 여기서 사도행전 기자는 애국주의적 열망의 비이성적 모습을 희화화하고 있다.

몇몇의 선동에 의해 충동적으로 모인 군중들이 실지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괴성을 지르고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군중들이 그렇고,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처형 장면 역시 비슷한 혼란으로 보도되고 있다. 7장과 19장에서 군중의 분노를 격발한 핵심어가 “손으로 지은”(행 7:48; 19:26)성전이 신의 임재를 담보할 수 없다는 단언이라는 점은 두 상황을 단단히 연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놀랍게도 이방신을 섬기는 에베소에서 에클레시아로 모인 군중들의 애국주의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애국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15장에서는 또 하나의 에클레시아를 소개한다. 이방인 선교 와중에서 불거진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예루살렘 회합이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 공의회라 불린 이 회의를, 사도행전은 질서정연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 결정 사항이 공식적인 포고령 형식을 빌려 세계에 하달되는 격조 높은 정치적 에클레시아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애국주의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에베소의 혼란스러운 에클레시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충동적 폭력적 비이성적 군중집회와 선명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이 회의의 결과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과 그 중심성을 유지하면서도, 이방인들에게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기로 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차분한 숙고와 질서 있는 토론이 있는 곳에서 무분별한 애국주의와 폐쇄적 민족주의가 극복된다. 이 결정은 기독교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유대적 토양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음에도, 그 민족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를 품는 신앙운동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늘의 예루살렘, 하늘의 폴리튜마
요한계시록 역시 로마가 제국의 백성들에게 제시한 약속과 대결하면서, 동시에 예루살렘 중심의 폐쇄성 문제와도 씨름하고 있었다. 11장 8절에는 놀라운 선언이 나온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요한계시록에서 로마 황제가 짐승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 역시 심판받아야 할, 악한 도시로 등장하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의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심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올 예루살렘”(21:2)을 종말 기대의 중심에 놓는다.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구약 에스겔과 유사하게 성전을 측량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성전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에 속한 것이다. 이로써 계시록은 지상의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를 극복하고 유대적 애국주의의 중심 상징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지명이 담지하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과 그 언약신학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예루살렘을 천상으로 밀어 올림으로써 지상의 예루살렘이 가질 수 있는 폐쇄성과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으면서, 예루살렘을 넘어서는 신학적 비전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빌립보서 3장에 나타난 바울의 “하늘의 폴리튜마”라는 선언이 신학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천상의 예루살렘이라는 사고 뒤에는 스토아 철학의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교류하면서 정체성 문제를 씨름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지적 노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감지된다. 이 글에서 다루기 힘든 큰 주제이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스토아적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이상과 고민이 그리스도인들에 와서 제대로 열매 맺게 되었다는 사상적 흐름을 그려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신학적 작업들을 통해 기독교가 세계적 보편성을 띤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했을 뿐 아니라, 서양 역사에서 참다운 보편주의가 꽃필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대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에 무력 투쟁으로 맞선 열심당적 애국주의와도 거리를 유지해낸 신학적 성과도 소중하다. 현존하는 국가의 종교적 성격을 폭로하고 국가주의 우상에 맞대결하면서도, 우리의 ‘국가’를 만들어 그것을 다시 우상화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복음을 지켜낸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의 예루살렘’과 빌립보서의 ‘하늘의 폴리튜마’라는 심상이 이 신학의 중심에 있다.  

성전 심판의 네 가지 의미
위에서 바울,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등 신약 성서의 다양한 전승 층에 국가주의와 거리를 유지하는 신학적 구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일관성은 예수에게서 발원한 것이다. 예수의 지상 사역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 사건에서 네 가지 정도의 의미를 꼽아 볼 수 있다. 

첫째, 권력에 대한 심판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통치 권력의 중심이었다. 제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의 억압성을 폭로하고 그 권력을 심판하신 것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성전에 대한 헌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성전 제도에 대한 헌신을 분리함으로써, 성전 권력의 토대를 허물어 버리신 것이었다. 

둘째, 경제적 동기 폭로
성전을 중심으로 국가와 종교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고리는 경제였다. 제사장들은 성전을 장사터로 만들어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당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레코-로만의 향락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음을 증언한다. 애국주의와 야웨에 대한 신앙을 명분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했지만, 그들의 생활은 민족의 전통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국가주의의 경제적 동기를 지적하는 예봉은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 그리고 바울(빌 3:19)에게서도 볼 수 있다.

셋째, 국가보다 백성
예수님이 그 나라를 사랑하셨다면, 그 대상은 국가라는 제도가 아니라 백성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함을 보고 긍휼히 여기셨다. 국가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은 어떤 제도도 그것이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천명하신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도, 성전이라는 제도도 마찬가지다. 제도가 사람을 섬겨야 한다. 국가를 위하여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국가가 있어야 한다.

넷째,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성전이 로마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은 주후 70년의 일이지만, 이 일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져 복음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성전 멸망 이후를 신학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언을 싣고 있는 마가복음 13장은 작은 묵시록이라 불리며, 요한계시록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신약성서 전체의 통일성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셔서 발로 밟고 다니신 땅에서 만난 백성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성취를 소중히 여기셨다. 그러면서도 온 세계를 향해 팔을 펼치셨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지만, 부활 이후에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8)고 명하시기도 하신다. 한편으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말씀하시며 민족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새로운 백성 형성을 말씀하셨다.

바울 역시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것까지 감수할 만큼 동족 사랑이 있었지만(롬 9:1-3) 그 민족 사랑이 폐쇄적으로 귀결되지 않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보편적 복음(갈 3:28), “만물”을 포괄하는 우주적 복음(엡 1:23; 빌 2)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본래 가지셨던 인류 구원의 원대한 꿈을 이어받은 덕분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결코 한 민족의 틀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었고, 애국주의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약성서를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의 시각은 한결 넓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영호
성서를 제대로 읽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는 성서학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예일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에 약속의교회를 개척하여 10년 동안 섬겼고, 2005년에 한일장신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 경건실천처장으로 섬기고 있다. 미주 코스타를 비롯한 국내외 각종 집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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