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호 사람과 상황] 35년 차 인권운동가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 (재)4·16재단 상임이사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사회복지법인 에바다복지회 이사, 인권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장, (재)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박래군 (재)4·16재단 상임이사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사회복지법인 에바다복지회 이사, 인권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장, (재)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4·16재단 박래군 상임이사는 35년 넘게 인권운동 현장에 남아있는 활동가다. 1988년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의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혈된 눈으로 현장을 찾아다녔다. 국가 폭력에 의해 벼랑 끝으로 몰린 이들과 함께하다가 여러 번 구속되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는 그의 이력을 소개할 때는 늘 동생 박래전의 이름이 따라붙는다. 1988년, 광주 학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몸을 던진 동생 박래전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동생의 죽음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리다. 활동가이기 이전에, 동생이 바라던 ‘세상’을 이루어가는 유가족인 것이다.

끔찍한 참사 뒤,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독하는 말과 정쟁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를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귀다툼의 현장에서도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연대를 위해 분투하는 그에게 희망의 근거를 물었다.

- 용산 참사, 평택 대추리 강제 이주, 쌍용차 농성… 등 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늘 자리를 지키고 계셨는데요. 관련해서 몇 차례 구속도 당했고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 국가 폭력의 현장을 많이 찾아다녔네요. 여기저기 많이 다니며 싸웠고, 감옥살이도 여러 번 했고요. 그런데 최근엔 그런 생각을 해요. 사람이 죽기 전에 움직여야 하는데 늘 사람이 죽고 나서야 이런 싸움을 한단 말이에요. 사후약방문식의 운동이었던 거예요. 물론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커요. 반성하고 있어요. 이제는 사람이 죽지 않게 사전에 막는 운동을 하고 싶어요.

- 인권운동가로 35년을 살아오셨습니다.

인권뿐 아니라 더 멀리 내다보는 운동을 하고 싶은데 참 어려워요. 사람의 생명조차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세상에서 동물의 생명이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동식물의 생명에도 관심이 없는데 생태계가 이렇게 파괴되는 것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바꿔가야 하나 운동가로서 고민하지만, 현실은 늘 그때그때 긴급한 상황을 수습하기에도 급급해요. 8년 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생명’과 ‘안전’을 키워드로 얘기해왔지만, 여전히 사람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는 이런 세상이 되었다는 것에 절망스럽죠. 지금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민주화운동 세대들도 책임이 있어요. 이런 현실을 보고 있으면, 민주화운동은 성과도 있었지만 부족한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그중 한 명으로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12월 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4·16재단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는 12월 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4·16재단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대학생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섰다고 알고 있습니다.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동생 박래전은 1988년에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 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며 투신하였습니다. 그때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동생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왜곡되고 희석되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었던 거 같아요. 당시의 정치적 현실로는 광주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주범을 처벌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거죠. 이런 동생의 생각이 당시 운동 진영의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대다수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공동주최를 주장하면서 조국통일운동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죠. 반면에 동생은 올림픽을 반대하는 쪽이었어요. 올림픽의 반민중성을 비판하였죠. 국가가 올림픽을 위해 판자촌을 철거하고 노점상을 가혹하게 단속하는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던 거죠. 당시에는 아주 소수파였어요. 서둘러 가버린 동생의 유서에는 “민중의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 쓰여있었어요. 동생을 묻으면서 약속했어요.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네 몫까지 싸우겠다고요. 34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네요. 어쩌면 그런 세상을 이루지 못해서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동생 박래전 열사가 바랐던 ‘새 세상’을 위해 수십 년 인권운동가로 살아오신 거네요.

동생이 원했던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이라는 게 사실 상당히 추상적이죠. 어떤 거창한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쨌든 저는 유가족이 되었잖아요. 동생이 죽은 뒤에 너무 힘들었어요.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되는 거지요. 저보다 더 괴로워하는 동생의 학교 후배들 위로하면서 밥과 술을 사주는 게 전부였어요. 어떤 생산적인 운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그러다가 두 달 정도 지나고 8월부터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자연스레 드나들다가 정식 회원이 되었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가 와서 일 좀 하라고 계속 권하셔서 월례회 몇 번 가보다가 발을 들이게 된 거예요. 그땐 사무실도 없어서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빌려서 회의하곤 했는데, 솔직히 회의가 아니라 도떼기시장 분위기였어요. 목소리 큰 아버지들이 이기는 그런 어수선한 성격의 단체였어요. 죽은 래전이 형이라고 제 소개를 하면 어머니들이 반겨주시니까 동질감이 느껴지긴 했는데, 솔직히 몇 번 안 나갔어요. 그러다가 10월엔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진행된 의문사 유가족 농성에 합류하면서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거죠. 동생이 바랐던 새 세상에 대한 이해도 조금씩 바뀌면서 오늘까지 온 것 같아요. 인권침해당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게, 동생이 바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내 일이구나.

- 당시로는 의문사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막연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의문사당한 유가족들이 처음 모여서 진행한 농성이었어요. 그나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구속하라는 여론과 시위가 계속되는 분위기여서 농성 자체가 가능했던 거지요. 남아있는 증거라는 게 시체 사진밖에 없으니까, 진실 규명이 무척 어려웠어요. 가을에 시작한 농성이 한겨울까지 이어졌는데, 그때 기독교회관 3층 KNCC(현 NCCK,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 밖 회의실 공간에 자리를 잡았어요. 유가족들이 낮에는 의문사를 알리고 다니시다가 저녁엔 거기서 스티로폼 깔고 주무셨어요. 그분들과 함께하면서 연민의 정이 생겼어요. 이한열, 전태일, 박종철은 세상이 다 알지만, 의문사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운동권이었던 저도 몰랐으니까요. 처음엔 그분들의 기막힌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이걸 자료집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낮에는 집회장을 다니셔야 하니까 저녁때 한 분 한 분 뵙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들은 시체 부검 사진을 서슴없이 보여주셨는데,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어요. 감당이 안 되었지만, 외면할 수 있나요. 나밖에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서른 분 넘게 인터뷰하고, 끝나면 K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있던 타자기를 빌려서(?) 매일 기록으로 남겼어요. 밤에 사무실 문을 따거나 창문으로 들어가서 타자기 갖고 나와서 밤새도록 ‘독수리타법’으로 정리하고, 새벽에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제자리에 놓고.(웃음) 그렇게 두 달 정도 걸려 자료집을 만들었어요. 제목이 〈내 자식 죽인 놈들 제 명에 못 살리라!〉였어요. 살벌하죠.

유가협 의문사지회 자료집 표지
유가협 의문사지회 자료집 표지

- 자료를 정리하면서 죽음들과 계속 마주해야 하는 것이 힘겹지는 않았나요?

처음에는 끔찍했죠. 총에 맞은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면서, 유가족에게 질문하거나 법의학책을 가져와 참고하기도 했어요. 저보다는 의문사 유가족들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내 자식이 무슨 이유로 누구한테 죽은 것인지 모르는데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또 당시만 해도 열사의 가족들은 선민의식이 있었어요. 어디 집회에 가면 내빈 소개할 때 무조건 열사 유가족부터 소개하죠. 한 명이라도 빠지면 난리가 나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한 명 한 명 다 소개해야 할 정도로 부모님들이 민감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초창기에는 이한열, 박종철도 유가협 회원이 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스스로 몸을 던진 게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열사가 아니라는 입장이 워낙 강했으니까요. 그런 분위기에서 의문사 유가족들은 결이 더 다르다고 생각해서 회원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예요. 왜 의문사 유가족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느냐는 불만이 유가협 내에 거셌어요. 그때 큰 역할을 한 분이 이소선 어머니입니다.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라도 우리가 받아줘야 하지 않겠냐,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디를 가겠느냐 설득하셨죠. 저도 이소선 어머니 주장을 거들다가 아버지들한테 욕먹고 뺨 맞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그분들도 유가협 회원이 되었고, 의문사지회를 만들어서 활동했어요.

- 나중에는 사무국장을 하셨죠?

나이 스물여덟에 유가족이 되었고 다음 해 스물아홉에,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서 떠밀리듯 사무국장이 되었어요. 1989년에 유가협이 서회전을 해서 남은 수익금으로 종로구 창신동에 작은 한옥집을 마련했어요. 공간이 생기고 자유롭게 모일 수 있으니까 유가족들이 참 좋아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유가족 학교 열었던 것. 회의만 하지 말고 공부도 좀 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공부를 시작했죠. 처음엔 강사들을 섭외했는데, 너무 어려워하는 거예요. 유가족 기에 눌리기도 했고,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 앞에서 강의하려니까 수준을 맞추기가 어려웠던 거죠. 이럴 거면 우리가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저랑 간사들이 나서서 직접 가르쳤어요. 무모했지만 그게 더 성공적이었어요.

- 유가족들과는 주로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여쭤봤어요. 무슨 공부를 하고 싶냐고요. 근현대사 교육을 주로 했어요. 자기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려면 근현대사를 알아야 하잖아요. 돌아가신 열사들은 자기 의지대로 운동을 한 것이지만, 그 부모들은 자식 데모하는 거 말리던 분들이 대다수였으니까요. 어머니들이 이제 알게 되는 거예요. 군사독재 정권에서 자기 자식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이유가 더 또렷해지는 거죠. 나중에는 운동권 노래도 가르쳐달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때 이야기들을 많이 하세요. 그때가 너무 좋았다고요. 한겨울에 지각 한 번 없이 오셨어요. 지금처럼 교통이 좋을 때도 아닌데, 강원도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눈길을 뚫고 왔어요. 그만큼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고 진실에 목말라 있었던 거죠. 어머니들이 겪은 고통은 진짜 말로 할 수 없어요.

막내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사진: 박래군)
막내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사진: 박래군)

- 동생의 죽음을 견디는 부모님을 보는 일도 마음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 간 아들 둘이 데모한다고 하니까 부모님께는 아주 몹쓸 짓을 한 거죠. 경찰이 찾아오기도 하고, 유치장 들락날락하니까 얼마나 속상하셨겠어요. 거기다 막내가 그렇게 되고 나니까, 정말 힘들어하셨어요. 듣기로는 어머니가 병원에서 화상을 입고 누워있는 막내 손을 붙잡고 “정말 장하다! 어서 일어나라! 일어나서 엄마랑 같이 싸우자!”라고 했다고 해요. 후에 아버지는 술을 좀 많이 드셨고, 농사일에 과도하게 매달리면서 막내를 잊으려고 한 것 같아요. 그게 병이 돼서 8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목발을 짚으면서 사셨어요. 어머니는 속으로 삭이시는 분이죠. 말없이 계시다가 명절 때만 되면 우셨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해도 저한테는 동생 얘기를 가끔 하셔요. 꿈에라도 보면 좋겠다고. 근데 한 번도 안 나타난다고. 그러다가 수십 년 지나 2017년에 한 번 꿈에 나왔대요. 그때가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37주기 기념식에서 동생을 호명하기 며칠 전이었어요.

-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동생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제가 그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동생은 5·18 당시에 희생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공식석상에서 이름이 호명되거나 언급되는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해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다”고 하면서, 박관현(1982), 표정두(1987), 조성만(1988), 박래전(1988)을 언급한 거죠. 5·18 당시의 희생자만이 아니라 그 진실을 알리려고 목숨을 던진 이들까지 같이 호명해준 것인데, 사실 울컥했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유가족에게 이름이 호명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큰 의미가 있거든요. 누군가는 죽은 내 가족을 기억해준다는 거니까요. 불행하게도 몇몇 유명한 열사나 희생자 가족이 아니면, 사람들은 잘 기억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유가협 사무국장 할 때는 제 동생 이름이 호명될 기회가 있어도 다른 분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애썼던 거고요.

- 듣고 보니까 최근 10·29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 이름이나 영정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더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말이 안 되죠. 지금까지 분향소에 이름이 없었던 경우가 있었나요? 행정안전부에서는 처음에 희생자 명단이 없다고 하더니, 참사 직후 이미 유가족 명단까지 확보된 상태였다는 게 밝혀졌잖아요. 이 정부가 유가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보통 참사가 일어나면 합동 분향소가 있고, 합동 장례식을 했어요. 장례식장도 분산시켜서 유가족들이 서로 못 만나게 하려고 애를 썼지요. 하루빨리 사건을 덮으려는 의도로밖에 생각이 안 됩니다. 유가족들이 모이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아요.

- 모 언론의 희생자 명단 공개가 논쟁이 되었는데요.

섣불렀다고 봐요. 이 정부는 어떻게든 유가족을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런 때 분열 요소를 만들면 안 되거든요. 이 일을 신속하게 덮으려는 이들은 온갖 치밀한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데, 이쪽에서 그런 빌미를 주면 문제 해결이 더 힘들어져요. 유가족과 일을 안 해봐서, 마음만 급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유가족들한테 확인한 뒤 공개해도 늦지 않았어요. 서두르면 안 됩니다. 유가족이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리고 같이 가야지요.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들이 시민단체와 대화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어요. 그분들은 시민단체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거든요. 자기 가족의 죽음이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걸 바라는 유족은 없어요.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가야만 시민사회의 진정성이 전달되고 그래야 목적한 바를 이루는 데 힘을 모을 수 있어요. 시민사회는 유가족들이 모여서 스스로 논의할 수 있도록 돕고, 옆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게 바람직하겠죠. 지금은 정부의 대응이 너무 치졸해서, 오히려 그게 유가족들이 모이는 동력이 되고 있어요. (지난 12월 10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발족했다. ― 편집자 주)

- 참사가 벌어졌을 때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연대해줘야 할 텐데요. 저서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을 보면, 용산 참사 때 시민들의 침묵에 충격을 받았다고 쓰셨어요.

그때는 제가 알던 ‘시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이 부정되는 경험이었어요. 시민들을 잘 몰랐던 거지요. 그때 참사 현장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었잖아요. 다음 날 세상 사람들이 잔뜩 나와서 공권력에 항의해야 하는데 침묵하는 거예요. 2월 내내 추모대회를 하는데, 시민들이 안 모여요. 두 배, 세 배 불어나야 하는데 안 모여요. 경찰은 추모대회 신고도 받아주지 않아서 모든 추모행사는 불법이 되었어요. 망루에서 농성하던 철거민들에 대해서 당시 집권 여당이 ‘도심 테러범’ 프레임을 씌웠지요. 그런 프레임 때문이었는지 시민들이 침묵했어요. 그 결과는 정말 처참했습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강제 진압해도 침묵, 절차를 무시한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에도 침묵….

- 인권 기행 두 번째 책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의 ‘진주 형평사 현장’을 다룬 장에서 “차별받는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게 아니라 분열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고 안타까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하는 모습이죠. 어느 시대나 차별은 있었고,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어요. 형평사(衡平社)는 조선시대 차별받던 백정들이 스스로 모여서 해방운동을 벌였던 단체입니다. 이곳이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단체가 아닐까 싶어요. 당시 백정은 약자 중의 약자이지요. 같은 칠반천인(七般賤人)에 속하는 기생들도 백정들 앞에서는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창립행사 공연을 거절했다고 하니까요. 약자들 중에서도 소수자였던 거죠. 형평운동이 있기 전 1909년에 진주교회가 백정들과의 동석 예배를 시도했다가 교인들이 떠나는 일이 생깁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교인들을 설득해서 결국 84일 만에 화해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거든요. 짧은 기간 안에 놀라운 성과를 본 거예요. 교회 6층에 가면 이런 역사를 정리한 작은 역사실을 만들어 놓았어요. 1905년 교회를 세운 뒤 교육사업, 의료사업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남녀 차별이 심하던 때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세운 것은 큰일을 한 거죠. 제가 갔을 때는 안타깝게도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교회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설득했던 그 선교사들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사진: 인권재단 사람 홈페이지)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사진: 인권재단 사람 홈페이지)

- 모란공원 이소선 여사의 묘비 뒤에는 평소 자주 하셨다는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라는 말씀이 있더라고요. 인권 기행 첫 번째 책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에도 언급하셨죠. 그만큼 하나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안타까워하신 게 아닌가 해요.

1987년 6월 항쟁 끝나고, 대선도 분열해서 노태우가 당선된 뒤에 운동진영의 분열이 심각했어요. ‘사투’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파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웠어요. 그때는 사회구성체를 중심으로 운동의 전략을 두고 싸웠지요. 결국은 어떤 사회를 어떤 경로를 거쳐서 만들 거냐는 의견이 달랐던 정파들이 말 그대로 사투를 벌였지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지난 대선을 전후로 다양한 입장들이 경합을 벌였어요. 갈등으로 번지기도 하고요.

일단 사상 논쟁을 하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의 논쟁은 근본적인 시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소수는 사상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대다수는 현실적인 방법론에 대한 논쟁을 주로 하지요. 물론 방법론적인 시각 차이를 좁히고 중재하는 것도 쉽지 않죠. 세월호 때도 보면 “학살 정권 퇴진”을 외치는 쪽과 시민사회나 유가족의 입장은 차이가 있었거든요. 그 기조를 맞추는 데만도 무척 오래 걸리고 어려웠어요.

- 일부 논쟁들은 세대 간의 견해차가 매우 큰데, 오랫동안 인권운동 영역에 있으면서 느끼시는 게 있는지요?

사실 지금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1980년대에 현장에서 학생운동 했던 사람이 중심이잖아요. 과거의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업그레이드가 안 된 상태로 계속 활동하다 보니까 세대 간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봐요. 지속가능한 운동이 되려면 진짜 물갈이가 되어야 하거든요. 1970년대부터 깃발을 든 사람이 지금도 계속 깃발을 들어요.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현실을 보면 냉정하게 말해서 민주화운동은 실패라고 봐야죠. 전두환 정권과 싸워 이겼다는 경험과 확신이 오히려 업그레이드를 막고 있는 거죠. 그때 정권과 맞선 조직력을 수십 년 동안 유지하면서 지금의 지도층이 된 거잖아요. 이런 정당성이 젊은 세대들을 설득할 수 있나요? 적대 세력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집권해야 한다? 과거의 의미 있는 한 장면이 수십 년 영향력을 끼쳐서는 안 되죠.

- 과거에 함께 학생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국회에도 많이 진출해 계시죠?

가끔 이야기를 해보면 자기들이 현장을 엄청 잘 아는 줄 착각하고 있어요. 무슨 정보가 많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래봐야 여의도 현실이고 여의도에 갇힌 현장이죠. 진짜 노동자들은, 농민들은, 어민들은, 소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더라고요. 들으려는 자세도 너무 부족하고요. 지금도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착각이거든요. 그걸 깨줘야 하는데 어려워요. 참 답답해요.

- 사회운동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함께할 때 힘을 받는 측면도 있잖아요. 국회로 진출할 생각은 없으세요?

사회운동과 진보 정당 운동이 같이 가야 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우선권은 사회운동에 있다고 봐요. 사회운동이 커가면서 진보 정당에 도움을 줘야지, 민주당 잘된다고 우르르 빠져버리면 사회운동 측면에서는 마이너스잖아요. 다른 나라 사례를 봐도 그래요. 사회운동이 커가야 서로 잘될 수 있어요. 사회운동을 쭉 하다가 은퇴까지 하는 활동가 모델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저는 국회의원 되고 싶은 마음 없어요. 내가 국회의원보다 더 세기도 하고.(웃음)

- 후배들과 수평적 관계를 원하셨지만, 후배 활동가가 “래군”이라고 부를 때는 솔직히 기분이 나쁘셨다는 글을 봤어요.

아, 딸뻘인 청소년 활동가가 이름을 불러서 좀 당황스럽더라고요. 뭐라고 하면 꼰대가 되는 거니까.(웃음)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평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고 실험을 자주 하는데요. 장단점이 있어요. 그래도 저는 권위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20대 후배들이 이름만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선배로서 잘못을 인정하는 게 참 어렵다고 느껴요. 워낙 똑똑한 친구들이 많으니까 토론을 하다가도 내가 선배로서 몰랐다고 인정하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가르쳐달라고 이야기하게 되면서 좀 편해지긴 했는데 여전히 어려워요. 또 나이가 들고 지위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후배들에겐 어려운 사람이죠. 빨리 물러나야죠. 만 60세에 은퇴한다고 책에도 쓰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다녔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잡혀 4·16재단에 와있네요.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2014),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2022),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2020). ⓒ복음과상황 정민호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2014),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2022),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2020). ⓒ복음과상황 정민호

- 최근에 두 권의 인권 기행 책을 내셨는데, 특별히 한 곳을 꼽으신다면요?

동두천 미군 기지촌에 갔을 때가 제일 마음이 아팠어요. 여성 쪽 일은 여성운동이 하겠지, 떠밀어 놓았거든요. 지원과 연대가 별로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미군 기지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반성을 많이 했어요. 대한민국의 탄생 배경에는 학살이 너무 많아요. 그중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고요. 성폭행도 많이 당했어요. 그런데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였어요. 입을 막아버리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거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겐 국가가 그런 억압을 했죠. 국가 책임을 인정받는 데 65년이나 걸렸어요.(2022년 9월 30일 대법원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 편집자 주) 이런 국가의 정책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성차별적인 구조를 만든 건 아닐까요.

- 요즘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영역이나 운동은 무엇인가요?

4·16재단으로 오게 되면서 예전에 하던 일들은 거의 다 정리했어요. 다만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대표로서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에서 하는 일들이 좀 남았어요. 워낙 중요한 일이라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리는 개정안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를 보장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노동자 정의의 범위를 넓히고, 하청 사장이 아닌 원청 사장이 하청 노동자들과 단체교섭을 하게 하고, 손해배상을 제한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거죠. 우리 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려고 좀 색다르게 ‘퀴즈쇼’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많은 시민이 참여해서 노동에 대한 인식 자체를 개선해보자는 목적이죠. 우리가 ‘노동’이라고 할 때 ‘민주노총’ ‘운동권’ 뭐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그걸 넘어서야죠. 모든 노동자는 파업할 수 있어요. 국제인권법뿐만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 권리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파업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요. 설문조사 문항에도 ‘불법’자를 붙이니까 당연히 여론조사 결과는 파업에 대한 인식이 안 좋게 나오죠. 우리나라는 파업하면, 형사처벌도 받고 손해배상청구소송도 걸려요. 요즘 시민들이 사회복지에는 무척 관심이 많은데요. 노동운동이 활발할 때 불평등지수도 낮아지고 사회복지도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란봉투법을 알리는 퀴즈쇼를 진행한다. 텀블벅 사이트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 중이다.(<a data-cke-saved-href="http://link.tumblbug.com/UJVYjKEr7vb" href="http://link.tumblbug.com/UJVYjKEr7vb" target="_blank">http://link.tumblbug.com/UJVYjKEr7vb</a>)&nbsp;1월 19일은 제작발표회를 열고, 퀴즈쇼는 5월로 연기됐다.(2023.1.6 수정)<br>
노란봉투법을 알리는 퀴즈쇼를 진행한다. 텀블벅 사이트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 중이다.(http://link.tumblbug.com/UJVYjKEr7vb) 1월 19일은 제작발표회를 열고, 퀴즈쇼는 5월로 연기됐다.(2023.1.6 수정)

- ‘인권재단 사람’의 이사로서 인권센터 건립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죠?

이전에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던 인권센터 건물은 단독주택을 개조한 거라서 한계가 많았어요. 은평구 신사동에 새 부지를 마련해서 작은 인권단체들도 사용할 수 있고, 시급한 운동을 위한 임시 공간 등이 확보되는 건물(지상 4층·지하 1층)을 짓기 시작했어요. 지난 9월 29일에 ‘인권센터 첫 삽 뜨기 행사’를 했습니다. 거대 담론이 아닌 이슈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는 인권운동에 맞추면서도, 함께 공동의 투쟁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건축비가 많이 모자라요. 은행 대출도 받았지만, 수억 원 정도가 모자라요. 사실 저는 10억 원만 있으면 좋겠어요. 10억 원 있으면 급하고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 약자들끼리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희망적인 얘기를 듣고 싶네요.

늘 어려운 싸움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가 큰 버팀목이었어요. 용산 참사 때도 그랬고,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요. 지방에서 밤차 타고 올라와서 10만 원 봉투 두고 가신다니까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금 많이 지친 상태이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 모임이 전국에 수십 개가 넘어요. 이 사람들 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보통 시민이고요. 물론 저는 운동가로서 이런 모임들이 더 확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장기적인 운동의 모판인 것은 분명합니다. 재난과 참사는 앞으로 더 많아질 거예요. 기후위기에 따른 기상이변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죠. 가난한 사람부터 치명타를 입습니다. 힘을 모아야 해요.

진행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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