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호 A/S 커버스토리] 389호(2023년 4월)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 - 한계상황에서 복소수의 삶을 사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듬는 합집합의 구성적 공동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6)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일으킬 때 네가 가진 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만일 네가 그것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너를 파괴하리라.”(도마복음 70)

갑자기 재앙이 닥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항상 중첩되어있고, 재앙은 우리가 안전하고 행복할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다. 이 중첩은 때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종종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교회 역시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이 임재하시지만, 공동체의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파괴적인 어두움 역시 공존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도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의 한계상황, 세계의 무의식을 보았다. 자영업자들은 파산했고,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다. 패닉에 빠진 수백만의 젊은이들은 무리한 고위험 무형자산 투자로 더 큰 빚더미에 앉았고, 세대 및 젠더 갈등은 무척 심화되었으며, 정치 현장도 더 암울해졌다. 깊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성도를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고, 예배를 회복하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에는 큰 관심이 없다. 로메로 신부의 말대로, 성도 자체가 교회이며, 두 명만 모여도(마 18:20)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는(계 3:20) 신자들이 빛과 어두움의 대극을 조화시키며 깨달음을 통해 온전한 참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에 동참하고 온전한 참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갖는(벧후 1:4)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몸소 보여주신 맏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그를 따르는 형제가 되었다(롬 8:29). 이를 위해 교회는 무엇보다 성도의 삶의 허수와 그림자를 보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한 영혼이라도 이 거룩한 여정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예배와 교제, 선교, 구제에서 여전히 그림자를 부정하고, 신자들이 자기의 상한 심령을 안고 올 수 없는 곳으로 남아있다.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이미 재난 상태에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웠는데, 팬데믹이라는 재난이 이를 성찰할 수 있는 강제적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그림자를 살피는 계기로 삼지 못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대하 36:21, 새번역) 구약의 역사서는, 땅도 7년마다 어두움 속에서 안식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5백 년간 지키지 않았던 유다 땅에서, 하나님이 강제로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이주시켜, 밀린 70번의 안식년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다니엘도 노년이 되어 그 연수의 비밀을 알았고(렘 29:10-11, 단 9:2),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70년 후부터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안식은 창세기 저자의 창작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땅에도 그림자가 있고 안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도,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 백성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에 대한 통찰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

변화는 한계상황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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