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호 시대를 잇는 읽기] 수지 린필드, 《무정한 빛》(바다출판사, 2023)
자극적 이미지를 마주한 지식인이라면
TV를 보다가 흠칫 놀라 채널을 돌리게 하는 광고가 있다. 국제구호단체의 광고인데, 주로 아프리카의 열악한 주거 및 의료 환경과 병약한 아이들 모습을 보여주면서 후원을 부탁하는 영상이다. “그런데 왜 굳이 채널을 돌리기까지…”라고 물을 수 있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런 영상에 진지하게 혹은 적절하게 반응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과 같은 가볍고 즐거운 콘텐츠를 소비할 때의 심리는 주로 현실의 무게를 덜고 싶은 마음, 즉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갑자기 훅 들어온 현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하고 있는, 시급하고 중대한 누군가의 고통, 결함, 삶의 무게를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런 영상을 보면서 도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무감각해지는 나를 마주하기가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빈곤 포르노그래피’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빈곤’을 상업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특히 사진이나 영상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용어는 사진의 대상(피사체)이 된, 주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등장한 개념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사진가/포토 저널리스트)과 그 사진 이미지를 보는 사람(관객)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만, 사진 촬영과 관람의 대상이 된 사람(피사체)에 대해선 부주의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사진들은 주로 좋은 목적으로 촬영되거나 관람하기에, 더욱 부주의하기 쉬웠다.
‘빈곤’이란 용어가 붙는 것은 이런 현상이 주로 국제구호단체와 같은 인권 단체에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인데, 주로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사회적이고 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빈곤’은 누군가의 고통, 아픔, 상처이고, 들추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는 의미로 수치심 등으로 함께 해석될 수 있다.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드러내서 세상을 바꾸려는 카메라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감추고 싶은 속살을 까발린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빈곤’에 더하여 ‘포르노그래피’라는 단어가 합쳐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하여 하루에도 수많은 이미지에 노출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의식이다. 더구나 그 단어에서 유추하듯이 이런 시각적 자극은 재현 정도나 방식에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적이고,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수전 손택이 쓴 표현을 빌리자면, ‘견디기 힘든’(unbearable) 충격과 공포의 감정을 자아낸다. 손택은 초기 전쟁 사진을 예로 들면서, 전쟁의 참상을 가장 현실적이고 ‘날것 그대로’ 재현한다면 사람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선택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제로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으며 또다시 전쟁은 일어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아가 사람들이 이런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은 점차 둔화되거나 아예 마비될 것이라고 걱정했다.1) 수전 몰러와 같은 미디어 학자도 미디어가 사람들의 질병이나 빈곤을 대상화하여 마치 사고파는 상품처럼 파는 과정에서 재현 수위는 점차 높아져간다고 우려하기도 했다.2)
자극적인 이미지들은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고통과 폭력, 가난과 질병을 재현하며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사진들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그런 이미지들을 보고 ‘좋아요’ ‘힘내요’ ‘화나요’, 심지어 ‘최고에요’ 버튼을 누르거나, 그 이미지를 자신의 계정에 (몇 마디 말과 함께) 공유하여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심지어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만족하는 일들이 종종, 아니 자주 발생한다. 이쯤 되면, 이런 자극적인 이미지(와 부정적 효과)를 마주하는 지식인이라면 도대체 이런 사진의 효용 가치(쓸모)가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이런 사진은 좋아하지도 않고, 이런 사진을 찍는 것도 비관적이며, 가능한 한 이런 이미지는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이런 사진은 무가치한 것인가?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온 책
이런 경험이나 질문 앞에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사진의 부정적 인식이나 영향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런 사진들의 효용 가치나 의미에 대해선 시원하게 대답하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빈곤 포르노그래피가 문제인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빈번히, 쉽게 사용함에도, 여기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촬영법이 아니라, 보는 법에 대해서)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에 관한 비평서들은 주로 사진을 부정적으로 소개하거나 예술사진의 경우엔 알 수 없는 말들이 놓여있다. 반면 우리가 가장 자주 접하는 저널리즘 사진들은 전문가들이 아니고서는 좋은 사진의 기준이나 사진을 둘러싼 윤리적 주제들을 배울 길이 없었다. 수지 린필드의 《무정한 빛: 사진과 정치폭력》은 이런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책이다. 유학 시절 영문판으로 읽었던 책이었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2017년 초판을 샀고, 올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사진과 평화를 주제로 박사 학위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수전 손택의 영향이 컸다. 사진 매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손택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진이 가진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사진에 대한 글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내 입장은 사진이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을 볼 때 부정적 관점이 컸다. 서사나 맥락을 제공하지 않는 사진의 특성, 사진 재현의 왜곡 가능성, 왜곡된 사용과 해석의 가능성 등을 나열하며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가’ 하는 지적 오만함에 취해있기도 했다. 이런 입장의 글을 들고 지도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 교수님은 내가 써온 내용들을 찬찬히 읽으시고는 되물으셨다.
“그래요. 사진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선 잘 알겠어요. 그렇다면 사진은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죠?”
교수님의 질문 앞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손택과 같은 비평가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진이 다 그 비판의 대상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진이 폭력을 자극적으로 재현하거나, 우리의 공감 능력을 저하시키거나, 상업주의와 결탁해 지속된 자극을 사고파는 형편없는 세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진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자연스레 다음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가? 특별히 정치폭력 같은 고통과 폭력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좋은 사진의 기준과 사례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린필드의 이 책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수지 린필드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발레를 했으며 뉴욕시립발레단과도 여러 작품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곤 전공을 바꿔서 역사와 정치학, 그에 이어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제작을 공부했다. 그녀를 수식하는 표현은 언론인과 언론학자이다. 〈아메리칸 필름〉 편집장, 〈빌리지 보이스〉 부편집장, 〈워싱턴포스트〉에서는 미술 편집장을 맡았다. 1995년부터는 뉴욕대학교 언론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보도와 비평’이라는 대학원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이런 그녀의 이력이 눈에 띈 이유는 그녀의 글 속에 묻어나는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한 풍부한 지식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사진 저널리즘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언론학자로서뿐 아니라 예술가적 감수성과 문화비평가의 관점에서 매우 균형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론, 장소, 인물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제목처럼 사진과 정치폭력에 관한 것이다. 특별히 잔혹한 폭력의 순간이 담긴 사진을 찍는 것, 그리고 보는 행위는 올바른가에 관한 질문을 심도 있게 다룬다. 린필드는 손택을 포함한 주류 사진비평가들이 제기한 사진에 대한 의심스러운 태도와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응수한다. 사실 누구도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대해, 침착하고 대담하게 반박한다. 아니, 논증한다. 이 책의 1장 제목과 부제는 의미심장하다. 제목은 ‘사진비평의 짧은 역사’인데 이는 빅터 버긴을 떠올리게 한다. 부제인 ‘왜 사진비평가는 사진을 혐오하는가’는 그녀의 표현 중에서도 가장 위트 있고 대담하다. 그녀가 왜, 어떤 배경에서 책을 서술하는지 목적과 배경을 정확히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진비평과 저널리즘, 인권과 평화 감수성 사이에서 충분한 대화와 논증을 하고 있으며, 다양한 역사적 맥락과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여 사진이 정치폭력을 재현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구조는 이론, 장소, 인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이론을 다룬 1부에서는 사진비평가의 주요 논의(1장)와 저널리즘의 주요 논의(2장)를 소개하면서, 두 입장을 모두 이해하도록 초대한다. 2부는 장소를 중심으로 두 이론적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피는데,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시작해 중국 문화대혁명과 시에라리온 내전과 학살 현장을 다루고, 미국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사례까지 들여다본다.3) 그리고 마지막 3부(7-9장) 인물에서는 세 명의 사진기자 로퍼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를 소개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각각 낙관주의자, 파국주의자, 회의주의자라는 소개를 덧붙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치는 저자가 사진과 정치폭력에 관한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하여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진이 사진가에 의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린필드가 장소를 다루는 방식도 유사하다. 글에서 장소란 물리적으로도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동시에, 각 장소에서도 사진이 정치폭력을 다루는 방식과 대응이 양가적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대비한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 사진과 관련한 논의에는 그런 극심한 고통(죽음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도 되는가부터, 누가 찍은 사진인가와 촬영 의도, 그리고 사진이 재현하는 내용과 영향에 이르기까지 복잡 미묘한 사안들이 다뤄진다. 죽음의 공포를 기록하고 으스대기 위한 사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반면, 요에 J. 하이데커는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독일인으로 나치군에서 일했지만, 나치에 항거하는 의미로 사진 기록을 남기고 숨겨 보관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4)
‘무정한 빛’이 투영하는 더 무정한 현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Cruel Radiance’이다. 여기서 ‘radiance’란 스스로 빛을 내는 의미의 ‘light’가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방출되거나 반사되는 빛 혹은 열을 의미한다. 사진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일부를 반영한 결과이다. 따라서 사진의 잔혹성 혹은 잔혹한 이미지를 비판하는 일도 주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잔혹한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폭력과 같은 잔혹한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그것을 ‘빈곤 포르노’라고 비난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무한 복제와 편집이 자유로운 가운데 사진이 전하는 진실이란 더없이 가벼운 무언가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 모든 탓을 사진에 돌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린필드는 우리가 사진을 탓하는 동안 더 중요한 것, 즉 “정치폭력을 찍은 사진에 시민으로서 대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민은 “사진으로부터 유용한 것을 배우고 사진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고자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5)
빛이 있어서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다. 빛이 있기에 어둠도 존재한다. 빛이 그려낸 어둠을 보는 것이 두려워 눈을 감는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린필드는 그동안의 사진비평이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외면하게 하고, 냉담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다. 그녀는 “이런[잔혹한] 사진을 보지 말아야 한다거나,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알지 말아야 한다거나, 단념해야 한다거나, 눈을 가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죽을 운명에 처한 이 사람들의 사진을 본다고 해서 이들을 착취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망각한다고 해서 존중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무 쉽게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희생자들과 입에 발린 동일시를 하거나, 값싼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강조한다.6)
잔혹한 사진이 무정한 것이 아니다. 진짜 잔혹한 것은 그런 현실을 보고도 무감각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이다. 냉담한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잔혹한 사진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또는 그런 잔혹한 이미지를 사고파는 상업적 구조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누군가 그런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진이 재현하는 폭력적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 린필드는 “진짜 중요한 문제는 잔학행위를 찍은 이미지를 [보느냐 안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근본적 대답은 “사진이 아닌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기자가 정치폭력을 재현할 때 지켜야 할 “보여주는 윤리”(보도 윤리)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에겐 “보는 윤리”(시민 윤리)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설득한다.7)
마지막 장에서 린필드가 ‘회의주의자’로 소개하는 질 페레스는 사진(만)으로 세상을 바꾸거나 하는 그런 기대를 아예 버리지도 않은 채, 사진을 통해 자신과 현실의 관계를 더 깊어지도록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진이란 지속적인 과정이다. 순간적으로는 폭력이 몰아치는 부조리한 현실 같아도, 장기적 관점에선 사진과 인류와 사회와 현실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마치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사진은 살아가고 변화를 겪는 민주적 과정”이고 “텍스트의 절반이 독자 안에 있는 열린 기록”과 같다. 감상자인 우리에게도 “사진이 암시하는 바를 파고들어 더 깊은 통찰을 부여함으로써 사진을 완성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요청한다.
흔히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의 부재’를 그리며 평화를 상상하고 세워간다. 그렇다면 사진은 당장 보이지 않는 평화를 재현할 수 없겠지만, 잔혹한 현실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그것이 암시하는 바를 깨닫게 하고, 공감하게 하며, 나아가 연대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다정한 빛’으로 물들여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1)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이후). 이 책은 1977년 인쇄된 이후로 사진비평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글로서 많은 이에게 통찰을 제공했다. 그녀의 사진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공감에 대한 염려는 26년 후에 쓴 후속작 《타인의 고통》(이후)에서 다소 누그러졌다. 초기 그녀가 사진이 고통의 재현이나 인간 도덕 감정 및 실천에 부정적 영향만 끼친다고 우려하는 입장이었다면, 후에는 사진 매체가 가진 양가적 기능과 개인의 반응은 상이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2) Susan D. Moeleer, 《Compassion Fatigue: How the Media Sell Disease, Famine, War, and Death》(Routledge, 1999)
3)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라크 최대 정치범 수용소이다. 해당 사례는 2004년 미군이 바그다드 점령 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행해진 대규모 학대 사건을 말한다.
4) 린필드, 《무정한 빛》, 140-144쪽.
5) 위의 책, 34쪽.
6) 위의 책, 101쪽.
7) 위의 책, 103쪽.
김상덕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언론사진의 역할에 대한 공공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과 다양한 창조적 실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커피를 좋아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미술 작가인 아내(민정See)와 평범한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현재 학교 강의와 글쓰기, 방송 및 유튜버 등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