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호 커버스토리]
8월 24일의 체험
죽음과 폭력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연이은 흉기 난동과 칼부림 예고라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쳤다. 소셜미디어에는 칼부림 예고가 올라온 그 현장에 있었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글과 흉기 난동 오인 소동으로 영문도 모른 채 달리다가 다쳤다는 경험담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소총을 멘 경찰특공대와 장갑차를 도심에 배치하며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더욱 자극했다. 요새 사람들은 바깥을 다니지 말라, 집에만 있어라, 각자 조심하라는 이야기들을 인사처럼 한다.
8월 17일, 신림동 공원에서 한 여성이 출근길에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24일,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시민사회는 긴급 추모행동1)에 나섰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여했다. 긴급행동에 모인 이들은 “혼자라도, 숲길에도, 출근길에도, 집 앞에서, 집 안에서, 직장에서, 어디서든 괜찮은 세상을 만들자” “성평등과 존엄으로 인간답게 살자”고 외쳤다. ‘각자 조심해서’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평등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고 서로를 마주하며 다짐했다.
한편, 24일은 159명이 희생된 이태원 참사 300일을 맞는 날이면서, 22일부터 시작된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4대종교 삼보일배’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종교인들은 북소리에 맞춰 삼보일배하며 3일간 서울시청 분향소부터 광화문, 서부지방법원을 지나 마포대교를 건너 국회로 갔다. 이들은 유가족과 함께 비를 맞고 눈물을 흘리고 땀에 흠뻑 젖으며 특별법 제정을 위해 온몸으로 기도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목공소에서 제작한 손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는데, 이 손 십자가에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름이 각각 새겨있었다. 국회 앞에 도착한 이들은 추모대회를 열고 159명에 대한 죽음의 이유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고 외쳤다.
또 24일은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발생한 오염수를 바다에 투기한 날이다. 바다는 핵 쓰레기 투기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 앞에 인류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 방류를 시작한다는 속보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들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 기도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24일은 명동재개발2지구 세입자 생존권 사수를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의 천막농성이 100일을 맞은 날이었다. 명동2지구는 명동에서 유일한 재개발 미시행 구역이다. 명동성당 맞은편 골목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해온 세입자들이 ‘가게는 삶이다’라는 외침을 이어가고 있다. 삶을 지키고자 아홉 가게가 대책위를 만들어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재개발 시행사는 대화를 회피하며 명도소송과 강제집행 계고장으로 위협하고 있고, 재개발 사업인가권자인 중구청은 이를 방관하지만 공동대책위와 시민·사회단체는 이 시기를 끈질긴 연대,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연대로 함께 버티며 맞서고 있다. 24일에는 명동재개발2지구 현장 예배를 드리고,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은 중구청 문자민원 연대로 함께했다. 명동2지구에서 삶을 이어온 사장님들의 일상을 지키는 데 동참하는 염원을 담아 중구청에 민원 문자를 보냈다.
정해진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상이 어둡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고, 고립되고 단절되어있던 서로가 연결되는 체험을 했다.
모두가 어디서나 안전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평등해야 안전하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행진하며 외치는 모습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불교 의식으로 보이는 삼보일배에 개신교인들이 동참하며 함께 기도하는 장면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오염수 투기를 강행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향해, 국경을 넘어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마음으로 규탄하며 걷는 기도를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가게와 삶을 지키고자 천막농성을 하고 농성 100일을 맞이한 명동2지구 가게의 사장님들 곁에서 함께 농성장을 사수하는 일이, 사장님들의 삶을 지키고 더 이상 쫓겨나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항의 문자를 보내는 일이 기도가 맞는지 생각할 수 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기도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선 행동들은 충분한 기도이고, 한국교회에 필요한 기도다.
낯선 기도 생활
나는 주말에는 담임전도사로, 주중에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교회 전도사라는 직함보다 어쩌면 반성폭력 운동 활동가가 내 신앙을 표현하는 큰 부분이라 생각하며 산 지 꽤 되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며 뜨거운 마음을 안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신학을 배우며 기복적 신앙과 초월적 신에 대한 개념과 작별했다. 교회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도와 멀어졌다. 중언부언하며 시간을 보내는 기도가 어색해졌고, 통성기도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하며 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교회에서 그동안 배우고 해오던 기도와 내가 지향하는 신앙은 일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꽤 오랜 시간 생각했다.
이 신앙과 기도 사이의 괴리와 오해는 침묵기도를 배우고 훈련하며 해소되었다. 올해 초,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을 통해 침묵기도와 관상적 삶을 배우고 훈련하기 시작했다. 침묵기도 중 하나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배우고 실습할 때였다.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을 묵상하고 성서 구절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데, ‘안식일은 사람의 것’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익숙한 말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이 구절들을 품고 반복해서 기도하려니 그동안의 내 신앙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이 낯선 기도와 훈련 속에서 낯선 신앙생활로 접어들었다. 이 낯선 신앙의 여정을 다른 말로 ‘관상’(contemplation)이라 부른다.
라틴어 어원으로 cum(with)과 templum(temple, 거룩한 전·성전)인 관상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뜻을 함의한다. 신앙의 선배들은 관상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17세기 로렌스 수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발견하는 순수한 사랑의 응시”로, 16세기 스페인의 영성가 이냐시오 로욜라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20세기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은 “외형을 통해 보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관상을 표현한다.
한편 영성(spirituality)에서 영(spirit)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는 호흡과 영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영성은 그 어원처럼 호흡과 같은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호흡하며 살아간다. 관상적 영성은 모든 만물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열려있는 것,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우리 마음이 가장 깊이 추구하는 것은 그 전부가 사랑이신 그분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의식하면서 매 순간을 살아가며 모든 행동을 하고 모든 호흡을 하는 것이다.”2) 설레는 마음으로 이 낯선 신앙의 여정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는 기도하는 게 어색하거나 내 신학에 반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전도사라서 늘 찔리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며 관상적 삶을 살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
낯설게 보기
또 최근 낯선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여성은 목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운동(movement)’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교회의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이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이후,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들을 함께 본 사람들에겐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함께 넘었다는 감각이 있다. 성차별적인 교계의 벽 앞에서 방황하길 몇 년, 교계 변방에서 성평등한 교회, 성평등한 설교와 예배문을 만들며 서성거리다가 목사 안수를 받기로 각오하고, 목사 안수 과정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의 모든 순간순간이 낯설다. 처음 가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내가 속한 교단은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인턴 기간이라 할 수 있는 담임전도사 과정을 3년간 거쳐야 한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 3년이라는 시간이 교단과 교회, 가부장적 종교와 교리라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추고 적응시키기 위해 거치는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정상성을 인정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목회자 그룹에서는 낯선 존재가 되었다. 낯선 존재가 되어보니 교회가 얼마나 가부장적이고 기혼 남성 목회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피부로 느꼈다.
한국교회에는 ‘전도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농담이 있다. 담임전도사를 시작하고 난 뒤 같은 지역 교회 담임목사님들로부터 전도사를 알아봐달라는 요청을 받곤 했다. 구인 구직 게시 글을 개인 소셜미디어에 두 번 정도 올렸다. 흔하고 익숙한 글귀였다. 게시물을 본 지인들이 하나둘 어떤 교회인지, 목사님은 어떤 성향인지 물어보는데, 조금이라도 한국교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지원조차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올린 글이 어떤 이들에게는 배제의 경험일 수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부끄러워졌다. 내 친구들이 지원하지 못하는 교회의 전도사, 그런 교단에서 나는 왜 목사 안수를 받으려 할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내 정체성과 본모습, 성격, 고유성을 지켜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낯설게 되기
어느 청년활동가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쓴 ‘낯선 존재-되기’에 대한 글을 소개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맏딸로서 맏상제-되기를 행하며 조문객을 맞이하고 발인 때는 영정을 들고, 화장 후에는 유골함을 들고 맨 앞에 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존재론의 핵심으로 ‘존재(being)’나 ‘소유(having)’가 아니라 ‘되기(becoming)’를 말했다. 되기는 하나의 정해진 점이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계속적인 과정이자 중간지대를 의미한다. 나의 맏상제-되기 역시 여성이 맏상제가 되어가는 계속적인 사회문화적 변화의 과정이자 그 중간지대에 있다.3)
여성 목사-되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불가능한 종교적 교리이다. 나의 목사-되기 역시 여성이 목사가 되어가는 계속적인 사회문화적 변화의 과정이자 그 중간지대에 있다. 앞서 이야기한 낯선 기도와 신앙의 여정 역시 한국교회가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자 중간지대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낯선 존재가 될 때, 우리는 다른 존재, 다양한 존재, 다른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영성은 낯설게 보기의 영성, 낯설게 되기의 영성이 아닐까 한다. 거리에서 외치는 기도, 유가족과 함께 비를 맞는 기도, 재개발에 맞서 천막을 친 사장님들과 함께 천막을 지키는 기도, 성폭력 피해자의 옆에 서기 위해 성 인지 감수성을 배우고 익히는 기도가 필요하다. 또한 한국교회가 여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상성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게 열린 공간이 될 때, 낯설게 보기를 넘어 낯설게 되기로 나아갈 때, 교회는 더욱 본연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를 찾을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1)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 - 성평등해야 안전하다’
2) 제랄드 메이, 김동규 옮김, 《사랑의 각성》(IVP, 2006), 299쪽.
3) 김예선, ‘맏딸의 맏상제-되기’, 〈경향신문〉(2023.8.25.)
이은재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활동가이자 성도 없는 개척교회 담임전도사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올해 초 침묵기도를 배우며 관상적 삶에 대한 지향을 가지게 됐다. 새롭게 깨닫는 것에 큰 기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