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호 커버스토리] 〈비커밍 제인〉(2007)과 〈코미디 퀸〉(2022)
풍자의 자리 없는 풍자의 시대
최근 몇 년 사이 텔레비전과 미디어에서 보았던 가장 웃긴 장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단연 최고는 2021년 대선 경선에 나선 유력 후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기고 TV 토론에 등장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 “바이든 쪽팔려서”라고 한 발언을 두고 대통령실 대변인이 “날리면 쪽팔려서”였다고 해명하자, 각종 언론과 정치인들이 나서서 옹호하더니 급기야 수많은 명사들이 며칠 내내 이를 놓고 세상 진지하게 격론을 벌이던 일입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싶지만,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국가원수가 쪽팔린다는 표현을 쓴 것부터가 국민 모두에게 쪽팔리는 일인 것은 피할 수 없었지요. 그에 버금가는 일은 해외 순방에서 돌아온 대통령이 자기 부인과 악수를 했던 사건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대통령이 참모진과 악수한 후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서서 뒤따라오던 부인이 참모진을 거쳐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하죠. 그 모든 움직임에 주저함도 거리낌도 없어서 깜짝 놀라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주관적인 선택입니다만, 공교롭게도 코미디 ‘베스트 3’이 모두 국가 최고위층의 손과 입에서 나왔군요. 차마 포복절도하지는 못했어요. 차라리 이 에피소드들이 일련의 정치 풍자 코미디였다면 얼마나 참신하고 유쾌했을까 싶기는 합니다.
일찍이 〈텔레비전에서 동네 바보를 알아보는 방법〉(1992)이라는 에세이에서 움베르트 에코는 차이를 존중하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추구하는 문명 세계에서 전통적인 코미디, 즉 장애인과 하층민, 사회적인 약자와 열등하게 여겨지던 인종 등을 웃음의 소재로 한 코미디는 이제 금기가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무해한 ‘바보’를 조롱하는 희극인의 무대는 사라지고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를 즐기고 심지어 행복해하는 진짜 바보들이 등장해서 웃음을 주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어요. 대개 그들은 우리의 웃음이 그들의 지위나 권력을 깎아내릴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강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어서 우리는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고 미디어는 출연료 없는 쇼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에코는 너스레를 떱니다.
세태 풍자를 담은 에코의 이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스개이고 유머였죠. 이 에세이가 실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1999)의 서문에서 에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11쪽)
에코가 말하는 웃음은 비웃음을 뜻할 텐데요. 이 경우 웃음이란 우열 관계를 전제로 한 가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멸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소 짓궂은 쾌락입니다. 특별히 위의 세 에피소드들처럼 풍자의 의도가 전혀 없는 풍자적인 현실 풍경을 만날 때는 작지 않은 당혹감과 딜레마를 견뎌야 하죠. 싫든 좋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대표자를 조롱하게 되는 현실은 희극(comedy)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극(tragedy)이니까요. 예기치 않은 실소 말고, 청량한 웃음과 위로를 선물하기 위해 누군가 잘 구성해놓은 유머와 악의 없는 농담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웃으면서 화내기의 진수: 제인 오스틴의 풍자와 아이러니
경직되어있고 슬픔 많은 세상에 건강한 웃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네, 저는 지금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1800년경 증오나 쓰라림, 두려움도 없이 항의하거나 설교하지 않으면서 글을 쓴 한 여성이 있었어요”(《자기만의 방》(민음사, 2017), 104쪽)라고 제인 오스틴을 소개했는데요, 저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0여 년 전, 사려 깊은 문체로 PC를 선취하면서 여성들의 부당한 삶을 폭로한 한 여성이 있었어요.”
1775년 영국 햄프셔주에서 교구 목사의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어려서부터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와 아이러니를 멋지게 구사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희곡이나 소설을 자주 낭독하고 공연했던 제인은 일찍부터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기술을 터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등장인물 중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했지만 실제 인물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나 함부로 조롱돼서는 안 되었겠지요.
아이러니와 풍자의 대가로서 오스틴이 소재로 삼았던 것은 주로 18-19세기 여성들이 경험한 결혼 제도와 상속권 같은 민감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오만과 편견》의 도입부는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으며 ‘우리’로 보듬어 안으면서도 할 말은 해내고야 마는 오스틴식 아이러니의 진수입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오만과 편견》(민음사, 2015), 9쪽)
첫 번째 아이러니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가 반어적 표현이라는 데 있다면, 제가 보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즉,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가 바로 그 재산(돈) 취급을 받게 된다는 기술입니다. 오스틴은 여기서 남성 독자들에게 웃는 낯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성 여러분, 당신들이 지닌 재산과 지위가 당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좋아요, 그런데 그 재산을 앞세워 신붓감을 구하고 싶으신가요? 딸 가진 사람들과 여성들이 당신의 성품이나 인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돈만 보고 몰려들 텐데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당신은 혹시 당신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 아닌가요?” 요컨대 이는 아이러니의 수사법을 통해 당대 결혼 제도를 풍자하되 작가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독자의 호응에 의해 완성되도록 섬세하게 고안된 문장입니다.
이와 같은 오스틴의 아이러니는 질문을 던져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보도록 하는 대화법에서 차용한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연상하게 합니다. 문학비평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이런 아이러니는 그 누구도 기만하지 않거나, 이를 기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멋진 장난질에 즐거워하게 만든다고 말했어요. 따라서 여기에는 온갖 장난과 온갖 진지함이 공존하고, 모든 것이 솔직하게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심오하게 위장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유머’입니다. 헨리 필딩 등을 필두로 당대에 막 시작된 소설의 풍자가 노골적인 언어를 사용해 천박하다는 비난을 받고 점잖은 독자들에게 자주 기피되었던 데 반해 오스틴의 풍자와 아이러니는 품위와 예의를 갖춘 우아함을 자랑합니다.
〈비커밍 제인〉의 영리한 패러디
줄리언 재롤드의 영화 〈비커밍 제인〉은 오스틴의 아이러니를 패러디 기법으로 잘 재현한 수작입니다. 〈비커밍 제인〉은 톰 르프로이라는 법률가 지망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고, 《오만과 편견》의 초고인 〈첫인상〉을 집필하던 스무 살 무렵 제인 오스틴을 다룬 작품인데요, 특히 결말 부분의 해석과 각색을 저는 좋아합니다. 오스틴의 모든 작품은 결혼 또는 커플의 결합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오스틴 자신은 비혼으로 생을 마감했지요. 이는 제인 오스틴의 삶을 다룬 영화가 오스틴 소설식의 ‘해피 엔딩’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영리한 영화 〈비커밍 제인〉은 처음부터 줄곧 제인의 사촌 언니인 엘리자를 제인과 나란히 등장시킵니다. 엘리자는 프랑스의 백작 부인이었으나 대혁명으로 남편을 잃은 부유한 여성이었어요. 그리고 열 살 연하인 오스틴의 오빠 헨리와 재혼을 했죠. 이 언니는 오스틴의 작품에서 여러 모양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서간체소설 《레이디 수잔》에서 얄밉지만 차마 미워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수잔의 모델이 됩니다.
제인과 톰의 결혼식을 보여줄 수 없었던 영화는 헨리와 엘리자의 결혼식으로 엔딩을 삼았는데요,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탁월한 패러디입니다. 첫째는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오스틴 소설의 결말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둘째는, 소설 《오만과 편견》에 대한 패러디이면서 문자언어로 기술된 오스틴의 아이러니를 영상 언어로 창조적으로 번역해낸 결과입니다. 직전 장면의 끝에서 영화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첫인상(오만과 편견)〉의 도입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상은 엘리자와 헨리의 새 출발을 보여주죠. 앞서 인용한 문장 그대로 사운드는 흐르지만, 영상은 “재산깨나 있는 (젊은) 남자”가 아니라 “재산깨나 있는 (나이 든) 여자”가 되어 사운드를 배반하게 됩니다.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영상에서는 “남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되고요. 그렇게 해서 《오만과 편견》의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는 〈비커밍 제인〉에서 재산깨나 있는 여자에게 장가드는 젊고 잘생긴 남자 헨리를 통해 전복되었습니다. 익숙한 것의 전복은 명백하게 웃음의 코드가 되지요.
테드 코언은 《농담 따먹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소, 2001)에서 “같은 것을 보고 함께 웃는다면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며 어떤 것에 대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웃는다면 그 자체로 놀랍고 소중한 일이다”(68쪽)라고 말했는데요,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잘 각색된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기분 좋게 웃는다면, 우리는 동시대 관객들은 물론이고 19세기 여성 작가 오스틴과도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은 특별한 유대를 경험하고 있는 거겠지요.
억압된 눈물에 바치는 웃음: 〈코미디 퀸〉
산나 렌켄 감독의 스웨덴 영화 〈코미디 퀸〉은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소녀의 이야기예요. 열세 살 생일을 앞둔 사샤(시그리드 욘손)는 최근에 엄마를 잃었습니다. 사샤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네 가지 결심을 했어요. 첫째, 헤어 커트를 한다. 사샤의 탐스러운 금발 머리는 엄마를 꼭 닮았거든요. 둘째, 책을 읽지 않는다. 늘 아프고 우울했던 엄마가 독서광이었기 때문이지요. 셋째, 생명체를 키우지 않는다. 사샤는 엄마가 병을 앓는 중에 자신을 양육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것도 돌보지 않겠다고 결심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미디 퀸이 된다! 이것은 엄마를 잃은 후 도무지 웃을 줄 모르는 아빠를 위한 일이었어요. 사샤는 노트에 농담과 재담을 기록하며 매일 코미디를 연습합니다.
하지만 사샤의 계획은 자꾸 꼬여만 가는데요,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샤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규정하고 정신과에 데려갑니다. 네가 그토록 원하지 않았느냐며, 할머니와 아빠가 함께 준비한 생일 선물은 하필 젖먹이 강아지였고요. 학교에서 모처럼 마음이 맞는 친구 욘(아담 다호)을 만났지만 사샤의 유머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하게 될 뿐 아니라 단짝 친구 마르타(엘렌 타우레)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입혀 관계가 소원해지게 됩니다. 급기야 동급생과의 시비 끝에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하니, 사샤는 그야말로 사고무친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점점 우울해지지요. 이 와중에 유일한 희망은 삼촌네 바에서 최연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무대에 서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거였어요.
사샤의 코미디와 관련하여, 사샤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자신의 공연 시간 중 3분을 떼어준 유명 코미디언 안젤라의 조언이 마음에 남습니다. 삶에서 가장 부정적인 것들을 꺼내놓아야 한다고 안젤라는 사샤에게 말했어요. 안젤라의 경우처럼 겨드랑이의 폭포수 같은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고 그보다 심각한 슬픔과 우울일 수 있겠지요. 사샤에게 그것은 죽음에 대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부조리의 웃음에 대해 말하면서 테드 코언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하거나 모든 것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했어요. 어떤 것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단순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포함된다고 말이지요. 그러니 사샤가 엄마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떤 형태로든 발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사샤와 아빠는 함께 울고 웃고 노래할 날이 아직 많으니까요.
〈코미디 퀸〉은 갖은 애를 써서 눈물을 참아본 적이 있으시다면, 마구 웃다가 눈물이 났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려본 경험이 혹시 있으시다면, 당장 공동체적인 위로와 웃음을 경험할 수 있을 작품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런 영화는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보아야 가장 웃기고 또 감동적이지요. 2022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정곰상을, 뮌헨국제영화제에서 시네킨들상을 수상한 〈코미디 퀸〉은 국내 미개봉작이지만 마침 제5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1)
망각 대신 웃음을, 홀로 비웃음 대신 함께 웃음을 선택하기
밀란 쿤데라의 저서 《웃음과 망각의 책》이 있지요. 왜 ‘웃음’이고 왜 ‘망각’일까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쿤데라가 이 책에서 저와 같은 생각으로 웃음과 망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만, 책의 제목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저에게 웃음과 망각이란, 저항할 수조차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이나 기억에 대해 무력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기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장되거나 위장된 웃음으로 한바탕 웃어내고 말거나 마음껏 비웃어주기, 혹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하기 같은 것 말이지요. 제인 오스틴에게 그 거대한 힘이란 여성에게 부당하게 강요된 19세기의 예법과 결혼, 상속의 법 같은 것들이었다면 사샤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충격과 공포였을 겁니다. 그들은 모두 아무도 배척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무해한 웃음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이웃들을 보듬었어요. 잊어버리고 순응하거나 상대적인 우월감을 앞세워 비꼬지 않고, 또는 거대한 힘에 압도당하지도 않았고요. 우리도 혹시 구조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웃음의 코드를 서로 알아보고 공유할 수 있다면, 코미디보다 더 코미디 같은 이 시절을 함께 웃으며, 휘청휘청 즐겁게 건너가볼 수 있지 않을까요.
1) 11월 18일(토) 오후 1시 20분,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단 1회 상영됩니다. (www.cfffe.org)
최은
영화평론가. 모기영에서 부집행위원장과 수석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다. 나의 쓸모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그래도 세상 어느 구석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자주 줄타기를 한다. 지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 함께 지은 책으로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1》, 《영화와 사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