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호 로잔 1974-2024]

로잔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4차 로잔대회’가 2024년 9월 한국에서 열립니다. 4차 로잔대회를 전후하여 로잔운동을 둘러싸고 교차하는 관점과 평가, 의의와 유산을 짚어보는 글을 게재합니다. ‘다시 로잔을 생각하다’(이강일, 7월), ‘‘화해의 나라’를 가리키는 로잔운동’(이강일, 8월), ‘로잔과 함께 가는 여정, 그리고 그 너머’(김회권, 11월)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번 글은 필자가 지난 10월 31일에 열린 ‘로잔너머 심포지엄 3차 -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에서 발제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심포지엄 발제문은 기윤실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대학과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국회, 환경단체, 노동조합 법률원에서 변호사로 일해오고 있다. 노동과 환경, 정당정치, 복지국가, 불평등 등의 의제에 관심이 많고 노동운동과 노동안전보건운동에 활동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여성운동과 기후정의운동에 애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어린 시절 교회 공동체를 배경으로 자라 캠퍼스 선교단체 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현재도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가정교회로 모이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 한 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나 내게 교회는 오랜 고민이자 숙제다.

이 지면에 필요한 범위에서 간략히 나를 소개한다면 이 정도겠다. 그런데 위 문단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레 연결되어 읽히는가? 같은 사람에 대한 소개로 보이는가? 실제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과 밖 가릴 것 없이 “(아직도) 교회를 다니냐”며 낯설고 신기해하는 질문들을 자주 받아왔다. 평소에 신경 쓰지 않던 반응을 다시 떠올린 것은, 내가 로잔너머 심포지엄 발제자로 초대된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한국교회로 통칭되는 공동체를 막 벗어나지는 않고 자신의 신앙을 여전히 고백하는 사람. 쉽게 말해 독특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로잔 정신이 말하는 ‘총체적 복음’의 사례 내지 시도로 소개하기에 적절한 경우일까. 대학 시절 출석하던 교회에서 로잔언약 내용을 설교를 통해 배워 알고 있었고, 로잔언약과 마닐라선언, 케이프타운서약이 모두 등장하는 교리 신조를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하는 교회에 현재 출석하고 있다. 이런 모든 앎과 경험은 분명 나름 유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배운 ‘복음의 총체성’을 실천하고자 어떠한 삶의 경로를 거쳐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로잔 정신에 사후적으로 공감했을 뿐 이를 의식하거나 반영하며 살았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어린 시절 매우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해외선교를 강조하며 선교의 도구로서 의대 진학을 강하게 권면했고, 대학 시절 몸담았던 캠퍼스 선교단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교사로 헌신케 하는 데 집중했을 뿐 사회참여나 사회선교에 대해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정치학을 공부하며 접한 르완다 학살과 같은 분쟁 지역 문제, 제3세계 국가들에서의 빈곤과 착취, 전 세계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 등에 대한 깊은 고민, 당시 ‘장로’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범죄로 인해 위협받는 민주주의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한탄과 기도가 공명될 공간이 없었다. 신우회 등의 모임도 꾸준히 시도했지만, 성적과 시험 합격 같은 사적 성취를 여럿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 제목으로 내놓는 데는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 시절 내가 공동체라고 부르던 교회나 선교단체의 지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함께 모여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기쁨을 배웠지만, 아쉽게도 어디에서도 세상 한복판에서 같은 뜻을 품는 이, 동지(同志)를 만나지는 못했다. 어떻게 복음이 나와 이웃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지,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1) 나의 노동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조금이나마 실천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이 가득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던 이들과 그것을 나눌 수는 없었다.

나는 교회 밖에서 나로서 살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교회 밖에서 나로서 살아왔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최근에서야 복음주의 운동 등 교계의 여러, 그러나 작은, 결코 다수는 아닌 활동들을 알고 반가워했을 뿐2), 내가 주로 고민을 주고받으며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은 교회 밖에 있다. 지난 2차 심포지엄 발제를 하신 백소영 교수께서 본인이 ‘복음주의 진영의 딸’3)이 아니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나는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랐지만 복음주의 진영은커녕 교회의 딸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공공성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현실에 눈을 뜨고 그 관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와 나의 예배를 이루는 내용은 교회가 흔히 ‘세상’이라 부르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책, ‘믿지 않는 이들’로 가득한 크고 작은 공동체, 투쟁하는 이들로부터 배운 사랑과 연대의 경험, 공부하는 이들이 쌓아 올린 지적 성취에 빚진 것이다. 그 덕분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땅의 곳곳에 반영되도록 애쓰는 길 위에 서고 싶다고 감히 꿈꿀 수 있었다.4)

이는 하나님 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며 써 내려간 서사로서, 교회와는 대부분 무관했다. 앞서 말했듯이 난 교회를 배경으로 자랐지만, 정작 교회는 날 키우지 않았다. 다만 내 모든 시간과 공간을 성령께서 인도하셨음은 분명히 고백할 수 있다. 보수적인 신앙 교육과 협소한 신앙 훈련을 받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이어졌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님의 신비가 존재했음을 안다.5) 캠퍼스 시절 거의 매일 모여 열방을 향해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던 기도는, 오늘날 현장에서의 생생한 부르짖음이 되었다. 이제 내게 열방은 막연한 저 너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아닌 세상을 통해 날 키우고 이끄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앙과 삶은 불화하지 않았고 내가 믿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공부, 일, 활동으로 연결되었다(물론 그 과정에는 고민과 버팀으로 지난한 시간이 있었다). ‘복음의 총체성’ ‘하나님의 선교’ 등의 개념은 잘 알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자연스럽게 복음을 총체적으로 인지하여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구하며 예배해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총체적이지 않은 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재판을 준비하며 조용히 책상에 앉아 밤을 새워 법원에 제출할 서면을 써 내려가는 시간을 통해 어느 순간보다 간절하고 실제적으로 이웃들의 삶을 헤아린다. 누군가를 저주하기도 하고, 주께 탄원하기도 한다. 여러 일터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분투하며, 때로는 사건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온갖 책과 논문과 보고서를 뒤지며 근거와 논리를 찾아 헤매는 순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진실된 예배이자 선교의 시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지지받는 안정감 속에서 노동의 과정과 열매를 드리고 있다.

이렇게만 고백하면 꽤 단단하고 의연한 사람 같지만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농촌이주여성의 노동을 추적하며, 재벌 기업에서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까지 동원되어 온 가족이 사찰을 당했던 국가폭력 피해자들 이야기를 들으며, 대형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산재가 은폐되고 장시간·야간 노동이 헐값으로 후려쳐지는 현실을 보며, 심지어 법원 판결조차 소용없는 뻔뻔한 기업들과 철옹성 같은 공권력 앞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이들을 계속 마주하며, 자주 분노하고 한탄한다. 우리의 노동과 애씀이 한없이 헛되게 느껴질 때면 온종일 찬양을 들으며 침잠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게다가 수고하고 애쓴 소송에서 패소해 내 이웃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정당한 대우를 쟁취하지 못할 때, 법원이 일터에서 죽은 이들을 외면하고 ‘목숨값’을 한없이 가벼이 볼 때처럼 내 마음과 같지 않은 ‘때’를 만나면 심히 낙심한다. 그럼에도 나와 다르게, 끝내 좌절하지 않고 넘어진 사람들을 돌보고 다음을 도모하는 멋진 동지들을 보며, 일터에서 공동체를 꾸리고 이윤이 아닌 일하는 사람의 몸과 삶을 기준으로 변화를 일구는 빛나는 이들 덕에, 마음을 추스르고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 주님이 허락하신 말씀들을 떠올리며,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한 자락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는 때때로 실패해도 그 중심에 자리한 사랑을 보시고 이를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 끝내 승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보고 듣고 곁에 서는 감각의 중요성

“다혜, 넌 머리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가깝구나.”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로스쿨 동기 언니가 내가 노동조합 법률원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사실 법률원은 노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곳은 아니고 법무법인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노동자의 시선에서 법을 해석하며 소송·자문·연구·교육 등을 하는 곳이고, 변호사가 받는 급여 등 근로조건에서 통상적인 경우와 꽤 큰 차이가 난다. 동기 언니의 말은, 그동안 어디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선택해오는 모든 과정마다 많이도 들었던 종류의 반응이다. “집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 동기 언니가 한 말이 곧 그 의미일 텐데, “이상적이다. 낭만이 있네” 등의 말을 듣기도 했다. 드물지만 “순진하다”는 식의 날 선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매우 독립적으로 내 삶을 살아왔고, 밥벌이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이상이나 낭만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 중 하나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자리를 선택할 때마다 따라오는 시선과 질문들은,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어떤 곳인지,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선택했는지, 나의 ‘위치성’을 환기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며 전공을 선택할 때와 변호사로서 일터를 정하는 모든 과정마다 내가 고른 답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부모님을 비롯해 내 주변의 ‘교회 다니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공공성과 운동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몫을 두고 지금까지 내가 찾은 답이었지만 그들에게 이는 낯설고 심지어 불온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당황은 아니지만, (좋은 의미로) 신기해하는 시선이 많았는데, 기독교인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로펌에 가지 않고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묻는 구체적인 질문도 있었다. 내게는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사안에서 누구 편에 서서 무슨 말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것을 생각하며 매 순간 선택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적어도 복음의 총체성을 이해한다고, 사회선교나 사회참여를 말한다는 사람들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 그리스도인이 공공성,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물을 것이 아니라, 왜 그리스도인이 직업과 일터를 선택할 때 이윤 추구가 기본값이 되었는지, 우리의 노동하는 삶 전체가 사역 영역이라면서 다른 길을 두고 고민하는 이들이 왜 이토록 적은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각자의 선택 자체를 비난하거나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자리, 즉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가 각자의 신앙과 어떻게 함께 연결되어 해석되는지를 묻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안에 다른 삶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빈약한 것이 이상하지 않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곳곳의 깨어짐과 숱한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곁에 서는 감각이 필요하다. ‘깨지고 상한 세상’이라는 것이 나와 이웃이 당면한 현실로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고개 돌리고 거리를 두는 핑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전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더 큰 불평등을 양산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6)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화답이 침묵, 무관심, 중립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에 공모하는 것은 아닌지 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오늘도 7명 이상의 노동자는 일터로 출근했다가 생을 잃었을 것인데7), 우리의 자리가 시장의 논리로 다져진 매끈하고 평온한 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리에 눈떴다고 하는 이들이 세상이 깨지고 상한 곳임을 인지했다면서도 교회에서 모이는 것 외에 각자 일상은 ‘깨지고 상한’ 그 질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혹은 그에 복무하며 산다? 우리의 ‘복음’이 어쩌다 그렇게 귀결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로잔너머를 말하려면

1974년 로잔언약이 선포되고 약 50년이 지났다. 로잔운동의 의의는 단순히 각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한곳에 모여 모아내는 약속의 내용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과연 한국교회가 로잔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내년 한국에서 열릴 4차 대회에서 로잔이 후퇴하지 않을지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신앙, 다시 말해 우리 삶이 현재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정직하게 직면하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86형 복음주의 세대’의 공동 목표가 독재와 재벌 반대였다고 하면서8), 여전히 끝나지 않은 국가 폭력과 이미 폐허가 된 일터의 아우성에는 왜 이토록 조용한지 성찰해야 한다. 로잔이 말하는 총체성이 충분히 총체적인지, 50년 전 언약과 그 이후의 이해가 여전히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지는 않는지, 그때가 아닌 지금 우리의 진심과 정성은 어디를 향하는지 돌아볼 때다. 누군가에게는 로잔이 신앙과 삶의 괴리에 대한 반가운 해답이었겠지만, 솔직히 말해 ‘세상의 딸’인 나의 자리, 나의 동지들의 자리가 로잔에 충분히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로잔너머’를 말하기 위해서는 로잔을 붙들기보다 잠시 접어두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익숙한, 소위 믿음의 공동체에 갇히거나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서(도) 동지와 공동체 찾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눈과 손·발이 교회나 선교단체, 복음주의 진영이나 심지어 로잔을 말하는 이들 정도에도 한정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다. 각자의 몫과 과정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가 하나님이 세상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길 구하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언어, 이중 언어를 쓰는 것을 널리 상상해봤으면 좋겠다. 세상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을 함께 목격하고 예배하는 동지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 주

*본 글의 제목은 벨 훅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문학동네, 2023)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왔다. 심포지엄을 위해 모인 제한된 범위의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개인적 고백임을 전제로 시작했던 이야기지만, 어쩌다 보니 판이 커져버렸다. 첫 단추를 그렇게 꿰어버린 이상 아무리 고쳐 쓴다고 해도 개인 서사를 빼기는 어려웠다. (망했다!)

1) 시편 127:1
2) 몇 년 전부터 〈복음과상황〉을 구독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교계 내 여러 활동을 인지하게 되었고, 여러 투쟁 현장에서 스치듯 마주친 소수의 예배가 누군가의 활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서한국 대회는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올해에서야 처음 혼자 참여해 보았는데, ‘활동가’라는 용어를 그쪽(?)에서도 쓴다는 사실과 스스로 활동가라 칭하든 직업인이라 여기든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이 이만큼이나마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무척 반가웠다.
3) 로잔너머 2차 심포지엄(2023. 8. 29.) 발제문 8쪽(백소영,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넘어야 하나, 한 여성 신학·윤리학자의 제언’)
4) 〈복음과상황〉 2023년 6월호에 실린 내 글(신학하는 마음, 다행의 마음)의 일부를 수정하여 가져왔다.
5)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내가 경험한 신앙 교육과 훈련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의미 없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분명 다른 교회, 다른 캠퍼스 선교단체를 선택할 것이다.
6) 윌 스트런지·카일 루이스, 《오버타임》(시프, 2021), 12-13쪽.
7) 고용노동부, 2022년 산업재해 현황
8) 로잔너머 2차 심포지엄 발제문 5쪽(구교형, ‘국제 로잔 운동과 한국 사회선교운동’), 〈복음과상황〉 2021년 1월호에 실린 글(이강일, ‘사이더도 바꾼 복음주의, 우리는 어떻게 할까’)에서도 ‘우리 때’ 복음주의 운동을 동일한 취지로 평가한다.


박다혜
변호사. 건강한 노동을 하며 널리 이웃과 함께 존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꿈꾼다. 여러 일터를 거쳐 성북구 문턱 즈음에 스스로 꾸린 첫 사무실이자 작업실을 준비하고 있다. 소박한 공간에 많은 삶이 오가며, 작지만 넓은 세계를 이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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