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호 뚜벅이 책방 탐방]
“죄송합니다. 갑자기 장례가 잡혀서요. 인터뷰를 미룰 수 있을까요?”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복음과상황 남양주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춘수 목사였다. 이 목사는 올해로 5년 차인 장례지도사다. 이날 늦은 오후에 만난 그는 흐트러짐 없는 머리에 로만 칼라를 하고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의 휴대전화가 자주 울렸다.
24시간 운영되는 동네 주민들의 ‘서재’
남양주시 별내동,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오면 마주하는 주택가에 오롯이서재가 있다. 통유리창 너머로 책과 식물들이 보였고, 층고가 높은 내부 따뜻한 조명 아래 우드톤 가구들이 자리를 잡고,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었다. 이곳은 이춘수 목사와 그의 배우자 안현미 대표가 운영하는 책방이다.
카운터에 다가서자 “이용권 구입하세요?” 부드럽게 물어온 이는 이곳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안 대표였다. 오롯이서재에선 책뿐 아니라 좌석 이용권을 살 수 있는데, 가격은 시간당 3천 원, 하루 1만 5천 원이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24시간 무인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안 대표가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이 목사가 장례를 지도하면서 책방을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서가에선 보라색 스티커가 붙은 ‘샘플북’들이 눈에 띄었다. 스티커는 2천 원에 판매하는데, 새 책에 붙이면 이용권을 구입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 “정가로 책을 구입하시면서 샘플북으로 만들어달라고 하시는 분도 있어요. 너무 좋은 책이라고, 여기 오는 분들과 같이 읽고 싶다고요. 어떻게 보면 기부인 셈이죠.”
안 대표는 책 유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동네책방이 아닌 ‘공유 서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평수가 작은 주거용 건물이 밀집한 동네에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책도 읽지만 공부나 작업도 하시고 뜨개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다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서재엔 책도 있지만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공간이잖아요. 만남의 매개로서 책을 갖다놓은 거죠.” 신도시지만 별내동은 책과 관련된 문화 인프라가 별로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이를 키우는데 전 운전도 못하거든요. 그래서 활동 반경이 굉장히 좁은데 이 동네에서 문화적 욕구를 채우고 싶었죠.”
처음 창업하면서 꿈꾼 것은 동네 사랑방. 안 대표는 현실적인 이유로 지칠 때도 있지만, 시작하길 잘했다고 느낀다. “여러 활동을 열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거든요. 우리 사회는 결혼이나 육아처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주변엔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행복한 분들이 있다는 걸 보게 돼요.”
다양한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안 대표는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처음엔 그가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동네 주민들이 자기 콘텐츠를 직접 가지고 왔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가지씩은 갖고 계세요. 이웃들과 나눌 만한 공간이 없을 뿐이죠. 그런데 이곳이 생긴 거예요. 어떤 분이 아이디어를 내시면 저희는 오롯이서재 맥락에 맞게 프로그램으로 만들면서 공동 기획을 해요.”
지금까지 독서모임, 원데이 클래스, 음악회, 전시회 등을 열었고, 번역가이자 인권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난민 관련 세미나, 프랑스어 그림책 수업을 진행했다. 이주민인 이웃을 통해 스페인어 강좌를 열기도 했다. 동네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오롯이서재를 통해 경제활동도 하고 재능을 나누면 좋겠다는 것이 안 대표의 바람.
고요하게,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매장 내 비치된 책은 문학과 에세이, 인문 도서가 주를 이뤘는데, 안현미 대표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그가 고른 책은 ‘리얼리티 간병 그래픽 노블’ 《많이 좋아졌네요》. “요즘 돌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아이도 키우지만 부모님이나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때가 오잖아요. 제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미리미리 돌봄이나 죽음, 장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부모님은 요양원에 외할머니를 8년간 모시고 있다. “외할머니와 저는 각별한 사이인데요. 예전엔 할머니를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느냐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형편이 갖춰져야 가능하다 싶어요. 전 경제적·시간적 여력이 없는데 만약 당장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요. 책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와요. 당장 간병인을 쓰지만 최저시급으로 줘서 못내 미안하다고요. 그렇다고 한 달에 300만 원 정도를 이분에게 드리려니 막막하다고.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려면 돈, 기동력, 서류를 이해할 수 있는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는데, 다 부족한 것 같아 씁쓸하더라고요. 이외에도 공감 가는 지점이 많은 책이에요.”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인간의 마지막 권리》,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죽은 자의 집 청소》 등 죽음을 다루는 책들도 눈에 띄었다. 서점 지기가 장례지도사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면 손님들이 뭐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목회자인 걸 뒤늦게 아시는 분들은 오롯이서재가 이단이나 위장 교회가 아닌지 오해하거나 장례지도사를 할 만큼 동네책방 운영이 힘든가 보다, 하세요. 그게 아니라고, 원래 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죠.(웃음)”
보이지 않는 교인들
5년 전, 이춘수 목사는 장례지도사 일을 시작했다. 2016년 교회학교 제자가 세상을 떠났고, 장례를 치르는 마지막 날 본인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을 다루는 선교와 목회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일하는 목회자에도 관심이 있어서 장례지도사가 되었죠. 동기 아버지 중에 장례지도사분이 계셔서 몇 번 참관하게 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맞닥뜨리기 전까진 장례를 잘 모른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옛날엔 마을 사람이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함께 장례를 치렀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장례는 마을 공동체가 아닌 가족의 일이 되었고, 마을에서 전수되는 것들이 끊기며 생긴 공백을 상조 서비스가 메우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상조 회사들은 선불식으로 운영되는데, 회사 규모가 크기 때문에 장례 서비스 외의 인건비, 마케팅비 등 고정비용도 월 회비에 넣는다. 하지만 이 목사가 운영하는 오롯이상조와 같은 후불제 상조 회사는 고정비용 없이 장례에 들어가는 실비만 정산하므로 동일한 장례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1970-1980년대 때는 상조가 없었어요. 교인이 죽으면 직접 목사님이 염습도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장례를 종교 의례로 다뤘죠.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아쉽다고들 원로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은 말씀하세요. 죽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례는 그 자체로 종교 의례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가 장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목사는 주일마다 근처 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을 하고, 주중에는 탐험하는교회라는 이름의 선교적 목회를 한다. 예배처가 있거나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인 만남을 갖는 공동체도 없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교인’들이 있다. “장례를 하면서 모셨던 고인들을 저는 ‘보이지 않는 교인’이라고 불러요. 일반적인 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가꾸는 목사들이 부러운 적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장례를 하면서 모셨던 고인들 이야기를 적고 정리한 것이 마치 교적부처럼 보이더라고요. 장례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놓고 기도하면서 그분을 새롭게 만나기도 하고요.”
이 목사는 고인과 가족들이 찍은 사진을 요청하고, 이를 인화해 장례 둘째 날 접객실 테이블에 깔아놓는다고 말했다. 고인이 어떤 분이셨는지, 어떻게 사셨는지, 어떤 찬양을 가장 좋아하셨는지, 가족들에게 묻고 이를 조문객들과도 나누도록 돕는다. 가족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때는, 고인과의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물었을 때다.
“사진이 있으면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요. 이때 어디로 놀러 갔다, 이때 누구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세요. 서로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도 해요.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죽음만 있고 삶은 안 보이잖아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최대한 유도해 듣죠. 고인에 관한 정보를 모자이크 조각처럼 알게 돼요. 장례가 끝나고 그 조각들을 품고 기도하면 고인이 되살아나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었던 한 사람으로.”
장례 기간 그는 이웃 종교의 의례 형식을 수용하기도 한다. “조문객이나 형제·친척분들이 진심으로 추모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담으시면 재배(再拜)하실 수도 있는 거니까요. 상주에게도 맞절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려요.” 가족들 허락을 받아 고인께서 돌아가신 날짜, 장례식장 정보,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들, 입관 장면과 헤어지는 장면 등을 사진으로 찍는다. 발인 이틀 후에는 삼우제의 기독교적 의미를 글로 써서 사진과 함께 가족들에게 보내드린다. 장례가 끝났으니 고인은 탐험하는교회의 교인이 되셨다고 안내드리면서.
장례를 치러야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이춘수 목사가 지금까지 인도한 장례는 백수십 건. 죽음은 대부분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며칠 전부터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먼저 듣기도 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하나의 장례를 이끄는지 물었다. “어떤 분일까 궁금해지고 나름의 기도가 시작돼요. 기억하고 기도할 나의 교인이 또 한 명 생긴다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도 되죠.”
그가 경험한 장례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살과 사고사. “병사나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슬픔이 표현돼요. 하지만 자살이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아주 날것의 충격을 얻어맞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옆에서 볼 때 그건 슬픔이라기보단 충격에 가깝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더 조심스럽게 기도하게 돼요.”
안현미 대표는 이 목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 중에 자녀의 장례를 치른 부모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자녀의 장례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같은 부모로서 마음이 찢어지더라고요. 내가 만약 내 아이를 잃으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싶었고요. 신앙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감당해낼 자신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이 장례지도사를 한다고 했을 때, 또 유가족들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 이건 목회고, 새로운 사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장례가 끝나고도 유가족들은 연락을 해왔다. 전화를 걸어오거나 심방을 청하거나 선물을 보내온다. 직접 오롯이서재로 찾아오기도 했다고 안 대표는 말했다. “작년에 아버지 장례를 치러드린 가정이 있었는데, 장례 치르고 첫 명절에 가족분들이 책방으로 다 오신 거예요. 장례가 끝났으니 장례지도사를 찾을 이유가 없는데, 찾아주셔서 감사했어요. 남편이 장례 기간에 각별히 신경 썼구나, 느꼈죠. 남편의 장례를 마친 아내분께서 저희한테 감사하다고 하셨는데, 옆에 계신 아드님이 ‘어머니도 이분이 해주실 거예요’ 하면서 같이 웃으시더라고요.(웃음)”
이 목사는 고인이 읽던 일본어 성경을 유가족으로부터 선물받기도 했다. “어머니 유품인데 이건 목사님께서 맡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지만, 고인이 한글로 메모하신 흔적들을 보며 고인에 대해 더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것 하나하나가 제게는 또 큰 힘을 줘요.”
장례지도사로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 목사는 고인을 입관하기 직전이라고 말했다. 정돈되지 않은 고인의 얼굴과 눈을 보게 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촉각, 온도, 냄새 등을 수용하면서 감정적인 소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이었다. “장례지도사 선배들이 교육과정에서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무섭겠지만 잘 넘기면 금방 익숙해지니까 계속할 수 있다고요. 하지만 전 오히려 죽음에 무뎌지는 게 무서워요. 이걸 목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뎌지면 하는 이유가 없어질 것 같아요.”
이 목사는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유가족에게 묻고 기도를 드린다. 똑같은 죽음이면 무뎌질 텐데, 들여다보고 기도할수록 모두 다른 삶과 다른 죽음이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생을 의례로서 마지막으로 정돈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나요? 사회적 참사도 장례를 미루는 이유가,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전까지 우리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 때문이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장례 지도’는, 기독교적 용어로 고인을 천국에 보내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계속 삶을 이어가실 수 있도록 돕는 일 같아요. 그걸 신앙 안에서 할 수 있다는 게,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죠.”
에필로그
이춘수 목사는 외부에 ‘죽음 교육’ 강의를 나가기도 한다. 강의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묻자 나온 답변. “인생 계획을 짤 때 다음엔 어떤 스텝을 밟고, 어디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할지 로드맵을 짜는데,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전 청년들에게 삶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변수들, 자기를 흔들어놓는 것들이 모두 죽음의 한 형태라고 말해요.”
죽음 교육에서 그는 관계 단절, 실패 등 변수들을 의도적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이를 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지 않느냐, 그거 죽음의 한 형태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번 글로 써보자, 라고 해요.” 지난날 내가 겪었던 숱한 죽음들이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인생은 예측 불가.
김다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