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호 뚜벅이 책방 탐방]
오전 10시. 일곱 평 남짓한 공간에 흩어져 앉은 사람들이 각자 책을 읽고 있었다.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 음악과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이 모임은 ‘아침책 함께읽기’. 당황한 얼굴로 서있는데, 이곳을 지키는 서점 지기 권오준 목사가 인사했다. “커피 드세요?”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 위치한 이곳은 옥수서재. 올해로 6년 차를 맞은 동네책방이다.
침묵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나는 아침 독서
‘아침책 함께읽기’는 매주 화요일 아침 열린다. 멤버가 열한 명인데 모두 매번 나오진 못한다. 이날은 여섯이 모였다. 권오준 목사와 40-50대 주부 둘, 은퇴한 손해사정사, 노년의 목사,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의 책을 읽는 중년 남성. 한 시간 정도 침묵하며 독서를 하다가 모였는데, 각자 가져온 책이 제각각이었다.
한 참여자는 너무 복종만 하고 산 것 같다며 에리히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를 가져왔고, 딸을 키우고 있다는 이유로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 생존자가 쓴 책을 어렵게 골랐다는 이도 있었다. 한 가족이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소설 《한순간에》를 선택한 사람은 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진실을 아는 사람과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 진실은 아니지만 내 편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는데, 내용이 너무 슬퍼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고요.”
‘아침책 함께읽기’는 코로나가 잦아들 무렵인 2022년에 시작했다. 권 목사는 ‘누가 아침에 책모임을 하러 오겠냐’ 타박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올 수 있는 사람이 제한적이어도,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조용한 아침 시간에 책 읽기 좋은 공간이라 사람들에게 쓰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업무 시간을 조정해서 오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읽은 책에 관해 나누던 중 각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물음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이, 책을 싫어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는 다독가, 책과 음악이 자신의 ‘노후 대책’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곳에 오면 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계속 나온다는 주민. 모임 때마다 간식을 사오는 한 참여자는 다른 서점에서 발견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이곳에서 주문했다. 서점에 맡겨두고 펼쳐보는데, 이유는 아끼면서 조금씩 읽고 싶어서.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기도 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교회, 목회자, 사역의 다양한 모습을 꿈꾸며
옥수서재는 옥수역 인근 한 건물 지하 1층에 자리하고 있다. 파란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크기의 책상들과 함께 서가가 보인다. 눈에 띈 것은 역사 코너. 《대서양의 역사》, 《고대 지중해 세계사》,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베트남 전쟁》, 《그레이트 게임》,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등 가볍지 않은 제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인문, 교양·과학, 예술, 문학, 그림책, 독립출판물 등 다양한 분야의 책도 비치돼있다. 책 입고와 큐레이션을 담당하는 이는 파트너인 최아론 목사다. 권오준 목사는 대학 선배인 최 목사와 독서모임을 하면서 교회와 목회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나눴고, 2019년 힘을 합쳐 옥수서재를 열었다.
권 목사는 4년 남짓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개념을 접했는데, 그때 많은 질문이 쌓였다고 말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이나 한국교회의 여러 사역이 과연 현재 상황을 잘 담아내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교회, 그리고 교회 안에 제한된 목회자와 사역이 다양한 모양과 의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회자들이 각자 자기 경쟁력으로 살아남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고, 교회들이 성장만 추구하고 생존 경쟁을 벌이는 게 한국교회의 구조적 문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난 권 목사에게는 예배당이 제일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었지만, 제도권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와 2년간 지역교회를 기쁘게 섬겼지만 이를 마무리하고, 수년간 질문으로 주어졌던 사역을 시작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처음엔 서점이라는 공간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못했어요. 책이 있고, 혼자 사유하지 않고 함께 공유하는 공간, 그리고 사역의 길을 찾는 공간을 그렸거든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다 보니 동네책방이 되었죠. 책을 좋아해서 책방을 운영하는 건 아니에요. 목회와 사역을 책임 있게 하기 위해 책과 조금씩 가까워졌지만, 지금도 책 자체보다는 옥수서재라는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지역 주민들, 다른 목회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게 더 좋아요.”
옥수서재는 교회와 목회자, 사역이 다양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 목사가 내딛은 첫걸음이다. 그는 동네책방에서 할 수 있는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했다. 지역을 위한 일, 그리고 목회자를 위한 공간 제공. 주민들이 함께 만나는 장소로 책모임이나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하고, 여러 전시나 인터뷰, 세미나, 작은 공연 등을 위한 공간을 제공했다. 또, 목회자들의 독서모임을 ‘노인’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세 차례 진행했는데, 코로나 상황으로 오랜 기간 중단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다시 모임을 시작하고픈 마음이 있죠. 아주 민감한 주제나 이슈들에 대해 신학적 고민이나 성찰을 하자는 큰 취지나 포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목회자들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필요한 어떤 주제나 이슈에 대해 같이 나누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간절한 것 같아요. 목회적 동행으로 깊어지고 견고해지기보다 경계를 넓히고 관대해지길 바라는 거죠. 이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복음에 대해 질문하되, 복음을 훼손하거나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연대할 길을 찾고 싶어요.”
한편, 파트너인 최 목사가 옥수서재를 열기 전에 개척한 살림교회는 주일마다 공간을 대여하고 있다. 월세 중 일정 부분을 부담한다. 서점과 카페, 공간 대여 등으로 옥수서재 공간 유지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지만, 인건비를 벌지는 못한다. 권 목사도 어떤 정기적인 모임이나 예배 공동체가 생기면 공간 사용료를 부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처음 취재 요청을 했을 때 권오준 목사는 망설였다. “만 5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잖아요. 뭔가를 성취한 이야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주저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죠. 그래도 인터뷰를 하게 된 건 〈복음과상황〉이 제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보여주거나 들려줄 것은 없어도 옥수서재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복상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옥수서재는 복상 독자모임 장소로도 쓰이는데, 선후배 목회자들과 4년 넘게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실없는 소리를 듣는 것도 소중한 경험
동네책방이 햇수로 6년째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권오준 목사는 서점 운영 자체가 목표는 아니라고 말했다. 책과 서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한 사역이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동네책방에서 기독교적 사역을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물론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 관련 모임을 이뤄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과 만나며 환대, 평화, 사랑, 희생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를 책모임 등에서 나누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기독교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어떤 시간이 만들어지고,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예배 공동체를 꿈꾸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시작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동력을 잃기도 하고요.”
그런 권 목사에게 ‘아침책 함께읽기’로 만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동력이다. 모임은 2022년 시작했는데, 처음엔 ‘공감’을 키워드로 잡아 코리 도어펠드의 《가만히 들어주었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등을 함께 읽었다. 책모임이 가진 유익이 많지만, 타인과 세상에 대한 공감의 지평을 넓히는 시간이길 꿈꾼다고 그는 말했다.
“우선은 서로 듣는 경험이 쌓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고상하고 지적이고 정제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실없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떤 합리적인 선택, 상식적이고 자기 기준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생각들에 동의하기 쉽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권 목사는 어떤 한 가지 의견으로 귀결하기 위해 책모임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세상은 자꾸 계급과 계층을 나누려 하고, 나의 경험이나 배경과 견주었을 때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고상하고 잘난 사람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품은 생각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나의 의가 얼마나 작은 세계인지, 이것이 뭔가 정답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굉장히 폭력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책모임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내놓는 메시지들이 어떤 이들에겐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겠다고 느끼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인 것은 맞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해석과 관점이 다양하잖아요. 특별히 다양성에 취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기독교인과 불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섞인 독서모임. 권 목사는 이 모임을 지역 내 소그룹이자 좋은 공동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깊은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각이 어떤지 접할 수 있다고. 특히 코로나 때 교회가 보여준 모습, 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목회자로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교회에선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이 없다고 느끼면서.
기독교 신앙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참여자들이 종교성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눌 수 있다고 권 목사는 덧붙였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고 해서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나 목적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기독교 신앙이라는 공통의 울타리가 있을 때 나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을 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중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들어야 할 말도 많고요.”
교회와 교회 밖 공간이 연결되길
그러나, 외로움. 옥수서재를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 무엇인지 묻자 돌아온 답변이었다. “제도권 교회를 벗어나 있다는 것, 다르다는 사실이 주는 외로움이 있는 것 같아요. 동역자가 많다면 힘을 낼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외롭고, 작은 일 하나를 시작하기도 주저되죠. 이런 느슨한 상황을 계속 이어가면 안 되겠다고 느껴요. 그동안 옥수서재라는 공간이 조금의 신뢰를 쌓진 않았을까 싶어서,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펼쳐가고 싶어요.”
권 목사는 옥수서재에서 만나는 예배 공동체가 생기길 소망한다. 개인적으로 예배는 매주 드리지만,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할 때 생기는 결핍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되지 않아서 부대낄 수 있고, 관계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소진되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주는 힘과 위로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그립고, 내가 여기서 어떤 사역을 해나갈 수 있을까, 막연히 불안해지면 교회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죠. 교회가 돌아가지 못할 곳은 아니지만요.”
교회 밖 새로운 사역을 찾아가는 사람으로서 처음엔 교회와 단절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마음이 든다고 권 목사는 말했다. “주민들과 독서모임에서 만나면서 어떤 신앙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모임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어요. 교회와 교회 밖 공간들이 연결되고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사역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죠. 교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요.(웃음)”
매주 금요일 저녁 여덟 시, 권 목사는 옥수서재에서 기도 모임을 2년째 열고 있다. 자신과 가족, 이웃, 교회와 세대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한 달에 한 번은 같은 시간에 예배로 모이려고 복상 성동 모임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준비 중이다. 교회를 벗어났거나 주일날 예배의 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예배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작은 사역을 꿈꾸며.
에필로그
옥수서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6년 차다. 보여주거나 들려줄 게 없는데, 심지어 약해진 구석도 하나 있다. ‘아침책 함께읽기’에서 이를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눈앞의 사람이 흥미로운 사람인지 아닌지 자꾸 가늠한다. 인터뷰를 진행할 때는 화두로 잡을 만한 키워드는 무엇인지, 더 깊이 들어갈 것인지, 다른 화제로 돌릴 것인지. 늘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필요하다면 상대방의 말을 끊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도, 지면도 늘 한정적이어서.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중요한 멘트가 무엇인지, 짧은 시간에 계속 판단하다 보면 일상에서도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소소하지만 우리 삶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만드는 말들의 위력을 낮춰보게 된달까.
처음 보는 어른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내게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며 답변을 공들여 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수줍어하시고,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하시면서.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그러나 배우기 어려운, 경청의 자세.
김다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