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호 구선우의 동물기]

본 연재는 본지 400호 기념 ‘연재 기획 공모전: ‘복음’과 ‘상황’을 잇다’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왜 ‘동물’인가

“송아지, 송아지, 투뿔(++) 송아지~”

여덟 살 아들이 동요 〈얼룩송아지〉 가사를 바꿔 부르며 낄낄댄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겼겠지만, ‘동물 묵상’에 빠져있던 터라 새삼 가사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왜 저 아이는 동요 속 송아지를 먹거리로 바꾸어 부르고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까? 아니, 어떻게 저것이 웃음거리나 유희가 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동물을 묵상한다. 동물권이나 동물 해방을 논하는 고차원적인 묵상이 아니라, 그저 동물을 생각한다. 동물 생각을, 조금 깊이 하려 한다. 그래서 ‘특정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동물 묵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제대로 살아본 적도, 채식주의를 제대로 실천해본 적도 없지만 동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

어느 날은 길가에 버려진 음식물을 먹는 비둘기들을 10분 넘게 관찰하며 각 비둘기의 개성을 찾아내는 게임을 즐긴다. 무늬가 화려한 친구, 다리를 다친 친구, 덩치가 유난히 큰 친구, 평화의 상징처럼 유독 하얀 친구…. 비둘기 묵상이 끝날 때쯤에야 비둘기를 친구라 불러보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밥상에 올라온 돼지고기 반찬을 보며 돼지의 일생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농장에서 태어난 돼지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꿈이 있었을까? 꿈을 꾸지 못하더라도, 고통은 느꼈을 텐데. 돼지를 묵상하면 육식을 하는 것이 괴로울 때도 있지만,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솔직히 나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오늘도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동물 묵상이 괴상하고 거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물에 대해 한 번쯤 깊이 따져본다면,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괴기한지 어렵지 않게 돌아볼 수 있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이지만, 동물의 왕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주아주 오래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친구이자 도구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는 만들어진 지 1만 5천 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 벽면에 무엇을 그려 넣었을까? 바로 동물이었다. 말·사슴·들소·매머드 등 다양한 동물들이 원시미술에 나타난다. 그리스신화에도 수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 제우스는 스스로 독수리·황소·백조 등 온갖 동물로 변신했을 정도다. 동아시아 십이지는 중국에서 상고시대(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부터 사용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호랑이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곰이 웅녀가 되어 환웅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지 4,357년이 지났다고 전해진다.

고대 인간에게 동물은 어떤 존재였을까? 곰족과 호랑이족 사이에서 벌어진 대결이 단군신화로 전승된 사실을 보면, 고대 부족들은 동물을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수렵 채집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했으니, 동물들은 사냥을 통한 정복 대상이기도 했다. 농경사회부터 인간들은 특정 동물들을 길들여서 도움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웃은 동물이었다.

성경에도 동물이 등장한다. 그것도 인간보다 먼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천지창조 다섯째 날에 인간보다 동물을 먼저 만드신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생육하고 번성하여 … 충만하라”(창 1:22)는 명령을 내리신다. 그다음 날 인간을 만드시면서 동물들에게 했던 명령을 똑같이 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뒤이어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이어진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 말씀의 영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동물의 관리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 동물들에게도 똑같이 내린 “충만하라”는 명령을 잊고 살아간다. 동물들은 노아의 방주에서도 함께였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교회 초등부에서 만난 한 어린아이는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죄 없는 동물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동물들의 희생을 간과하는 버릇이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식탁에서 동물의 희생을 목격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대신, 놓쳐서는 안 될 동물 묵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사람들이 동물을 자신들 이야기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오랜 시간 세상의 보편적인 지혜를 담기 위해 우화(fable)를 사용해왔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고대 그리스 아이소포스는 우화를 창시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그가 만든 우화를 ‘이솝우화’라고 부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그를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Ionia) 지역의 노예 출신 이야기꾼으로 소개한다. 《이솝우화》는 오랜 시간 구전되다가 후대에야 문서로 쓰였다. 플루타르코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다른 기록들 덕분에 이솝의 역사성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신화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나 인도가 원류이며, 그리스 문화에 맞게 이야기를 변용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동물을 이야기에 활용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인도 《자타카》(Jātaka), 《판차탄트라》(Pānchatantra), 중국 《백유경》(百喩經) 등 불교 문학에도 동물들이 등장한다. 우리나라도 12세기에 김부식이 펴낸 《삼국사기》 속 〈김유신전〉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642년 신라 시대에 김춘추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용왕 딸의 심장병을 고치기 위해 거북이 사신이 토끼를 등에 태워 용궁으로 데려왔다가, 간을 뭍에 두고 왔다는 말에 속아 토끼를 놓치고 말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고구려에 붙잡힌 김춘추는 이 이야기를 듣고 토끼처럼 꾀를 내어 땅을 주겠다는 말로 고구려왕을 속여서 신라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 〈귀토설화〉는 조선 판소리 〈별주부전〉으로 이어진다.

요즘에도 옷을 입고 사람처럼 말을 하는 동물들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기술이 발전해서 〈라이언킹〉, 〈정글북〉 등이 실사화된다. 영상에서 사자가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니아 연대기》에서 진정한 왕이자 신적인 존재인 아슬란은 사자로 묘사된다. 영화 속 말하는 사자의 모습에서 위엄을 느끼고, 그의 희생을 보고 감동한다. 아슬란이 사자여서 가능한 일일까? 이야기 속 동물들에는 일종의 편견이 반영되어있다. 거북이는 느리고, 돼지나 늑대는 탐욕스러우며, 소는 우직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한 군주상을 제시했다. 오랜 기간 인류 안에 축적된 사회적 경험이 낳은 산물일까?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동물을 인간과 분리된 존재로서 ‘타자화’하는 일을 즐긴다. 물론 인간이 아닌 존재를 타자화하는 작업이 별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말 그럴까?

인간들이 동물을 쉽게 이용해온 만큼, 자연스럽게 동물들 사이에도 위계가 만들어진 것 같다. 대왕판다 푸바오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길에서 비둘기를 보면 피한다. “이제 그만 드시개”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에서 식용 개가 금지되었지만, 여전히 돼지와 소는 희생당하고 있다. 심지어 이 사실은 ‘식용 개는 따로 키운다’라면서, ‘어떤 개’는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할 때 사용되는 논증이다. 식용 돼지에게는 안 미안한가? 반려동물도, 관상용 동물도, 동물원에 갇힌 동물도, 식용 동물도 다 생명을 가진 동물이다. 이야기 속 동물은 동물이 아닌가? 인간과 동물은 삶 가운데 밀접하게 엉키면서 살아가는데도, 우리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분리하는 일에 익숙하다. 인간은 동물을 쉽게 이용한다. 와중에 많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들

동물을 묵상하다 보면, ‘인간이 과연 동물보다 우월할까?’ 질문도 하게 된다. 답을 찾으려고 공부하다 보니, ‘종차별주의’(speciesism) 담론으로 논의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가 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생애를 떠올려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연을 종교적 텍스트로, 연구실을 성소로 삼고서 연구에 매진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종차별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등급을 매길 권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어류를 파헤쳤다. 사람들 간에 우열을 매기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인간종을 개량해야 한다는 목적을 지닌 ‘우생학’에 매몰되어 강제 불임수술 등을 합법화하는 프로그램에 일조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우생학적 사고와 실천을 비판하면서도, 종차별주의 자체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면, 동물을 돌볼 책임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했다. 본질적인 관계성을 가진 동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책임에 대한 응답으로 동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리처드 헬무트 니버는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사회뿐 아니라, 자연 세계 안에서 생명을 주고 죽음을 다루는 ‘응답하는 존재’로서 살아간다고 주장했다.1) 동물을 사랑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동물보다 우월한지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더 급진적인 생각도 있다. 공리주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1975년 동물 해방을 외쳤다. 피터 싱어는 대학생 시절에 고기를 먹지 않는 리처드 라이더를 만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동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생각하기 시작해,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배경 안에 있는 ‘종차별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책이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이다. 피터 싱어는 단순히 시혜적 관점 혹은 동물 복지 차원에서 동물을 논하지 않는다. 그는 ‘종차별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정복을 고발하고, 모든 동물을 고통에서 해방해야 한다며 ‘평등’을 외쳤다. 1975년 《동물 해방》 초판 서문에서 그는 자신은 동물을 일방적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밝힌다. 자신이 외치는 평등은 동물을 향한 사랑과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동물들이 독립적이고 지각 있는 존재로 취급되길, 그리고 동물들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를테면 돼지의 살덩이를 샌드위치 재료로 소비하기)으로 취급되지 않길 원할 뿐이다.2)

도구, 책임, 평등. 나는 어떤 관점에서 동물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동물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동물은 타자인가, 자율적 주체인가. 인간 외에 모든 동물도 신이 창조한 귀한 생명체로 본다면, 인간을 중심에 놓고 논해지는 종차별주의를 벗겨낼 수 있을까? 참 불편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이다.

더 나은 질문 만들기

나의 동물 묵상이 정답을 찾는 여정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 비건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다른 누구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이 여정을 통해 질문을 더 잘하고 싶다.

대학생 시절 강의실에서 질문을 하면, “학생은 그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으시던 교수님이 생각난다. 그 수업 시간에 질문하기 위해서는 머릿속 질문을 다듬고 다듬어 노트에 적어보고, 그 기록을 읽고 또 읽어 손을 들고 소리 내어 물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답변이 중요했던 것 같지는 않다.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 다듬어가는 과정이 나를 더욱 성장시켰다. 동물, 무엇일까? 누구일까? 아니, 무엇을 물어야 할까? 질문을 더 잘하고 싶어진다. 질문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하고 사유한다. 이것이 동물을 묵상하는 목적이다. 더 나은 질문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않을까?

앞으로 써 내려갈 동물 이야기는 마음 불편해질 수도 있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솝우화가 그랬듯이, 동물 이야기는 어린이부터 즐길 수 있는 재밌는 이야기이다. 앞으로의 글들에서 동물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다루고자 한다. 이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부 우리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까운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질문들이 동물과 사람 모두를 위한 좋은 질문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사자는 어쩌다 동물의 왕 자리를 빼앗기고 창살 안에 갇히게 되었을까?’ ‘고대 신화 속 성스러운 동물 소는 어쩌다 맛있는 동물이 되었을까?’ ‘도둑고양이는 어떻게 집사의 섬김을 받는 고상한 동물이 되었을까?’

■ 주

1) “우리는 비단 사회 안에서만 응답하는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다. 더위와 추위, 폭풍과 청명한 날씨, 지진과 조수 (潮水), 건강과 질병, 동물과 식물 등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초래하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 는 자연계 안에서 그 자연의 사건들을 해석하고 그 자연현상들에게 응답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리차드 H. 니버, 《책임적 자아》,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85쪽)
2)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연암서가, 2012), 20쪽.

 

✽ 수상 소감 ✽

저는 환경운동가가 아닙니다. 기후위기로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있기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만, 인류세, CF100, RE100, 그린 택소노미, 탄소중립 등의 용어가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피부에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저는 동물권주의자가 아닙니다. 심지어 반려인도 아닙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 반려동물과의 삶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거북이 두 마리를 키웠고, 결혼 후 아주 짧은 기간 아내가 키우던 강아지이자 남동생이었던 초롱이의 매형이 되어준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동물신학자가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지만, 동물의 창조론과 구원론은 배운 적도, 깊이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저는 경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정과 화해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세상에서 동물까지 챙길 여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동물이 궁금한 사람입니다. 제 궁금증은 동물에 관해 특별한 관심이나 소명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제 일상 속 질문들이 독자분들에게 공감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감사하게도 큰 상을 받았으니, 질문들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책과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과 여러 동물을 만나러 다니고 있습니다. 제 여정의 가치를 높이 봐주시고, 지면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번 연재를 통해 정말 얻고 싶은 것은 사랑입니다. 조용히 사랑해도 되는데, 공개 연애를 하려니 참 부담되네요. 예쁜 사랑, 지켜봐주세요!

■ 연재 순서

1. 프롤로그: 동물 묵상을 시작하며
2. 돼지 ― 인간으로부터 돼지를 구원할 수 있을까
3. 말 ― 인간과 동물은 영혼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4. 소 ― 인간보다 위대한? 성스러운 동물들에 관하여
5. 고양이 ― 흑사병의 주범? 도둑고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6. 쥐 ―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이 있을까
7. 독수리 ― 조류특집! 독수리는 어떻게 진리와 자유를 수호할까
8. 거북이 ―  동물에도 위계가 있다? 관상용 동물과 반려동물은 어떻게 다른가
9. 고래 ― 어류특집! 바닷속 미지의 영역이 궁금하다
10. 사자 ― 동물의 왕 사자는 어쩌다 우리에 갇히게 되었나? 인간의 미래는?
11. 개 ― 가족, 삶과 죽음, 인간을 다시 생각하다

※순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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