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호 사람과 상황] ‘과학-신앙의 대화’에 힘쓰는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 ⓒ복음과상황 이범진

역사학자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IVP)에 따르면, 미국의 복음주의 과학자 대부분은 과학 연구가 활발했던 19~20세기에 ‘기독교 대 과학’ 사이의 논쟁적 이슈에 침묵을 지켰다. 그 결과, 미국 기독교인들의 과학적 사고에 대재앙이 왔다. 19세기에는 없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 주창되어 유사종교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나마 이후에 신학자와 과학자 사이에 (법적 논쟁을 포함한) 접촉과 토론이 활발해졌고, 창조과학은 이제 근본주의 성향의 교회 일부의 주장으로 쪼그라든 형편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아직도’ 창조론 이슈를 두고 뜨거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러 기고문과 저서, 대중강연을 통해 창조과학회의 ‘젊은지구론’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우종학(46)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벌써 10년 넘게 논쟁의 중심에서 목소리를 내왔다. 대학원 시절 믿음의 벗들과 함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읽고 침묵하지 않는 기독 지성인이 되기로 결심한 게 여기까지 온 계기였다.

최근에는 그의 저서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 이하 ‘무크따’) 개정증보판이 출간되면서 또 한 차례 논쟁이 일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글들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답하고 대응해나가는 그를 3월 초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한국교회의 창조론 논쟁뿐 아니라 교회의 신앙 교육에 관한 이야기까지 물었다. 최근 ‘페이스북 테러’를 당했음에도 걱정과 달리 밝은 표정이었다.

- 《무크따》 개정증보판이 나온 뒤 또 다시 창조론 논쟁이 뜨겁다. 이재만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이 직접 《무크따》와 교수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 칼럼을 썼다. 이에 교수님도 조목조목 반박하셨는데, 이번엔 더 적극적이신 것 같다.
이재만 씨는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미주지역 한인교회 창조과학회 소속인데, 두 차례나 《무크따》를 왜곡하는 칼럼을 써서 나도 읽어보았다. 성경적으로 그럴 듯하게 쓴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 정작 과학에 대한 과학적인 반론이 없다. 그동안 창조과학회의 핵심 주장, 즉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계산하면 지구 나이가 고작 1만 년이라는 ‘젊은지구론’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누군가의 실명을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어서 비교적 공격적으로 반박 글을 썼다. 개인 블로그에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고, 연재중인 〈국민일보〉를 비롯하여 〈뉴스앤조이〉 기획 기사에도 꽤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 최근에 페이스북 테러(?)를 당하기도 하셨는데.
정말 흉측한 사진이 내 타임라인에 올라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오히려 지지자가 더 많아지고 격려 메시지도 많이 받는다. 정말 감사하다.

- 초판 이후 5년 만에 개정증보판을 냈고, 대중강연도 꾸준히 해왔는데, 젊은지구론 등 창조과학회 주장에 대한 대중들의 변화가 느껴지는지 궁금하다.
정량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 변화가 느껴진다. 미국에서 《무크따》 초판 집필 작업을 하고 귀국할 때는 나도 지인들도 논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걱정을 꽤 했는데, 막상 창조과학회를 포함해서 별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웃음) 기독교 안에서 창조 논의가 젊은지구론이 유일하지 않고 다른 견해도 있다는 것, ‘오랜지구론’도 반기독교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쓴 책이고, 5~10년 정도 걸리겠다고 예상했다. 개인 블로그를 운영한 지도 거의 10년째인데, 지금은 책도 꽤 읽혀서인지 한국에서도 오랜지구론을 신뢰하는 저변이 꽤 넓어졌다. 목사님들도 창조과학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은 많이 확산됐다. 전과 달리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창조과학회 강의는 거의 안 부른다고 하고, 창조과학회 재정이 악화되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최근에 미국 시애틀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내 블로그의 글을 읽고서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의 고민을 끝내고 과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는 “최소한 젊은지구론은 버리고 가야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다”로 목표를 조금 올려 잡았다.

- 목표를 올려 잡았다고 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사실 과학자로서는 귀찮고, 앞으로도 지난한 논쟁이 예상된다. 왜 뛰어들었나? 전공 연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도 아닌데….
반복되는 논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필요한 일이었고 과학자로서 책임감도 느꼈다. 대학원생 시절 소속 선교단체 안에서 스터디 모임을 가졌는데, 번역도 안 된 원서로 읽은 책 중에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있다. 7장에서 과학을 다루 는데, 과학적으로 터무니없는 ‘젊은지구론’이 미국에서 창궐하는 것은 침묵하는 기독교 과학자들 탓이라는 내용이다. 다른 챕터도 사회 각 분야의 이른바 기독교 리더들이 자기 분야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 결과를 진단하는 내용이다. 20대 후반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되면 안 된다고 결의를 다졌다.

과학자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블랙홀에 관해 연구하는데, 대중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할 책임이 있다. 특히나 현대 과학은 국민 세금으로 연구·운영되고 있다. 그들에게 과학을 알리는 것은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이다. 또 한 가지는 개인적으로 유학을 결정할 때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실까를 놓고 세 가지 길을 생각했었다. 과학자로서의 자질이 있으면 연구를 계속 하고, 아니라면 접고 학생 선교 쪽으로 길을 잡으려 했다. 마지막으로는 과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과학과 신앙의 화해 작업을 생각했었다. 유학을 가보니 과학자의 길을 계속 가면서, 아직까지 완전하지 못한 과학과 신앙의 화해 작업을 할 수 있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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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과 신앙의 화해 작업이란, 예를 들면 무엇인가?
쉬운 예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적 발견과 무신론을 연결시킨다. 과학적 발견을 넘어서는 영역을 과학적 성과로 증명해내려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이는 무엇이든지 이성과 경험의 영역에 가두어 설명하려는 태도다. 창조과학회도 같은 맥락에서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 과학적으로 창조를 입증해내겠다는 접근 자체에 문제다. 과학적으로 신은 없다거나 과학적으로 신은 있다거나 하는 앞의 두 주장에는, 어떤 것이든 입증되어야만 사실이라는 과학적 실증주의 세계관이 팽배해 있다. 창조 섭리, 혹은 기적의 영역은 이성이 아닌 신의 영역이다. 꽤 오래된 SF영화 중에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콘택트〉(1997)를 추천하고 싶다. 과학자인 주인공이 외계 신호를 탐지하고는 웜홀을 타고 외계인을 만나고 온다는 내용이다. 과학적인 증명의 영역과 그 너머의 경험 영역에 대해서 열어 놓는 암시를 주는데, 〈인터스텔라〉보다 훨씬 재미있다!

- 한국교회에 만연한 반(反)지성 풍토와 더딘 변화로 인해 지치지는 않나?
깊이 생각해보면 반지성의 가장 밑단에는 과학에 관한 무지가 작용한다. 대중과학이 발전했다고들 말하지만, 과학과 우리 국민들의 관계는 여전히 멀다. 그 심층에 과학을 더욱 멀리하는 교회,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있다. 요즘 신학교들은 반지성적으로 창조에 접근하지는 않을 텐데, 교회의 반지성 풍토가 심각하다 보니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렵다.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가는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처음 지동설을 주장한 이후 50년 동안 지동설을 받아들인 사람이 10명 정도였고, 약 25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야 비로소 일반인들도 지동설을 ‘상식’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인들이 이미 오랫동안 주입당한 창조과학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그래도 《무크따》나 강의를 통해 때마다 100명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큰 도움을 받으면 100퍼센트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10년 고민한 문제가 풀렸다는 피드백을 받거나, 페이스북 메시지로 응원하는 글을 받을 땐 정말 힘이 난다. 지금으로선, 숨 쉬기 힘들던 사람들이 ‘숨 쉴 수 있게 되는’ 정도면 된다.

- 앞서 잠깐 페북 테러를 언급했지만, 교수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비이성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거나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있더라. 그럼에도 진지하게 댓글을 달고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활동이 너무 소모적이진 않은가.
처음 ‘창조과학 난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창조과학 비판을 시작한 게 1990년대 후반이다. <복음과상황>에도 창조과학회 주장과는 다른 창조 방법이 과학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었는데(1999년 2월호 “창조·진화 논쟁을 보는 제3의 눈”), 곧 ‘당신 기독교인 맞느냐’는 반응을 전해들었다. 충격이 컸다. 이후로도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글을 쓰거나 하면 비슷한 충격이 계속 왔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진정성을 갖고 성실하게 대하는 것이 결국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결코 논리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1만년 전에 창조가 이뤄진 지구는 젊다’라는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이면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한들 이미 자신이 믿어 버린 것에 반하는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 아이러니다. 이럴 땐 논리의 싸움이 아니다. 같이 밥 먹고 관계 맺으면서 쌓인 신뢰가 ‘설득력’이 되기도 하는 거다. 오히려 일대일로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바뀔 수도 있는데 워낙 많으니 다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블로그에도 꾸준히, 최대한 인격적으로 글을 쓰고 페이스북에 댓글도 성실히 다는 편이다. 이제 블로그 글이 꽤 쌓여서 영상으로 만들어 놓거나 주제에 따라 글을 분류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특정 사람에게 댓글을 달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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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에 복상에서 진화론적 유신론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2013년 11월호 “바이오로고스 혹은 진화론적 유신론 탐구”), 의외로 반응이 컸다. 발전된 논의를 한 번 더 다루는 일이 필요한지 고민 중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뤄야 하는 주제다.

- 교회 교육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그대로 창조 교육을 받은 뒤,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과학 수업을 배웠다. 별 충돌 없이 넘어간 듯하지만 돌이켜 보면 교회의 창조 이야기와 과학 수업의 내용을 따로따로 병렬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성장 과정에 따라서 원리를 설명하는 언어는 달라져야 한다. 가령 세 살짜리 아이가 엄마한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느냐고 물으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예를 들면 배꼽에서 태어난다고 쉽게 말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내용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원리를 설명하는 거다. 그런데 애가 자라서 서른 살이 됐는데도 여전히 배꼽에서 태어난다고 알고 있으면 문제 아닌가. 교회 교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 창세기 1장 내용을 그대로 단순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크면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인 것은 진리지만 그 창조의 그림은 다양하다. 그림 중 하나를 현대 과학이 그리고 있고, 과학도 계속 변화한다. 100년 후엔 지금 우리가 과학적으로 추론하는 우주에 대한 지혜가 우습게 보일 수 있다. 과학자를 비롯해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실제에 계속적으로 다가갈 뿐이다. 그러니 자연에 대한 그림은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 거다. 문제는 유아 때 배운 그림의 틀 안에 진리를 가두고 그 바깥으로는 넘어가지 못하게 할 때 발생한다. 커서 과학이 보여주는 자연의 그림이 알고 있던 것과 너무 다르고 다양하니까 충격이 오고, 그러다가 기존의 창조 그림을 버릴 뿐 아니라 창조라는 진리, 신앙도 버리는 것이다. 주일학교에서 창조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 창조 이야기를 점점 구체적으로 배워가는 당연한 과정이 왜 아직도, 교회 내에서는 제대로 안 이뤄지는 걸까? 교회 교육의 토대 자체가 마치 현대판 전족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창조론의 문제는 단순히 이론 싸움만은 아닐 거다. 많은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바뀌기 쉽지 않다. 판도라의 상자다. 성경의 창세기를 해석하는 방식은 성경 진리에 다가가는 전반적인 방식이지 않은가. 한 쪽은 문자 그대로 읽지만, 다른 쪽은 당시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려 한다. 여성 안수, 동성애 이슈가 그렇듯이 기득권 싸움과 엮이기도 한다. 한국보다 훨씬 논의가 오래된 미국,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 대안학교 중에는 젊은지구론을 가르치는 학교도 있다. 신학교 교수들도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환경일 거다.

- 창조 문제를 놓고 신앙과 과학 사이의 충돌을 경험한 적은 없나?
나는 오히려 과학과 신앙의 연결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사람들마다 신앙의 여정이 다 다르지 않은가. 나는 어릴 때부터 우주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는데,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보면서 ‘도대체 이런 건 누가 만든 건가’ 감탄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은혜를 받았다. 분명 우주보다 더 큰 존재가 있을 거라고, 없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신의 존재를 믿었다. 과학에서 실마리를 얻어 교회로 나오게 된 거다. 그러니 과학을 통해 발견하는 자연의 신비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시각으로 보았다.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오는 건 과학이 아니고, 오히려 한 가지 틀에 갇힌 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신앙처럼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 신앙이 진짜 신앙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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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론적 유신론도 그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신 건가?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이 발전한 경우다.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과학자들이 1941년에 만든 미국과학협회(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가 있다. 유학생 시절에 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의 스펙트럼이 꽤 넓었는데 나도 그땐 진화론적 창조론은 물리학에 비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일종의 거부감이 있었다. 동료들과 같이 밥 먹으면서 그 부분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랬더니 한 동료 과학자가 “과학이라는 건 계속 연구하고 채워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학문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더라.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오더라. 생각해보면 과학이라는 학문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부족한 부분을 연구하는 과정 중에 있는 학문이다. 그날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미 창조론에 대한 논란이 몇 십 년간 쌓여 있고, 과학과 신학 관련 책이 많고, 각 대학에서는 관련 논문이나 자료들을 다 공개해놔서 학문적인 토대도 있는데 한국은 빈약하다. 한국에서도 과학자와 신학자 사이의 논의가 더 활발해지면 좋겠다.

-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을 비롯하여 과학과 신학의 논의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사고를 자극받게 될 만한 책들을 소개해달라.
내가 대학생일 때와는 달리 지금은 교양과학서적들이 다양하다. 번역도 잘 되어 있고. 어디까지가 철학적인 주장이고 어디부터가 과학적인 주장인지 구분하는 눈이 있다면, 웬만한 교양과학서들은 다 읽으면 좋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하버드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The Creationists》(창조론자들)는 창조론 역사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 창조과학을 의미하는 개념인데, 그 100년의 역사를 알게 되면 게임은 사실 끝난다. 꽤 권위가 있는 책이다. 이 외에 읽을 만한 책들은 내 블로그에 꽤 소개를 해놓았다.

- 앞으로의 집필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무크따》는 사실 후루룩 쉽게 읽히는 책이라서 더 자세하고 권위 있는 책을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생각은 하고 있는데, 시작하면 방대한 작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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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말고도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라는 페이지 운영을 시작하신 걸로 안다. 반응은 어떤가.
회원 가입 요청이 꾸준히 오고 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같은 고민을 공유하며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에 대해 반가워하는 것 같다. 교회에 ‘창조과학 난민’이 꽤 많더라. 신학자, (부)목사, 과학자 중에 나서서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적다. 과학 문제는 알아도 신학을 잘 모르니 잘못 이야기했다가 이단으로 찍힐 수도 있고, 신학자들은 과학을 몰라서 혹은 알아도 교단에서 잘릴 수 있으니까 목소리를 내기 힘든 환경이다. 앞서 질문했듯 나만해도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하고 설명해야 하지 않나. 이 모임을 통해서 저변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신앙의 핵심은 믿음 아닐까. 긍정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리라고 믿거나, 새벽에 물 떠놓고 빌면 정성이 쌓여서 효과를 발휘할 거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철저히 약속에 대해 믿는 믿음 말이다. 누군가가 한 사람을 신뢰해서 약속을 받아들이듯, 기독교의 믿음도 인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길을 따라 간 제자들이 그랬듯,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약속을 믿고, 앞서 간 증인들의 길을 따라 나서는 믿음 말이다.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우리의 이해를 뒤엎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만, 그 경험은 첫 발자국을 떼지 않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서 역설적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신앙을 가르칠 때면 너무 성경만 보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성경도 중요하지만 자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책이다. 자연을 많이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최근 창조과학 논쟁과 관련한 우종학 교수의 입장은 개인 블로그 〈별아저씨의 집, 우종학의 과학 이야기 & 사는 이야기〉(solarcosmos.tistory.com/)에 자세히 실려 있다.


진행 _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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