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그리스도인 / 이원석 지음 / 두란노 / 2016년

오랜만에 만난 누나가 말했다. “난 책이 싫어!” 아, 이것이 책을 팔고 책 관련 글을 쓰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인가. 하지만 아픈 곳을 한 번 더 찌르듯 한마디 덧붙였다. “책 선물은 받아도 기쁘지가 않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사람도 싫고.” 나도 기쁘지 않았다. 책을 너무 많이 읽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이 세상에 기쁨보다는 슬픔의 총량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서점을 연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을 만나보면 ‘현재’ 독서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는 애초 책을 읽지 않았고, 그나마 소수 중 다수는 과거 무용담 이야기하듯 “언젠가 무슨 책을 읽었지…” 한다. 이렇듯 대다수 사람들에게 책이란 ‘공부 좀 했던 시절 잠시 끼고 다닌 사각형의 물건’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공부’란 말도 이상하다.

《호모쿵푸스》에서 고미숙은 “공부에는 때가 있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공부중독》에서는 공부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헬조선의 공부 현실을 다루면서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다시금 공부를 택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 문장에 공부를 8번 언급하니 나도 헷갈리는데 저 ‘공부들’ 중 ‘공부’를 구분해내는 기준은 결국 ‘먹고사니즘’이 아닐까 싶다. 먹고살기 위한 기술과 삶 자체를 묻는 ‘공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기술’이 ‘공부’의 자리를 차지하니, 삶 자체를 묻는 ‘공부’는 신선놀음이 된다. 먹고사는 기술을 설명하는 매뉴얼들은 ‘현실적’인 반면, 먹고사는 삶 자체를 묻는 ‘공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은 ‘비현실적’이다. 토익 수험서도 표지와 본문이 있는 매뉴얼이지만 저 매뉴얼을 들여다보는 누군가를 향해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앉아있다’고 과감하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두께를 지닌 플라톤의 《국가》를 카페에서 읽고 있다면 누군가는 분명 말하겠지. “시간이 남아도나 보네.”

그런 점에서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기이한 위로를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 책을 팔고, 책 관련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내가 속한 기독교가 본래 책의 종교임을, ‘공부하는 종교’임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이 힘써 외치지 않아도 한국교회는 이미 열심히 공부했고, 또 열심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는 것 같아 보인다. 올해도 수많은 교회는 ‘성경 ◯독’을 목표로 내건 현수막을 본당 어딘가에 걸어놓았을 것이다. 주일에는 강단에서 하는 성경말씀을 듣고, 수요일, 금요일에도 말씀 강해를 들으며 매일 아침 큐티 말씀을 읽는 ‘열심 있는 성도’들은 분명 모범 신자다. 하지만 이러한 열심이 마치 토익 수험서를 ‘책’으로 간주하여 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열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공부 역시 ‘먹고사니즘’으로 좌우되는 거라면, 그건 좀, 문제 아닌가.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를 스승 삼고 교회를 도반삼아 공부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를 만들고, 갱신했다고 한다. 이를 오늘날에 적용하면 스승의 가르침을 독서로 익히고, 교회의 도반들과 함께 나눔을 통해 갈고 닦는 것이 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여기서 독서의 대상이 2017년 토익 예상 기출 문제집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스승, 우리의 주 예수님은 ‘먹고사니즘’에 좌지우지 되던 분은 아니셨으니까. 그러니 다시 누나를 만난다면 말해야겠다. 책을, 너무 싫어하지는 말라고. 그래도 ‘미워도 다시 한 번’ 볼 만한 건 내가 알기로는, 인간 말고는 책 밖에 없으니까. 

 

박용희
장신대 구내서점, IVP(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산책’ 북마스터로 일했다. 책, 여행, 사람을 좋아한다. 새해 들어 고양시 덕은동에 헌책방 ‘용서점’을 내고 책과 더불어 하루를 열고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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