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호 민통선 평화 일기 03]

   
▲ 농사짓기는 땅바닥에서 하는 영성 훈련이다. (사진: 국경선평화학교 제공)

농사는 기도다
국경선평화학교 수업 중에는 ‘유기농사’ 과목이 있다. 유기농사법을 배워서 북한 땅에서 실천적 평화봉사활동을 하자는 목표를 갖고 실행하는 강좌인데, 농사를 짓다 보니 우리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영적으로 매우 유익한 체험이다. 좋은 먹거리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이다.

아마추어 농사꾼인 우리는 3월 한 달 동안은 친환경 유기농사에 관한 책을 읽고 무엇을 심을지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한다. 4월부터는 본격적인 농사짓기에 들어간다. 밭을 정리하고 마른 풀을 태운다. 올해 농사는 각자 심고 싶은 작물을 두 가지씩 정해 ‘책임 재배’하기로 했다. 상추를 비롯한 쌈 채소들, 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 호박을 심기로 했는데 내가 맡은 작물은 당근과 시금치이다. 감자와 고구마는 공동 재배 작물이다.

우리 밭은 천연 자연농이다. 2년째 풀을 안 뽑고 농사를 지었다. 풀을 아예 안 뽑은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풀 뽑기를 포기한 것이다. 매년 여름 장마비가 고비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게 자라는 왕성한 풀들의 생명력 앞에서 두 손 들었다.

풀을 뽑을 때는 뿌리까지 다 뽑지 않으면 곧 다시 나온다. 풀을 뽑으면서 뿌리가 중요함을 배운다. 풀을 뽑으면서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풀뿌리 민중 사상을 체험한다. 풀을 뽑아보면 그냥 몸으로 다 알게 된다. 뿌리가 살아 있으면 아무리 억누르고 짓밟아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뿌리는 결코 완전히 뽑히지 않는다. 땅 속에는 수없이 많은 뿌리들이 있다. 뿌리를 뽑아도 다시 땅 속에서 다른 뿌리로 생존하기 때문에,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린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 풀을 꼭 뽑아야 하나, 풀도 생명인데 왜 꼭 뽑아야 하는 걸까? 사람의 먹거리가 아닌 풀들은 몽땅 잡초가 되어 뽑힌다. 잡초라니, 누가 처음 이렇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이 풀들도 제 이름이 있을 것이다. 잡초도 생명이란 생각에 이르면 손에 힘이 빠지고 그냥 일어서게 된다.

먹거리 풀과 먹지 않는 풀 모두 그냥 두지 싶다. 먹거리 풀만 키우는 것은 사람이 더 많이 먹으려는 거니까, 덜 먹자 하면 잡초들도 뽑을 필요 없다. 밭에 쭈그리고 앉아 풀 뽑기를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난다. 이런 별별 생각이 농사짓기의 매력이다. 

농사짓기는 땅바닥에서 하는 영성 훈련이다. 땅을 파고 씨를 뿌리면서 신학 공부를 다시 하는 느낌이다. 흙 속의 온갖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생명의 신비로움을 경험한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을 농부라고 했는지 알게 된다. 신학교 교실에서만 하는 신학은 부족하다. 신학생들이 연중 세 번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보길 바란다. 봄에 와서 밭 갈고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와서 추수하면, 농사짓기만 한 신학 공부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흔히 농부들은 보수적이라 한다. 땅을 갈고 씨 뿌리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밭에서 일한다. 씨를 심고 열심히 가꾸다 보면 어느새 열매가 맺혀 결실을 얻는다. 갑자기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농부들은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변혁운동이 농부에게는 익숙치 않다. 농사는 매일 같은 일 같지만 매일 다르고, 매년 같은 일이지만 지루한 반복이 아니다. 흙에 엎드려 살다 보면 어느 새 해가 지고, 고단한 몸은 단잠을 잔다. 농작물이 깨어나는 새벽에 농부도 깨어 일어나 밭으로 간다. 세상 돌아가는 일은 그저 세상이 그런가 보다 한다. 농부에게 진보적인 일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일이다.

오늘 아침 유기농사 수업시간에 우리는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협업이다.
하나님이 매일 아침 해를 주시듯
매일 매일 하는 일, 농사는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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