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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종교권력의 기원과 4가지 지배 이념
종교권력과 교회 세습 톺아보기(2) - 한국 개신교회 종교권력의 기원과 개념
[0호] 2017년 08월 01일 (화) 11:23:40 설훈 hoondosa@paran.com

지난 6월호 '사람과 상황'에서 소개한 설훈 목사의 박사 논문 <한국 개신교회의 종교권력과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필자가 편집하여 4~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종교권력의 대표적 결과물인 교회세습은 1990년대 이후 활발하게 나타나게 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이미 예견되던 현상이었다. 교회 부흥이 정점을 찍고 하향세로 접어들었고, 교회 부흥을 경험한 세대들이 신학교로 진학하여 목회자가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세습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임박한 표면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한국 개신교회 세습의 토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아야만 한다.

종교권력의 기원을 살펴보면 미국 원조를 통한 물량화, 산업화를 통한 기업화, 독재정권을 통한 권력화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종교권력을 유지시키고 고착화시키는 지배이념인 근본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가족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회 종교권력의 3가지 기원

1) 미국 원조를 통한 교회 물량화

한국 개신교회를 논할 때 미국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정도로 예배형식이나 복음성가, 예배 분위기, 교회건축, 신학까지도 미국을 모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런 현상이 막연히 미국교회를 동경해서 일어난 현상만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미국교회의 뿌리 깊은 영향력이 지금까지 내재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국이 패전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적용한 종교정책의 3대 기조는 첫째로 정교분리(국가 신도 폐지), 둘째로 종교의 자유, 셋째로 기독교 우대였다. 그러나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 하자면 미국 기독교의 절대적 우대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방 이전부터 조선에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해방이후에는 미국 선교사의 점유율이 월등히 높아지게 된다. 미군정의 힘을 배경으로 대거 입성한 미국 선교사들의 독점적 점유율이 뜻하는 바는 ‘근본주의 신학’과 ‘교파교회의 형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미국에서 조차 극단주의적 근본주의로 배척받던 메이첸파를 비롯해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대부분은 근본주의 신학을 가진 이들이었다.

미군정이 필요로 했던 이들 역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미국유학 출신의 개신교인들이었다. 언더우드 2세, 윔스, 윌리엄스와 그 아들 등 한국에서 활동했던 많은 선교사 혹은 그 아들들이 군정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배민수, 임창영 목사와 황성수, 임병직, 이순용, 유일한, 한영교 등 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이 미군정 관리로 등용되었다. 선교사들과 개신교인들은 미군정에게 가장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또한 해방 후 선교사들이 국가 재건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은 개신교의 권력화를 만든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입지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우위를 점하며 부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국가의 규제력과 특혜 제공 정도가 해방을 계기로 가장 극적으로 역전되었던 사례가 바로 기독교였다.

특히 월남한 북한 개신교인들은 남한 개신교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미군정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남한에 정착한 뒤, 반공을 매개로 군사정권과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일본인 교회(조합교회) 뿐만 아니라 신도와 천리교의 막대한 재산은 대부분 한국 개신교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적산 배분과 관리 업무를 담당하여 영향력을 행사했고 미(美)유학파 한경직, 김재준 목사 등은 미군정에게 적산을 불하받는 특혜를 입었다. 적산에 세워진 신학교만해도 조선신학교(한신대), 장로회신학교(장신대), 고려신학교(고신대), 대한신학교(안양대), 중앙신학교(강남대) 등이 있다. 특히 미군정 시기에 최대 규모의 적산을 접수한 개신교 그룹은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김재준, 한경직 등의 목사들이었다. 조선신학교 측은 군정 당국의 힘을 빌려 전국 215개소의 천리교 교회 가운데 천리교 본부를 비롯한 서울 시내에 있던 40여개소의 교회와 부속 재산을 한꺼번에 접수했다. 그 중 제일 큰 천리교1중앙교회가 지금 영락교회 부지이다. 그 밖에도 교단을 대표하는 경동교회, 향린교회, 주안감리교회, 서대문성결교회 등 수 많은 교회들이 적산 토지나 가옥을 거의 무상으로 양도받아 교회 재산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 적산에 세워진 신학교만해도 조선신학교(한신대), 장로회신학교(장신대), 고려신학교(고신대), 대한신학교(안양대), 중앙신학교(강남대) 등이 있다. 조선신학교 측은 군정 당국의 힘을 빌려 전국 215개소의 천리교 교회 가운데 천리교 본부를 비롯한 서울 시내에 있던 40여개소의 교회와 부속 재산을 한꺼번에 접수했다. 그 중 제일 큰 천리교1중앙교회가 지금 영락교회 부지이다.  

흥미로운 점은 천리교나 일본불교 재산 대부분이 개신교로 환원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신도뿐만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까지도 개신교로 할양해준 것은 개신교회의 적극적인 요구와 타종교 척결에 대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적산 재산을 강제로 빼앗은 행위를 ‘박해 피해자의 권리회복’이나 ‘사교에 대한 승리’라는 논리로 정당화 했다. 개신교회가 이렇게 많은 적산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과 미국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청빈을 신앙의 덕으로 실천하던 목회자들이 해외원조물자의 중개소 역할을 하면서 자본의 단물을 맛보고 순수한 신앙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적 각성과 삶의 윤리적 변화를 추구하던 전통적 부흥운동이 물질적 보상을 축복의 현실적 내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적산 자본 취득을 통해 한국교회는 단박에 거대 종교권력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자본은 권력이 확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기에 한국교회가 물량주의화된 것도 이런 배경에 근거할 수 있다. 자본축적의 방법을 알게 된 한국교회는 그 이후로 이권개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정치권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절대로 교회권력의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통한 교회 기업화

일단 적산 재산으로 자본을 축적하게 된 주류교파의 교회들은 정교유착을 통해 그 몸집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1960년대 말 군사정권에 들어서자 산업화도 급속도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군사정권에서 도입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이 새마을운동의 시초는 조용기 목사가 ‘새마음운동’을 제안한 것에서 시작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하고 곧바로 지도자들을 보내 훈련을 받게 했다. 또한 속회제도를 새마을운동에 접목하여 조직을 완성했다. 마을단위의 반상회와 공동 부역도 교회 조직을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일련의 국가 재건활동은 교회가 일반 대중들에게 이질감이 없도록 만들어 주었다. 쉽게 접근하고 모일 수 있는 공동의 장을 형성하게 해 준 것이다. 교회는 그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장 힘이 있고 거대한 시민조직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민조직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조직된 시민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표면상 국가주도가 아닌 시민으로 구성된 가장 큰 규모의 조직을 말한다.

또한 국가의 농업위주에서 산업중심의 체질변화는 사회지형을 달라지게 만든다. 농업에 종사하던 많은 농민들이 산업자원으로 투입되면서 지방민들의 서울이나 대도시 공단으로의 이주는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농촌사회 속에서 살던 이주민들은 새로운 터전에서 가족중심의 결속을 원했고 교회가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주민이 증가할수록 교회의 성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에서 지역을 넘어 광범위한 대형교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 인원이 넘쳐나면 분립하여 교회를 늘려가는 방식에서 프랜차이즈식 지교회를 설립하여 대형교회가 관리하는 기업구조로 탈바꿈하였다.

목사도 조직화되어 많은 인원을 나누어 관리하고 지도하게 되었고 철저한 수직적 계층화로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의 서열도 고착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능률과 효과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고 보다 효과적이고 수익성이 좋은 사역에 집중하게 된다.

9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 산업화의 흐름이 주춤하고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산업부흥기가 되돌아 올 가능성이 낮아지자 정부는 부동산 정책으로 경제회복을 꾀한다. 신도시를 계획하고 엄청난 양의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하여 건설경기 붐을 조성한다. 그것을 통해 금융, 건설업의 활성화와 부족한 정부재원을 충당하려는 위험한 발상을 택한 것이다.

정부는 매스컴이나 문화매체를 통해 신도시 아파트에서 사는 가정을 가장 보편적이고 행복한 중산층 가정으로 확산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것이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모두 아파트에 살기를 꿈꾸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부동산정책에 발 빠르게 편승한 것도 교회였다. 신도시가 계획되면 어김없이 대형교회들이 종교부지를 분양받아 새로 이주한 신자들을 선점한다. 천주교처럼 단일교파로 지역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시에 우후죽순으로 교회를 세우고 서로 각축을 벌인다.

교회가 부동산 거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주요한 이유는 서로 자신의 교회를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과시욕과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신앙, 목사와 장로들도 교회가 커야 자신의 지위도 커지고 높아질 수 있다는 인간적인 계산 등이 작용하면서 멀쩡한 교회건물을 놔두고 크고 웅장한 교회를 지으려는 교회 재건축 시도가 개신교 안에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것과 같다.

   
▲ 기업화된 교회의 구조는 세습을 더욱 부추긴다. 교회 간의 연대는 사라지고 서로 경쟁적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교회는 더 이상 공공성을 가진 영역이 아닌 사유화된 자본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식이 팽배하면 할수록 교회를 재산 상속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화된 교회 역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장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렸다. 수많은 교회들이 서로의 장점을 내세워 경쟁하고 흥정을 한다. 신자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회를 선택하여 소비하면 그만이다. 목회자들은 아무리 바른 신학을 배우고 익혔다 할지라도 시장경제에 취향을 맞추지 못하면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본인이 경영자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새로운 트렌드를 익히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의 동질화’라고 부른다.

기업화된 교회의 구조는 세습을 더욱 부추긴다. 교회 간의 연대는 사라지고 서로 경쟁적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교회는 더 이상 공공성을 가진 영역이 아닌 사유화된 자본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식이 팽배하면 할수록 교회를 재산 상속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사라지고 물적, 양적 자원만을 중시하며 체제이양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키려는 욕망이 세습이라는 잘못된 방법을 만들어 냈다. 교회를 수익사업이라 여기고 경쟁하여 살아남아야한다는 그릇된 부담감이 한국교회에 일반화된 현상이라면 세습은 계속해서 지속될 수밖에 없다.

3) 독재정권의 순응을 통한 교회 권력화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국가로 만들고자 했고 개신교회와 신자들은 권력자와의 과도한 일체화와 정치권력과의 긴밀한 유착으로 치달았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온갖 영예를 누렸고, 신자들에게도 교회는 기회와 특권을 누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각인되며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개신교는 1945년 당시 10~15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남한 지역 신자 수가 이승만 집권 후 1950년경에는 50만 명을 넘어섰고,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급성장했다.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진 12년 세월은 이승만 정부 붕괴 후 25년도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한국 최대의 지배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의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 여수, 순천 및 지리산 일원의 무력충돌 사태에 대해서도 개신교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특히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이 앞장섰다. 제주 4.3사건이 벌어지자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작전을 펼쳤다.

제주사건과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개신교회는 좌익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했으며 적대성이 극대화되었다. 이로 인해 개신교는 자연스럽게 “반공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교회에서는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선과 악의 결사항쟁을 부각시켰다.

개신교의 반공 이미지는 월남자들이 북한에서 쇄도함에 따라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굳어졌다. ‘반공 개신교’ 이미지는 한국을 세계적 반공투쟁의 전초기지로 재편하려는 미국이나 이승만 정부의 구상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신설된 2,000개의 교회 중 거의 90%가 월남 기독교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뿐 아니라 월남한 목회자들이 한국의 거의 모든 교파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고 오늘날까지 교계의 원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4.19로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던 이승만 정권이 물러났지만 교회는 주인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권력의 지배에 순응하고 지금까지 누리던 특혜를 유지할 수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미국의 지지를 받기위해 한경직, 김활란, 김장환 목사를 민간사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했다. 특히 김장환 목사는 미국 전역을 수차례 방문하며 반유신 여론을 무마하기위한 설교와 강연을 했다. 반대 여론이 높았던 베트남 파병 문제에 파병군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의 십자군’으로 묘사하며 파병 찬성 입장과 함께 대대적인 환송예배를 드렸다.

독재정권의 충성과 협조에 대한 선물도 얻게 되었다. 군사정권의 지원과 협조를 통해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와 1974년 엑스플로 기독교 세계복음화대회, 1980년 세계복음화 대성회와 같은 대규모 집회를 연달아 개최했다. 이러한 부흥회를 위해 국가 행사 외에는 빌려주지 않던 여의도광장을 무상으로 제공받았고 군 공병대와 군악대까지 지원받았다. 특별히 빌리그레엄 전도집회는 5월 16일에 시작되었고 그 당시 여의도광장은 5.16광장으로 불려졌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직후 8월 6일과 9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주류 교회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군사독재가 해가 갈수록 더해가자 일부 진보 기독교세력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류 교회들은 진보세력을 좌익으로 몰아세우며 반공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이들의 배후에는 군사독재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권력과 교회의 밀월관계는 2000년대에 들어 깨지게 된다. 김대중 정권초기부터 공중파 방송들이 그동안 성역으로 간주되어왔던 목사들의 비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0년 MBC PD수첩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를 방송하며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광림교회 등 대형교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쳤으며 이 때 처음으로 교회세습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 2012년 9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세습을 지지하는 설교문을 <조선일보> 전면 광고로 발표했다.

교회세습은 뜨거운 감자였다. 치외법권이라 생각했던 교회세습을 언론에서 제기하자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보수 개신교는 정권이 개입하는 의도된 정치보복으로 주장하고 김대중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하여 다시 반공주의로 맞대응을 시작하게 된다. 개신교가 노무현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는 개신교의 재산권을 흔드는 사립학교법 개정 때문이었다. 이 법은 세습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민주화 이후 진보세력의 상징이었던 집회가 보수 개신교로 뒤바뀌어 시국집회가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 사학법 개정, 반미 정권 타도, 이슬람세력 척결, 동성애관련 법안 폐지 등이 그 예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개신교인인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한국 개신교회의 다수가 적극 협력했다. 유명세가 있는 대형교회들은 아예 앞장서서 정권창출의 주체 가운데 하나로 나섰다. 장로 출신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적극 지지했다. 이른바 “기독교 정권론”이었다.

이명박 정권시절 권력–자본–교회의 관계는 절정을 이룬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회는 제대로 발언한 바 없으며 사회적 양극화나 남북관계의 파탄에 대해 정치적 대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명박 정부 이후 여당의 후보로 나선 박근혜 후보가 선거기간 내내 무속과 이단종교와의 석연치 않은 의혹이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개신교회는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대변해주며 지지했다.

2016년 최태민 목사의 딸인 최순실을 비롯한 박근혜의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밝혀지자 몇몇 대형교회들은 비난하기보다 ‘죄 있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논리로 비호했다. 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권은 대형교회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보수적 개신교 목사들의 영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 목사는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 갈릴리교회의 인명진 목사는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되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집회’란 시위를 주도적으로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회 종교권력의 4가지 지배이념

손봉호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중요한 이유를 ‘성장 제일주의’, ‘내 교회의 우상화’,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기복신앙’과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번영신학’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기복적 근본주의, 이기적 개교회주의, 유교적 가족주의, 외적 성장주의가 교회를 타락하게 만든 주된 이유라고 지적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 4가지 지배 이념을 근간으로 종교권력을 구축해 왔다.   

1)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땅에 전파되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대부분이 근본주의적 신학배경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회와 신학교육을 통해, 근본주의적 성경관 및 종말론이 한국 개신교회 내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우월의식이 강했고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시키는 선구자로 생각했다. 교단의 자치권을 거부하고 교단정치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관여하였다.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한국 목회자들에게 이양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녀에게 세습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교사들은 근본주의 신학에 반하는 생각과 신학사상에 대해서 즉시 종교재판을 통해 파면해버렸다. 사실 교단분열의 핵은 목사들의 배후에 있던 선교사들이었다.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받고 있었던 한국의 목사들은 선교사들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선교사의 꼭두각시로 복종해야 그나마 미국의 원조를 풍족히 누릴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유교적 수직구조를 너무나 잘 이용하였다. 양반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문화에 선교사들은 특권계층으로 자리매김을 하고자 했다. 이러한 서열화된 구조가 고스란히 한국교회의 서열화를 야기 시켰다. 또한 교회 내의 여성(女性)차별문화 역시 근본주의의 대표적 현상이다. 지금도 여전히 권위관계에 있어 여성은 철저하게 교회의 공식적인 권력구조 밖에 있다.

근본주의적인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들의 주도로 신학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어 교회를 지도해 감에 따라 한국 개신교의 신념체계는 근본주의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다.

한국 개신교회의 근본주의의 또 다른 이유는 서북지역 기독교인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근본주의를 말할 수 있다. 해방 전까지 기독교인구의 70%를 차지하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공산통치 하에 기독교탄압을 받고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 기독교인들의 반공사상과 보수신앙이 결합되면서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구조화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의 가치 기준은 오직 성서이며 성서를 전하는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말씀을 강조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자연스럽게 권력의 정점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심판자의 역할을 대변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나아가 축복과 저주의 권한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특성은 목사중심의 권력편중 현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목사가 선악을 판별하는 척도인 성경을 전하는 권리를 지니고 있으니 교회 내에서 목사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처럼 인식시킨다.

한국 개신교회의 근본주의적 성향은 윤리적 차원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극단적 청교도 사상의 엄격한 윤리적 이상을 이어받은 미국의 근본주의는 음주와 흡연에 대한 배타적 거부감, 성과 결혼에 대한 보수적 규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 등을 강조해 왔다. 이런 보수적 윤리의식은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동일하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근본주의는 분열이라는 결과를 양산하고 말았다. 장로교의 분열을 비롯하여, 성결교의 분열과 그리스도교 연합을 막아버린 것 역시 근본주의의 산물이다. 이러한 분열의 모습은 고스란히 교회 안으로 흡수되었다.

근본주의자에게 있어서 타협과 양보는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기에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거나 논의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성서적이라는 명목 하에 권력을 휘두른다. 여기서 성서적이라는 것의 위험성은 얼마든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데 있다. 근본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권’이다. 그런데 이 절대권이 하나님의 절대권이 아닌 목사의 절대권으로 변질되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의 교회세습을 위한 과정에서 세습을 성서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모든 교인이 원하는 일이라고 변명하지만 반대하는 입장은 철저하게 적이며 사탄의 꾐에 빠진 악한 세력으로 정죄당하고 만다.

이원규는 이것을 ‘진리의 독점’현상이라고 규정한다. 오직 자신만이 진리의 수호자인양 목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일방적으로 의견몰이를 하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라고 선전하는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세습을 하는 교회의 강단에서는 세습이 가장 성서적이고 은혜로운 후임자 선정이라며 반복적으로 세뇌하듯 설교한다.

또한 근본주의의 심각한 폐단은 모든 신앙을 내재화 시키는 것에 있다. 신앙의 내재화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신앙의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교회나 사회의 불의함에 맞서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하고 신앙을 개인화, 파편화시킨다. 더불어 근본주의의 극단적 재림신앙은 현실 도피적 신앙 양태를 만들어 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나 민주화 운동을 ‘용공’이나 ‘비신앙적인’ 것으로 정죄하고 왜곡된 독재 권력의 폭압에 침묵하거나 그들의 통치에 호응하는 정교 유착의 오류를 범하였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 헌금, 전도가 믿음의 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며 교회 밖의 모든 일들은 사적이고 부차적인 것들로 치부된다. 오직 교회생활만을 강조하다보니 ‘교회 밖에서 어떻게 살던지 교회생활만 잘하면 된다’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해졌다.

한국 개신교회의 특성을 논할 때 거의 대부분의 기성교회가 근본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근본주의 영향 아래에서 교회가 건강한 구조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2) 개교회주의

노치준은 개교회주의를 정의하며 “교회가 그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내의 인적, 물적 자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개별교회 내부의 문제 특별히 개별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 또는 방침”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기교회 우선주의나 자기교회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개교회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교회로서의 공공성을 훼손시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들어왔으며 처음부터 다른 종교와의 경쟁이 불가피했고 타종교뿐만 아니라 교단끼리의 경쟁도 격화된 만큼 빠르게 분열되었다. 교회 분열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성장 경쟁이 격화되자 교단 구속력은 약해졌고, 개별 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뒷전으로 밀렸다. 오직 개별 교회의 생존과 번영만이 중요해졌고 분열과 경쟁을 반복하면서 개별교회는 스스로 생존하고 알아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양육강식의 생태계가 형성된 한국교회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로지 자신의 교회에 집중하는 고립된 섬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개교회주의가 한국교회에 만연하게 된 배경을 노치준은 5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한국교회의 교회강조정책이었다. 1893년 제1회 선교사공의회에서 결정된 ‘10개조 선교정책’을 세웠는데 이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근간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선교정책 10개 조항 가운데 7번째인 “자급자치의 교회를 만든다”는 조항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교회가 자급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모든 자원을 개별교회의 유지를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일제강점기가 교회 지향적인 신앙형성의 토양이 되었다고 본다. 교회가 사회적인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면 정치권력과 충돌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교회확장과 신자확보에 주로 관심을 쏟던 선교사들은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결의했으며 더불어 3.1운동의 독립실패로 인한 한계 인식은 교회 지향적 신앙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교회지향적 신념체계는 개인의 구원과 내세에 집중하게하고 교회와 결부되어 개교회주의를 낳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셋째로, 한국교회의 고립된 활동영역이다. 교회에 대한 개념을 이원논리로 외부세계를 부정하거나 단절하고 교회를 하나의 도피성 또는 구원을 얻기 위한 노아의 방주처럼 여기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신자들의 종교활동의 영역은 교회 안으로 축소되어 교회지향적 성격을 띄게 된다.

넷째로, 유교적 가족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자신이 속한 교회를 하나의 가족단위처럼 이해하고, 가족주의의 폐쇄적인 전통의 영향을 받아 내 교회는 철저히 용납하고 반대로 타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심한 경우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한다.

다섯째로, 한국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지도자들의 공명심이 개교회주의 형성을 부추기게 되었다. 신자가 많은 큰 교회의 목사는 교회에서 상당한 대우를 누리는 동시에 교단 내에서의 지위와 권력이 증대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목사들은 큰 교회의 목사가 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되고 모든 자원을 우선적으로 교회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어 개교회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노치준이 말하는 개교회주의의 다섯 가지 배경이라면 2000년대 이후에 발생한 개교회주의의 원인을 추가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섯째로, 미자립교회의 필연적 개교회주의이다.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이 미자립교회이며 개척교회의 대다수가 미자립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미자립교회는 갈수록 고립화되어가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개교회의 유지와 생존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로, 교단 영향력의 약화이다. 한국교회는 갈등과 분열로 수많은 교단이 난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단의 영향력은 당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교단보다는 교회가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자연스럽게 개교회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개신교는 가톨릭과 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염격한 위계에 근거한 교회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가 어렵고 교회와 교회 간 횡적 연결의 힘이 약하다. 실질적인 결정권은 목사와 장로들로 이루어진 개교회에 모든 권한이 있다. 특히 목사의 인사권이 교회에 있기에 목사 역시 교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이웃교회”라는 지적처럼 개교회주의는 교회 간의 무한 경쟁과 갈등으로 공교회성을 무너뜨렸다. 교회 내부의 결속력이 강화될수록 외부와의 관계는 점점 단절되고 그로인해 외부에서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시선도 부정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개교회주의가 만연하게 될수록 교회는 더욱 권력에 집중하게 된다. 그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내부적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물리적 구속력이 없는 조직이기 때문에 내부결집을 강력하게 하기위해서는 교회 내의 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럴수록 교회는 사회문제보다는 개인적, 영적문제에 더욱 치중하게 하고 개교회 안에서 활동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결국 신자들 삶의 기준과 결정을 교회가 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교회주의는 한국 개신교회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개교회주의는 원리적으로 팽창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적, 물적 자원의 사용에 있어서 교회 내부의 문제에 최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집단자체의 힘이 강화된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이웃교회”라는 지적처럼 개교회주의는 교회 간의 무한 경쟁과 갈등으로 공교회성을 무너뜨렸다. 교회 내부의 결속력이 강화될수록 외부와의 관계는 점점 단절되고 그로인해 외부에서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시선도 부정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다고해도 새로운 자원이 유입되지 않으면 곧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3) 양적 성장주의

양적 성장주의의 결과물인 대형교회가 등장하게 된 시점은 한국의 산업화물결과 결을 같이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고 건설과 산업에 총력을 기울일 때, 교회도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가기 시작했고, 교회의 대형화는 모든 교회들의 공통 목표가 되었다. 산업화는 생산증대를 가져오고, 생산력 증가는 바로 대형화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대규모의 아파트단지, 고층빌딩, 대형극장, 대형쇼핑몰, 대형놀이동산 등이 건설되며 교회 역시 대형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외형적인 차이가 나자 점점 교회 간의 격차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모두가 한 지체라고 여겼던 교회론이 사라지고 교회의 규모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게 되었다. 더불어 교회성장학이 신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가 될 정도로 공격적이고 광범위한 교회성장이 바람직한 교회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다. 그럴수록 교회들은 서로 경쟁하듯 치열하게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했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교회들은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당면한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선교범위가 지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교회가 마을단위의 지역성을 띄고 있었으나 교통의 발달로 접근성이 용이해진 현대에는 지역을 넘어 광역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대형교회는 위치한 지역만을 국한시키지 않고 주변지역을 포섭하고 심지어 위성방송과 지(枝)교회를 설립하여 전국단위의 교회로 교세를 확장시켰다. 아이러니한 현상은 대형교회들이 지역교회를 넘어서 스스로 공교회가 되기를 꾀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가 그러했듯이 광대한 지역을 교구로 나누고 교구별로 교구장을 세운 다음,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이를 관리한다. 각각의 대형교회가 하나의 작은 가톨릭교회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모교회가 지교회를 지배하는 힘은 한국교회에서 더욱 강력하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경우 모교회는 바티칸이 되고 지교회는 지역교회에 해당하며, 모교회 목사는 교황과 유사하게 행동한다.

이 같은 역전현상은 개교회로 분열된 교회가 개교회 이상의 초(超)교회를 꿈꾸고 이를 실현해나가는 것에 있다. 지역교회를 넘어 초(超)지역교회를 추구하는 태도는 스스로 공교회를 구현하려는 오만함이다. 공교회의 일원으로 이웃 교회와 함께 한 몸 그리스도로 연합하는 대신, 자신의 영역을 이웃 교회의 지경까지 넓히려는 것이다. 초지역교회는 이웃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 교회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그들을 무시하고 위태롭게 만들면서까지 스스로를 자기를 완결체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보인다. 초지역교회는 공교회성을 완전히 망각하여 이웃 교회의 사역을 믿지 못하고, 자기 교회 사역만을 유일하게 참된 사역으로 여기며, 자기 교회의 확장만이 참된 선교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교회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초대형교회가 등장하게 되었고 규모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경쟁이 초래한 마지막 결과는 교회 생태계 파괴이다. 끝 모를 경쟁 아래에서 극소수 대형교회들이 이뤄낸 연이은 승리와 독점적 성장은 중소형교회들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교회들 간의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는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오늘날 경제 상황과 유사하다. 이런 양극화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태계와 정반대 방향으로 교회 질서를 재편한다.

대형화 추구현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론 대형교회가 무조건 부정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의 저변확대나 다양한 문화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면에서 그 역할은 긍정적일 수 있다. 또한 개인 사생활을 중시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고 교인들 역시 익명성이 보장된 대형교회를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대형화된다는 것은 물적, 인적 자원이 확대되고 그에 따른 영향력도 증가됨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형교회가 획득할 수 있는 지위와 위치가 상승되며 그로인해 교회 지도자는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는 유명스타가 되고 존경과 명예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면을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는데 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 가치를 목회자의 최고의 선으로 삼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4) 가족주의

‘가족적’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표방하는 것이 ‘가족적인 신앙 공동체’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가족’이라는 단어에는 위계적이며 가부장적 지배권력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가족구성은 평등구조가 아닌 수직적 위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인 아버지와 대를 이을 장남으로 가족의 위계는 이어진다. 유교적 생활 관습에 의한 소위 ‘가족주의’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여 그대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가족주의적 가치가 견고한 것은 수차례의 외세의 침입과 더불어 내란을 거치면서 자기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가족 중심주의는 곧 부정부패의 문제로 이어진다. 부정부패는 사회적 신뢰수준이 낮은 상황, 곧 거래비용이 높게 발생하는 사회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개신교는 서구의 기본이념인 개인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국에 유입되면서 개인주의 근본이념이 한국의 가족주의 종교문화에 굴복하게 되었느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기본 이념보다도 가족주의 문화가 훨씬 강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동춘은 “교회와 재벌기업의 지배 구조적 유사성을 언급하며 가족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결합된 한국 특유의 종교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한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들은 교회에서 새로운 가족을 발견했으며, 교회는 가족 없는 사회에 가족을 제공했다. 가족주의적 한국교회는 고향을 등진 이들에게 ‘유사 가족’이라는 매우 중요한 장을 제공했다. 교회 안에서 가족주의의 대표적 현상은 직분제도이다. 교회직분은 신분으로 인식되어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계층을 구분하고 대부분의 교회 중직은 남성으로 구성한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으로 모시며 ‘영적 아버지’, ‘믿음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한다.

   
▲ 가족주의는 상속제도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 상속 제도를 통한 가족주의의 권력이양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권력 세습’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적 가족주의 아래에서 자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순리적 절차이다. … 왜곡된 가족주의에 익숙한 대부분의 교인들 역시 교회세습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와 아들 김하나 새노래명성교회 목사. 지난 3월 명성교회는 공동의회를 통해 두 교회의 합병과 아들의 청빙을 투표로 통과시켜 '변칙 세습'이 가능하게 됐다. 사진: 새노래명성교회 홈페이지)


이러한 구조 하에서 목사는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가부장제의 수호자로 행세한다. 이때부터 목사는 특별한 존재인 신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가장으로 행사한다. 민주적인 과정과 절차 없이, 스스로 결정과 판단을 내리고 교인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한국의 가족주의에서 가장은 복종과 섬김의 대상이 된다. 가장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가족주의가 교회 안에 팽배할수록 목사는 자신의 지배권력을 남용하게 된다. 교인들은 가장에게 예속된 자녀들이기에 아버지에게 반하는 모든 행동은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교회 질서가 아닌 교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교의 산물이다. 목사는 교인들의 아버지가 아니며 지배자도 아니다.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익숙한 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위계적 질서로 구성된 교회구조에 쉽게 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부정과 부패에도 쉽사리 반발하지 못하고 감추고 덮기에 급급하게 된다.

또한 가족주의는 한국 특유의 우리주의라는 집단 이기주의와 맞물려 나타난다. 울타리 안에 내부인은 우리로 외부인은 남으로 철저하게 구분한다. 우리주의와 가족주의는 특유의 상호 의존 공동체성을 만들어낸다. 한국교회가 초기에 성공적으로 토착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지역사회에서 서로 의존할 수 있는 확대 가족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가족주의와 교회세습과 밀접한 연관성을 찾아보면 가족주의는 상속제도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 문화를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물질적 이해관계는 바로 상속제도였다. 제사상속, 재산상속, 호주상속 등으로 나누어지는 상속 제도를 통해서 가족주의는 지속되었다. 상속 제도를 통한 가족주의의 권력이양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권력 세습’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적 가족주의 아래에서 자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순리적 절차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영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은 혈통세습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왜곡된 가족주의에 익숙한 대부분의 교인들 역시 교회세습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아버지의 권한을 장손인 아들이 물려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긴다. 거기에 더하여 가족주의는 온정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가족 밖의 무리에게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나 가족 간에는 어떠한 것도 용납되고 수용되는 것은 가족주의의 병폐현상이다. 온정주의로 인해 담임목사에 대한 애정이 그 자녀에게까지 범위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영적인 아버지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일평생 헌신한 노고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자녀가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담임목사에 대한 온정적인 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세습교회들은 그 자녀가 뛰어나서라기보다 아버지를 봐서 세습을 용인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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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훈
<한국 개신교회의 종교권력과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적 고찰>(성공회대학교, 2017)로, 교회 세습을 주제로 다룬 최초의 박사 논문을 썼다. 한신대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협성대 신대원을 졸업해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농촌과 섬마을 작은 교회에서부터 대도시와 신도시 교회에서 두루 사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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