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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진리와 드러난 진리 사이에서
[342호 무브먼트 투게더 : 베리타스포럼] 한국 대학과 베리타스포럼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1:39:25 조미원 goscon@goscon.co.kr
   
▲ 구스타프 크림트(Gustav Klimt)의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

1. ‘베리타스’와 ‘누다 베리타스’: 진리에 대한 욕망과 베리타스포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활동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그린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1899)라는 그림이 있다. 누다 베리타스는 벌거벗은 진리의 여신이다. 라틴어 베리타스(Verita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진리의 여신’의 이름이다. 이 진리의 여신 베리타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헬라어 ‘알레테이아’(Aletheia)로 불리는데, 숨겨지고 감춰진 것을 밝히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와 빛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으며, 종종 함께 사용된다. 베리타스는 사투르누스와 비르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흰옷을 입고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리타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를 본 사람은 없다. 이 숨어 있는 진리, 감추어진 진리가 클림트에 의해 〈누다 베리타스〉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진리와 진실의 여신, 거울을 들고 있는 순결한 처녀인 베리타스, 그 발밑에서 꿈틀대는 뱀이 매혹적인 베리타스를 보고자 하는 욕망, 베리타스에 대한 치명적 유혹을 관능적이고 몽환적으로 그려낸 클림트의 놀라운 발상과 회화적 감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베리타스와 〈누다 베리타스〉, 숨어 있는 진리와 벌거벗은 진리, 숨은 진리와 드러난 진리, 이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왕래하는 운동 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를 발견하여 계시된 진리를 마주하려는 노력, 즉 진리를 진리로 보게 하는 변증의 장이 베리타스포럼이다. 

1992년 하버드 신학교 학생 켈리 먼로 컬버그(Kelly Monroe Kullberg)의 제안에 의해 시작된 베리타스포럼은 대학의 존재 목적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대학 캠퍼스에서 전개된 기독 지성 운동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대학들의 교훈과 로고 속에 등장하는 ‘베리타스’라는 단어는 대학이 본래 진리를 탐구하는 곳임을 나타낸다. 특히 베리타스포럼이 처음 시작된 하버드 대학의 경우, 애초에 기독교와 성서적 관점에 입각하여 학문을 연마하는 신학교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설립자 켈리는 깊이 인식하였다. 그는 구성원들의 지나친 경쟁과 고도의 물질만능주의, 허무주의, 실용주의가 팽배한 당시 미국 대학의 현실을 목도했다. 진리 추구를 가로막는 이러한 장애물들은 오늘날 한국 대학의 현실과 오버랩된다.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다양한 사상의 혼재 속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으나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혼돈의 상황에 있다. 생명력을 상실한 객관 지상주의, 책임감을 결여한 상대주의 속에서 대학은 취업 사관학교로 전락했고, 대학의 기독인들은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해 ‘진리’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돌파구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 직면했다. 한국의 대학도 진리를 복원하기 위하여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정직하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베리타스포럼은 진리, 무신론, 다원주의, 과학, 영성, 정의, 젠더, 성공, 빈곤, 환경, 예술, 심지어 최근에는 미투(Me too)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인생의 모든 문제와 질문들이 기독교적 관점과 성서적 관점에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진리를 잃어버린 시대, 대학에서 어떻게 진리를 이야기할 것인가? 복음이 어떻게 대학을 변화시킬 것인가? 진리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베리타스포럼을 탄생시켰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2. 거울과 뱀: 반지성주의와의 대결
다시 〈누다 베리타스〉로 돌아가 보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그림 속의 뱀과 거울을 날카로운 이성과 지성, 성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30여 년간 북미와 유럽의 대학을 중심으로 2천 번 이상 열린 베리타스포럼 운동이 아시아에서는 한국 고려대에서 2018년 5월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실제로 포럼이 열리기까지는 헌신된 교수들의 수고와 열정, 베리타스 글로벌 본부와의 예비된 만남의 타이밍과 인연들이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한국 기독 지성 사회에 베리타스포럼과 같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 신념,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지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기독 지성 운동을 통해 한국 기독교에 만연한 일방적이고 무례한 선교 방식, 그런 문제를 야기시키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와 대결해야 함을 포럼 추천인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뜨거운 신앙과 냉철한 이성이 조화된 담론을 통해 기독 지성의 열패감이 극복되리라는 기대도 있었고, 우리 시대에 고민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솔직하게 질문하고 솔직하게 답변할 수 있는 장이 바로 베리타스포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나아가 학문적 차원에서 지성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갖는 교집합을 찾아서 서로 번역하고 치환하면서 소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며, 협소한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학문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일반 은총을 통해 학문의 세계에 계시하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가운데 김회권 교수(숭실대)는 전반적으로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기독교가 귀납적이고 단계적인 통찰을 통해 신앙을 갖기보다는, 지성적인 기초가 약한 부흥회와 같은 극적 경험이 강조되면서 반지성적 모습을 갖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진리 추구를 위하여 대학과 교회, 학문과 신앙, 이성과 믿음의 영역 사이에 쌍방향의 소통과 번역이 이루어져야 하며, 베리타스포럼이 기독교의 호교론적(護敎論的) 진리 경쟁의 전쟁터가 아니라 인류의 공익을 고민하는 공공성을 담보한 장이 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지금은 진짜 큰 사상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말 전환점이 되는 사상이 필요합니다.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각성시키는 사상과 담론이 필요하지 소소한 문제들 아무리 해봐도 안 됩니다. … 경영학은 기층민중의 아우성을 막아야 하고, 사회학은 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정치학은 정치 참여의 주체성을 재고해야 하고, 생물학은 생물의 존엄을 고양해야 하고, 동물학은 동물의 동물권을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학문이 전부 다 공익성을 가지고 있지요. 공익의 이름으로 학문을 하라고 그러는 것이죠. 핵물리학자들은 핵발전소를 가지고 영구적으로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인류의 미래를 연구해야 되겠죠. 핵물리학자는 핵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학문이 되어야겠죠.”

기독교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가치가 있음을 기억하고, 이러한 공공성과 보편성의 학문을 하기 위하여 한편에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날카로운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겸손과 성찰의 기독 학자를 발굴하고 세워야 하는 과제가 베리타스포럼에 주어져 있다. 

   
▲ 사진: 베리타스포럼 제공

3. 신앙과 지성의 언어가 교차하는 플랫폼: 한국적 베리타스포럼의 구축을 위하여
2018년 5월 23-24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첫 번째 베리타스포럼에서는 해외 강연자로 《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 박사, 한국 강연자로 강영안 교수와 우종학 교수를 초청하였다. 500여 명에 육박하는 많은 청중이 참여하여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국 대학에서 기독 학자들이 타 종교와 사상을 가진 이들과 합리적이고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대화하며 기독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준 귀한 경험이었다. 포럼 전후의 설문지를 갖고 청중들의 성향, 종교, 관심 분야 등을 분석하고 통계를 내보니, 청중들 중에는 과거엔 교회를 다녔으나 현재는 냉담한,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강연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려는 구도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과 열린 대화를 할 수 있는 마당이 바로 베리타스포럼이 되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한국에서 베리타스포럼과 같은 지적 변증의 장, 신앙과 지성의 언어가 교차하는 플랫폼으로서의 베리타스포럼의 실험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한국적 베리타스포럼 구축을 위한 몇 가지 비전을 제시해본다.

첫째, 베리타스포럼은 출발이 그러했듯이 대학 내의 기독 지성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신학대학 혹은 일반 대학 내의 기독교 관련 학과나 선교단체에서 이루어지던 개별화된 기독 담론의 장을 대학 내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 학문 분야로 확산시켜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와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 신앙과 관점을 가지고 창의적이고 열린 자세로 학문 세계와 대학 사회에 기여할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데 베리타스포럼이 그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한다.

둘째, 철저한 지적·학문적 기독교 변증 운동이 되어야 한다. 모든 학문과 이론에 대한 기독교적, 성서적 시각을 제시하되, 비기독교인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지성적, 합리적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로써 포럼을 기반으로 대학 내 진리 추구와 관련한 지적·학문적 분위기와 담론을 확산하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셋째, 지역사회 기독 청년들의 연합을 도모한다. 대학 구성원과 주변 지역 기관이나 교회 가운데 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협력함으로써 학교와 대학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신앙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 절실하다. 개별 교회 중심이나 개별 선교단체 중심의 기독교적 시각과 활동 범위를 넘어서 학문과 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연합과 동역 모델을 지향하고자 한다.

넷째, 한국 및 동아시아 기독 지성 운동의 활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미국 베리타스포럼의 모델과 경험을 계승하면서도, 한국 사회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한 기독 학문적 시야를 폭넓게 제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한국 사회와 대학의 필요를 찾아가면서 한국이 처한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향후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 기독 지성과의 협력이 요청된다.

올해 5월 28일에 두 번째로 고려대에서 열리는 베리타스포럼 강연자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습관이 영성이다》 등의 저서로 우리에게 알려진 캘빈 칼리지의 제임스 스미스 교수(James K.A. Smith)다. 스미스 교수는 오늘날 기독교 진영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독교 철학자로서 ‘예전’(禮典)이라는 관점으로 인간, 문화, 교회를 바라보면서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가 한편에서는 기존의 주지주의적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반성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끌어안으면서, 어떻게 ‘형성’(formation) 이론과 ‘몸’ ‘예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지 자못 기대된다. 한국 기독 지성 사회의 큰 관심과 응원을 기대하며 여러분 모두를 초청한다.

 

조미원
연세대 중문과에서 중국고전문학을 공부하였고, 현재 대학에서 중국 신화, 중국 대중문화, 중국고전소설 등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성서를 인문학의 시각에서 연구하는 ‘인성모’ 회원이며, 동서양 교류의 관점에서 명청 시기 중국에 온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의 한문 문헌을 연구하는 동서그리스도교문헌연구소(동문연)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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