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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았던 질문, 평화신학
[344호 커버스토리] 나를 평화신학으로 이끈 만남 이야기
[344호] 2019년 07월 01일 (월) 15:59:20 김성한 goscon@goscon.co.kr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성경신학대학원(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AMBS) 총장인 사라 웽어 쉥크는 2019년 5월 서울에서 “Anabaptist Ways of Knowing”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신학 강연을 했다. 그는 신학교육의 기초가 되는 가르침과 배움의 질문을 다루는 이 강연에서 “그 누구도 예수를 삶 가운데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를 참으로 알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16세기 재세례파 신학자 한스 뎅크(Hans Denck, 1495-1527)의 모토를 인용했다.

한스 뎅크라니?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렇다면 한스 뎅크만큼이나 낯설, 16세기 급진적 종교개혁가들에게 뿌리를 둔 메노나이트 평화신학을 이야기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내게 메노나이트의 평화신학은 쉥크가 강연에서 다루었듯이 전통, 영성, 공동체, 몸, 직관, 이성, 윤리, 실천의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알아가는’(knowing) 과정이었다. 이제 나를 평화신학으로 이끈 만남들과 그들을 통해 보고 듣고 접한 메노나이트 평화신학을 얘기해보려 한다. 

1. 크리스와 로라 :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습니까?”
1996년 가을이었다. 크리스(Chris Mullet Koop)와 로라(Laura Mullet Koop)는 캐나다에서 온 20대의 메노나이트 부부로 춘천 IVF 모임에서 영어성경공부 모임을 돕고 있었다. 9월의 어느 날 간사 모임을 마치고 닭갈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긴급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강릉 바닷가에 북한 잠수함이 좌초되었고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잠수함을 탈출해서 육지로 상륙했던 것이다.

크리스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짧은 영어였지만 긴급속보가 전하는 내용의 심각성은 크리스에게도 전달되었다. 크리스가 다시 물었다. “성한,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역하고 2년차였던 나는 아직 동원예비군에 편성되어 있었다. “만약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게 되면 나는 전시 동원이 되어서 다시 군인 신분이 되고 아마 전투에 배치되겠죠.” 그러자 크리스는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크리스는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캐나다에서 와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지금 뉴스에서 보는 것 같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있는 이곳에서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나의 대답은 옳은 것이었을까? 평안북도에서 월남한 부모님을 둔 나에게 기독교 신앙과 반공주의는 분리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에 충성하는 데는 조건이 없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국가의 권위 아래에서만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춘천의 닭갈비 식당에서 크리스는 질문의 씨앗을 내게 남겨놓았다. ‘누군가를 해치는 일에 가담할 수 있는가?’ ‘나의 양심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왜 나는 신앙 안에서 이런 고민을 해보지 못했을까?’

“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성 밖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세속 정부에) 허락하신 것이다. 그것은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죽이는 데 사용하지만 선한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칼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고 죽일 수 있도록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으며 세속 정부들 역시 똑같은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들을 훈계하고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살인하지 말고, 단순히 경고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 것을 말하며 대신 출교시킨다.”
―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527년  

2. 마티 : “지금 미국은 복수를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2000년, 퀘이커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조지 폭스(George Fox)의 이름을 가진 미국의 변두리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양한 전통과 교단 배경을 가진 학생과 교수진의 구성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목사의 아들’로 자란 나에게 합동과 통합 너머로 2,000년 교회의 역사가 빚어낸 다른 유니버스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특별히 교회사 과목들은 놀라운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교재로 사용된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연구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이 펼쳐졌던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도왔고, 훗날 알란 크라이더(Alan Kreider) 같은 선생님을 만나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지녔던 ‘평화교회’의 특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 국가)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었다.

2001년 9월 첫째 주 목요일은 미국교회사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같은 주간의 화요일인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불타며 무너져내렸다. 텔레비전의 모든 채널은 온종일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는 내가 살고 있던 작은 동네의 모든 교회에서 열리는 특별 기도회를 알리는 자막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9.11 테러 사건은 미국교회사를 수강하는 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미국의 건국이념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중요한 가치로 밝히고 있고,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종교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듯 보였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시민종교(civic religion)였다.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아프카니스탄 침공이 이야기되고,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대다수 교회는 미국의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했다.

신학교 학생들 역시 미국이 준비하는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메노나이트인 마티(Marty Troyer)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마티는 ‘미국이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전 세계의 이웃들에게 행한 잘못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기회’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로 인해 슬퍼했지만, 미국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도 역시 슬퍼하고 있었다. 적어도 마티에게는 ‘정당한 전쟁’, 혹은 ‘정의로운 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상황은 마티가 걱정했던 폭력의 악순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샬롬을 추구합니다. 예수의 영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힘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 폭력을 버리고 원수를 사랑하며 정의를 구하며 필요 가운데 있는 이들과 우리의 소유를 나누게 됩니다.” ― <우리가 함께 믿는 것>, 2003년

   
▲ 메이블 할머니. (이하 사진 제공: 김성한)

3. 메이블 : “깨어진 세상에서 나도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2004년 학교를 옮겨 또 다른 변두리 신학교인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주말에 열리는 작은 콘퍼런스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셨다. “너 혹시 한국 사람이니?”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메이블(Mable Brunk) 할머니는 자신이 젊었을 때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고는 우리 가족을 자신이 살고 있는 양로원의 아파트로 초대하셨다. 할머니의 작은 공간에는 오래된 한국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한국 음식을 내오셨는데, 궁금해하던 질문을 드렸다. “할머니는 언제 어떻게 한국에 오셨던 거예요?”

메이블 할머니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부산의 아동병원과 고아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내 남자 형제들과 사촌들은 한국전쟁 기간 병역거부를 하고 대체복무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어요. 나는 여자여서 징집 대상은 아니었지만 깨어진 세상에서 나도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곳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었지요. 그래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를 통해서 한국으로 갔죠.”

할머니가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은 그 뒤로 오랫동안 할머니의 삶을 형성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해오던 2004년, 일흔이 넘은 메이블 할머니는 크리스천 피스메이커 팀(Christian Peacemaker Teams) 일원으로 바그다드에 있었다. 메이블 할머니는 세계의 기아 문제와 평화에 대해 기도하며 실천하고 있는 현역 활동가였다. 그는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미국의 책임을 슬퍼하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통일, 북한의 식량난을 걱정하며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전쟁과 폭력에 익숙해진 나의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의 말과 삶의 한결 같음은 내가 앞으로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실천을 격려하고 지지해온 신앙 공동체의 유산과 평화의 문화가 궁금해졌다. 메이블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분리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세상 속으로 부단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메이블은 강의실 밖에서 실천 학문으로서의 평화학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의 충실한 청지기로서 살아가길 원하고, 약속하신 안식과 정의에 교회가 참여토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속해 있음을 믿는다.” ―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1995년

   
▲ 루크(우측)와 버나(중앙)

4. 루크와 버나 : “우리는 비겁한 겁쟁이로 여겨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미국에도 신앙과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가 준비되지 않았다. 미국 인디애나 주 고센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만난 버나 할머니(Verna Birky)의 아버지 콘래드는 1차 세계대전 중 고생을 많이 했다. 강제징집 후 구타와 가혹행위 끝에 다른 훈련병들에 의해 나무에 목이 매달리는 상황까지 겪고 나서야 콘래드는 병역거부자들을 따로 수용한 막사로 이송되었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버나 할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1970년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미군 참전 군인들의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을 보면서 자상한 아버지가 가끔 보였던 알 수 없는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미국의 평화교회들은 대체복무제도의 입법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체복무 제도인 Civilian Public Service(CPS)가 가능해졌다. 판사에게서 양심적 병역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s, CO) 판정을 받으면 CPS를 통해 정신병원, 도로 건설, 농장, 산불 진화 현장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다. 버나 할머니의 남편 루크(Luke Birky)는 미국 북서부 산간지역에서 ‘스모크 점퍼’(smoke jumper)로 대체복무를 했다. 스모크 점퍼란 공수부대의 낙하산 강하 훈련을 받고 산불 진화 현장으로 투입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이 잘 붙는 나일론 소재의 낙하산을 메고 불 타오르는 산 속으로 뛰어드는 임무였기에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투입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뜨거운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을, 많은 사람은 여전히 전쟁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여겼다.

루크 할아버지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스모크 점퍼로 대체복무를 마쳤다. 그 뒤 다른 나라에서 섬기는 삶을 원했던 버나의 뜻을 따라 MCC 파송으로 푸에르토리코에서 총 6년 반을 지냈다. 내게 루크와 버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그들은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닌 희생과 섬김으로 평화를 이루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평화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평화롭게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평화이고 온 세상의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폭력이나 전쟁이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해도 성령의 인도함으로 평화, 정의, 화해, 무저항을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 ―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1995년

   
▲ 올해 5월 북한의 아동병원을 방문하여 촬영한 고기통조림과 정수기(우측). 통조림 캔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부고센교회' 같은 문구가 영어로 써 있다. (사진: 제니 제공)

5. 제니 : “이 작은 정수기가 얼마나 많은 삶을 바꾸는지 모릅니다”
1950년부터 1971년까지 20여 년 동안 총 78명의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한국에서 MCC를 통해 활동했다. 이들은 대구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구제사업, 메노나이트 직업학교(경산),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을 했다. 1971년 남한을 떠났던 MCC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심각한 대기근의 시기였던 1995년부터 북한을 돕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MCC는 현재 결핵과 간염 환자들을 위한 대북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세 곳의 아동병원을 지원하고 농업과학연구원을 통해 북한의 농업 개발을 돕고 있다. 

제니(Jennifer Deibert)는 현재 MCC에서 대북사업 담당 코디네이터(North Korea Program Coordinator)로 일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제니는 북한을 여섯 차례 다녀왔다. 제니는 파란색 플라스틱 양동이와 거기 연결된 필터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저희가 병원에 지원하는 간이 정수기예요. 물이 좋지 않으면 사람이 설사를 자주 하고 그로 인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요. 병원 주방과 병실에 설치된 이 간단한 정수기로 환자들의 상태가 많이 좋아집니다. 15달러쯤 하는 이 작은 정수기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는 작은 실천의 이야기가 여기 또 있다.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통조림 공장으로 개조된 커다란 트럭이 캐나다와 미국 국경을 넘나들면서 북미 대륙을 횡단한다. 이 트럭이 예정된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 지역에 사는 아미시, 메노나이트들이 모여서 함께 고기 통조림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이 통조림 만들기에 참여하는 인원은 연 3만 명이 넘는다. 나도 어느 해 겨울 아미시들과 함께 칠면조 고기를 썰고 익혀서 통조림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작은 경험을 통해, 이동식 통조림 공장과 그 제조 과정에 평범한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아픈 사람을 돌보며, 평화를 일구는 일이 어떤 전문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에는 약 350톤의 MCC 고기 통조림이 만들어졌고 부르키나파소, 북한, 아이티, 레바논 같은 국가로 보내졌다. 이렇게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통조림의 25%가 북한으로 보내졌고 결핵과 간염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북한의 아동병원에서 만났던 병원 관계자는 제니에게 “우리가 고기 통조림을 받을 때마다 여러분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남북 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것 같고 북미 간 전쟁의 소문이 점점 더 심해지던 시기에도 깨어진 작은 틈 사이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일은 계속되어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예수의 평화와 정의의 사역에 참여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불러 평화를 조성하고 정의를 추구함에 복이 있음을 알게 하셨다.” ―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1995년

6. 신앙의 정통성(Orthodoxy)과 올바른 실천(Orthopraxy)
한 해 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질문하고, 저항하며, 소통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던 루터를 재발견”하고, “망명자의 신분으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공동선의 추구라는 사회윤리의 토대를 놓은 칼뱅”을 이야기했다. 그 모두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발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묻지 않았던 질문도 해야 한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과 북의 분단체제 하에서 기독교는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를 자양분 삼아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세상이 한 바퀴 돌아서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지만 많은 교회들은 정작 이를 기뻐하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거쳐온 경험과 사용해온 언어에 평화와 화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글자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지킬 것 같이 말해왔지만, 정작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국가가 인정하는 가이드라인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은 강조하면서도, 십자가를 받아들인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강조되지 않았다. 군대를 복음화한다고 하는 동안 교회는 군사문화에 포섭되었고, 다양한 폭력이 일상화되는 동안 교회는 평화의 문화를 이루기보다 그 일부가 되어갔다. 해외 선교에 최선을 다했으나 우리를 찾아오는 이주민과 난민들은 정작 환영할 줄 몰랐다. 메노나이트 평화신학이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묻지 않았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는 얘기다.

여기서 다시 “그 누구도 예수를 삶 가운데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를 참으로 알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한스 뎅크의 모토로 돌아가 보자. 다양한 모습으로 내 삶에 등장했던 이들은 자기의 신학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바른 신학은 바른 삶과 분리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달되거나 가르쳐질 수 없다. 이들은 겸손하면서도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실천의 깊은 바탕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시 이루실 샬롬을 믿고, 자기 몸을 던져 평화를 이루신 예수를 따르며, 성령의 감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화해의 사도로 살아가는’ 삶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성한
IVF(한국기독학생회) 미디어 사역부 대표간사와 인디밴드 코드셋 멤버로 활동했으며 철학과 교회사, 평화학을 공부했다. 글에 자주 등장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 Northeast Asia) 평화교육가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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