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호 부전자전 고전]


 1.
아들아, 갈수록 빛나는 너의 글을 잘 읽었다. 오래 전 《금강경》을 읽으며 갈라디아서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타인의 눈, 외부의 시선에 갇히지 말고, 그렇다고 내 안의 욕망과 집착에 헤매지 말고, 나다운 나, 본래의 나를 찾아 나서라는 일깨움으로 읽었거든. ‘나’라는 주체의 해체가 가능할까? 해체하는 나든, 해체되는 나든 간에 그 ‘나’를 완전무결하게 지울 수 있을까? 결국 ‘나’라는 어떤 것이 존재해야지 않을까? 해서, 참다운 나로 살라는 방식으로 읽었던 거지.

네가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마르크스를 먼저 읽어 보라’고 했지. 어떠한 일체의 형이상학과 고담준론일지라도 반드시 사회 경제적 차원, 계급의 눈금을 갖다 대어 봐야 한다는 게 아빠의 지론이었으니까. 신체를 부정하는 것, 신체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몸이 부서져라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에게 과연 어떻게 다가갈까? 신의 목소리 이상으로 지엄한 목구멍의 부름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한 사람에게 신체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라는 것, 신체는 욕망과 집착에 다름 아니라는 말은, 글쎄,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이 물음을 더 파고들고 싶다만, 지금은 너의 지난 글만으로 만족하련다.

너는 이번 주제를 ‘세계’로 하자고 했지.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신체’ 또는 아빠가 선호하는 단어인 ‘몸’을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는 ‘세계’ 또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자유의지를 ‘몸’이라는 키워드로 읽은 것이 자연스럽게 신체와 신체, 몸과 몸, 관계와 관계의 총체로서의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를 캐묻게 되었구나. 좋다.

2.
리처드 니버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을 때 간략히 소개했는데, 기억나지? 리처드 니버는 라인홀드 니버의 동생인데 다섯 형제 중 막내야. 정치와 현실과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것을 신학적으로 수렴하여 다시 정치에 참여한 형과 달리, 동생 니버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지.

학자형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야. 하나는 제자를 잘 양성했다는 거야. 아빠가 갓 신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1980-90년대만 해도 리처드 니버의 제자들이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어. 한스 프라이, 조지 린드벡, 제임스 구스탑슨, 로날드 티만, 스탠리 하우어워스 등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니버의 영향을 받았고, 새로운 신학 세계를 구축했단다. 이들은 다 그의 직계 제자이거나 영향 하에 있었던 이들이야.

학자의 본령은 제자 양성과 함께 저술이 아니겠니. 리처드 니버는 형과 달리 다작하는 저술가는 아니었어. 한 자 한 자를 꼼꼼하고 깐깐하게 썼지. 분량이 두텁지도 않아. 아빠가 읽은 《계시의 의미》와 《책임적 자아》가 그렇고, 《교회 분열의 사회적 배경》이 그래. 번역된 책이 하필이면 분량이 작은 것들이었을지도 몰라. 이참에 검색해 보았더니 대개 200쪽이 넘지 않더라.

그렇지만 그의 책은 ‘seminal’(향후 전개될 일에서 중대한)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것들이야. 우람한 나무와 풍성한 열매를 품고 있는 씨앗 또는 맹아 말이야. 그런 점에서 그는 다산성과 독창성을 가능케 하는 저자야. 《계시의 의미》는 내적 역사와 외적 역사를 구분하는데, 이것이 이야기 신학의 토대가 되었어. 이 책도 과거 많은 사상가들의 것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수원지를 만들었고, 그로부터 무수한 물줄기가 흘러 비옥한 영토를 일군 거지.

 

   
 

3.
그럼, 왜 아빠가 이 책을 골랐는지를 설명해야겠구나. 세계란 어떤 곳인지에 관해 대답하는 방식은 숱하게 많단다. 생태계 신학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요한복음에서 말한 세상, 윤리학에서 다루는 정사와 권세(principality and power)라는 프리즘 등 다양하지. 내가 너무 오래 품고 있는 원고 중 하나인 기독교 세계관도 그것이지.

그 이야기를 조금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거야. 여기서 따져보고 넘어가야 할 게 수두룩하긴 해.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것도 단 하나가 아니잖니.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무수히 많은 입장이 존재하니까 말이야. 본다는 것은 또 뭘까? 그냥 ‘세계’에 집중하면 말이야,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 세상은 선한 하나님이 친히 창조한 선한 세계라는 것, 인간의 자유 남용과 폭력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거지.

세계관 논의에서 공통되는 것을 하나 추출할 수 있어. 다름 아니라 ‘기독교는 세상 자체만을 놓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지. 기독교는 기독교로 존재한 적이 없어. 교회를 ‘타자를 위한 공동체’로 규정한 본회퍼의 말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서의 개인과 기독교를 말하지 않아. 기독교는 오로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정립했고, 자기 이해에 비추어 세계와 존립했어. 물론 그 세계는 물리적 존재로서의 코스모스라기보다는 가치적 대상으로서의 세계(aeon)지.

따라서, 이 책의 1장 제목에 나오듯, 교회와 세계,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늘 제기되는 문제”로 언제까지나 토론하지 않으면 안 될 영속적인 의제야. 그렇기에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지나온 수천 년의 교회 역사에서 논쟁했어. 그러므로 역사와 대화하고 대결을 펼치면서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시공간에서 양자의 관계를 탐구해야겠지. 그러자면 지금 우리는 니버의 이 책으로 시작해야 하고.

4.
자, 이 책을 파악하는 가장 쉽고도 정확한 툴(tool)은 바로 ‘구조’야. 이 책은 구조만 파악하면 다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니버는 이 책을 정반합의 구조로 조직했어. 분리(정)―일치(반)―종합(합) 그리고 다시 종합(정)―역설(반)―변혁(합). 이를 그림으로 그려볼까.

이 구조가 말하는 바는, 변혁 모델이 니버의 입장이자 지향 모델이라는 거야.

구조를 파악했으니 이제 특징을 말해볼까. 니버는 다섯 가지 모델을 유형론적으로 접근해. 유형론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수단인데, ‘각각의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론’(48쪽)이야. 그러다 보니 어떤 신학도 그 유형에 딱 들어맞는 경우는 없어. 특정 유형에 포함되었다고는 하나, 다른 유형론의 색깔도 갖고 있지.

그리고 연대기적이고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 독서에 도움이 될 거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이전까지는 대립 모델, 그 후부터는 기독교왕국(Christendom) 체제가 성립되면서부터는 일치 모델, 그러다가 로마의 몰락과 함께 고대의 혼란기를 지나서 중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 모델, 그 이후 종교 개혁기에는 루터의 역설 모델이, 맨 마지막은 칼뱅의 변혁 모델까지.

그러나 시간적 순서를 얼추 따라간다는 점에서 연대기적이지만, 역사적이야. 역사적이라 함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되풀이될 수 있는, 오늘 현재에 무언가 말할 것이 있고, 오늘 현재를 해석하는 안목을 준다는 뜻이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은 일치 모델의 현재형이야. 역사란 돌고 도는 것, 그래서 중세적 종합 모델이라고 해서 중세에 묶여 있지만은 않고 근대와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유의미하게 주장될 여지가 있다는 거야.

5.
앞에서 거칠게나마 소개했지만, 너의 독서를 위해 가볍게 정리만 해 볼게. 그리고 텍스트 자체를 잘 소개하는 데 주력하면 좋겠다는 너의 제안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아빠가 다시 읽으면서 니버의 탁월한 글쓰기가 보이더라. 각 장의 첫 문장은 각 모델의 핵심 중의 핵심을 짚어. 그 문장만 옮겨 놓아도, 다 설명이 되겠더라. 학문의 정상에 선 이들은 사고의 깊이와 강인함 못지않게 글쓰기에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서도 자신만의 개성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니까.

먼저 대립 모델이야.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무이한 주님이기에 다른 어떤 것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타협적 입장이다. 세상을 적대시하는 요한일서,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있느냐는 고대의 교부인 터툴리아누스, 그리고 국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문화를 배척했던 톨스토이가 대표자들이야.

니버는 이 견해를 ‘필요하지만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대립 모델은 실제로 사회를 변혁했다는 점,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필요해. 허나, 교회와 세상 사이에 선을 긋고는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다는 것, 문화를 배척하지만 그들 모두가 당대 문화와 시대의 자식들이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논평하지.

둘째는 일치 모델인데,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라고 해. 기독교와 예수를 그 시대와 사회의 일부로 편입시켜. 각 사회마다 추구하는 이상이 있고, 그 완성자가 다름 아닌 예수이고 기독교인 게지. 이 모델은 문화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읽고, 그리스도를 통해 문화를 해석하려고 하지. 고대의 영지주의와 근대의 자유주의를 꼽을 수 있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문화에 맞게 번역되고 해석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야. 특히 혼란기의 사람들에게 안정과 안심을 주는 데는 유용하지. 그러나 이 모델은 이도 저도 아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그래서 양쪽 입장 모두에게 배척당할 위험을 안고 있어.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은 기독교와 당대 엘리트 모두에게 환영받기보다는 오히려 양쪽으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는 거지. 무엇보다도 그 사회의 지향과 이념과 다를 바 없고 그것의 정점이고 완성이라면, 굳이 기독교라는 외피가 필요할까?

셋째, 종합 모델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너무 분리하거나 일치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시킬 수 있어. 대립 모델에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전일성을 가져 오고, 일치 모델과 달리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연결시키려 하는 거지.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 문화를 가져 오면서도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간극을 고려하는 것이지. 그래서 문화의 자율성도 긍정해. 이 유형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야.

종합론자는 기독교 신앙의 우위와 문화적 독자성을 동시에 인정하면서도 ‘혼합하지 않으면서도 한데 묶기’라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모델이지. 허나, 둘을 묶기에는 양자의 격과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문화의 수준으로 격하시켜야 하고, 유한하고 상대적인 문화를 무한하고 절대적인 그리스도와 동등한 레벨로 격상시켜야 하거든. 그러다 보니 니버는 인간과 문화 속의 ‘악’이라는 요소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다’고 평가해.

넷째는 역설 유형인데, 편의상 이원론자라고도 하지. 종합론과 달리 인간에 내재하는 악과 문화의 타락을 중요하게 여겨. 이에 따르면, 인간이 의인이면서도 죄인이고,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면서도 진노하시는 분이지. 둘은 칡처럼 한데 얽혀 있어. 이 유형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니버는 놀랍게도 바울을 지목해. 십자가는 모든 것을 구원하지만 모든 것을 심판대 위에 세워. 문화의 긍정성과 함께 결코 순화될 수 없는 부정성을 강하게 인식하는 한, 바울은 이원론에 가까워. 물론 이건 니버의 평가이고, 아빠는 당연히 대조론자로 본단다.

니버가 보기에 이 모델의 단점은, 도덕을 폐기하고 문화적 보수주의가 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야. 그렇게 보일 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글쎄, 루터의 노예의지론이 도덕을 폐기할까? 그리고 문화적 보수주의 측면도 있지만, 발랄함도 있지.

아이러니하게 역설주의자들이 문화를 더 잘 향유해. 변혁론의 대표인 칼뱅과 달리 루터는 노래를 사랑했고, 그 시대의 유행가에 찬송가사를 붙여서 부르기를 좋아했고, 술도 즐겨 마셨지. 형용사, ‘청교도적’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칼뱅은 예배에서 노래를 제한했고, 시편 찬송을 고집했어. 그 누구도 한 유형에 딱 맞지는 않구나.

마지막으로 변혁 모델이야. ‘전환론’이라고도 하는데, 곧 니버의 입장이지. 세상 문화에 대해서는 종합론자처럼 긍정적이고, 죄와 타락에 관해서는 이원론과 같이 부정적이야. 여기에 얼추 부합하는 성경이 요한복음이라고 봐. 사실 세계관적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대조 모델에 가깝고 니버도 그 점을 잘 알지만, 당시의 헬라 문명과 언어, 예컨대 로고스 등을 기독교화했다는 점에서 변혁론의 대표 정경으로 꼽더구나.

이 변혁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야. 고대 세계의 해체와 몰락에 이은 중세 천년의 초석을 닦은 그는 플라톤과 로마를 기독교적으로 비판하고 수용했고, 그러면서도 기독교를 플라톤과 로마라는 속세의 질서에 맞게 어느 정도 다듬었어. 그를 잇는 신학자는 칼뱅이지.

6.
이 책을 모처럼 다시 읽으며 놀랐단다. 내가 이 책의 영향을 꽤나 받았더라고. 아빠가 앞서 다양성을 존중하되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했었잖니. 그것은 나의 평소 주장이자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상이라고 여겨왔는데, 7장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비학문적이라고 읽는 것이 더 나을 듯해. 아, 말이 나온 김에 학문으로서의 신학, 과학으로서의 신학에 대해 언젠가 이야기하고 싶구나)를 보면서 어딘가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가 다양성과 다원주의라고 말한 것을 나는 상대성과 상대주의라 했고, 실존적 선택이라고 말한 것을 역사적 선택이라고 바꾸어 말해왔더구나.

그는 특정한 한 모델만이 유효했던 것은 아니므로, 자기 입장을 절대화하지 말고,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으로 제시하라고 누차 요구해. 모름지기 인간이란 유한하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보지 않니. 그것이 절대적 숙명이지만, 가능성이기도 하지. 겸손하게 만들고 대화의 자리에 서게 하니까.

결정적 차이는, 그의 암묵적 선택이 전환론이라면, 나는 대조 모델이라는 점이지. 그래도 니버가 고마운 것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불온한 이름의 대명사였던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장을 저 다섯 유형 중 하나로 배치했다는 거야. 윤리학자로도, 유형론으로도 대선배요 원조 격인 에른스트 트뢸취는 교회 유형과 분파(sect) 유형으로 구분했거든.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아나뱁티스트와 대조 모델을 분파로 몰아세우지.

“이 유형들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과, 이 다양한 입장의 여러 지점에서 서로 화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확실”(363쪽)해졌다는 말에서, 트뢸취에 비하면 분파로 축소시키지 않고 다섯 유형 중 대등한 한 가지 유형으로 상향 조정해준 것만으로도 니버는 한결 품위가 있구나.

젠틀한 신사의 합리성 아래 감춰진 모종의 욕망과 의지가 작동하듯이, 그의 고상한 품격에도 그만의 입장이 우아하게 포장되어 있어. 전환론에 최종적 우위를 두는 구조, 대조 모델을 분리론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책을 상대적으로, 즉 비판적으로 읽게 하지. 허나,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계는 있는 법. 다만, 그것을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드러내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비판적으로 읽히나 봐.

7.
세상이란 어떤 곳일까? 창조의 선함과 타락의 악함을 동시에 견지하는 방식,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깊이 개입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아빠는 대조론이라고 봐. 이스라엘은 애굽을 변혁하거나 전환시키지 않았고, 출애굽 했었잖니. 그들은 애굽적 삶의 양식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잖아.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 아닌 척박하기 그지없는 광야를 거쳐서 개간하고 개척해야 할 좁고 황량한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가지.

구약의 초석적 서사인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우리 구원의 주요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개선을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 않으셨다는 거야. 성서의 일관된 요청은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의 존재 양식을 개발하고, 그것이 기존 사회와는 뚜렷한 ‘대조’가 되어서 ‘대항’이 되고, ‘대안’이 되라는 것이거든. 그 주장에 가장 근접한 것이 대조 모델이라고 아빠는 확신해.

그런데 그 구별됨이란 유별남은 아니란다. 니버도 전환론과 대조론을 통합한 사례로 제시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가 좋은 사례(330쪽)이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의복, 주택, 언어 등 관습에 관해서는 다를 게 뭐가 있겠니. 허나, 산상수훈이 말한 바,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하는 것, 모두가 버린 사람과 함께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나라에서도 외국인처럼 산다고 했어.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가 보여준 행태는 글쎄, 실망스러웠어. 대개 교회 자체의 존립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싶더구나. 교회는 타인을 도움으로서 존립하는 존재인데 말이야.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느냐, 온라인상에서 만찬이 가능하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은 기독교답지 않아. 지금 당장은 고통받는 지역과 이웃을 위해 교회 내 가용 가능한 자원을 총동원해서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이 세계 속 기독교가 아닐까. 그것이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기 위한 최소치가 아닐까?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말이야.

희림아, 모든 아빠에게는 아들이 있겠지만, 너는 내게 구별되고 유별나게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교회란 무릇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너로 인해 존재하는 아빠는 세계에 대한 너만의 이해를 기대하고 기다릴 참이다.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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