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호 커버스토리]

이제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

성경과 차별! 두 단어는 이제 새롭다기보다 익숙한 조합입니다. 실제로 〈복음과상황〉 홈페이지에서 검색했더니 각각 ‘차별’ 851건, ‘혐오’ 320건에서,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단어 ‘동성애’는 197건이 나왔습니다. 같은 주제인 ‘성경과 차별’로도 34건의 글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중 중복되는 글이 있기도 하겠지만요. 많은 글 속에 저의 글이 얼마나 새롭고 설득력이 있을지 조심스럽기도 하면서 더는 이런 글의 등장보다 ‘바로 실천(Just Do It)’으로 이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 제정되었고 이날을 현재 ‘인권의 날’(Human Rights Day)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1,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상의 결과로 직면한 위기의식 아래 출발했을 것입니다. 총 58개 국가가 모여 선언의 모든 단어와 조항에 대해 1,400번의 투표를 하여, 최종 48개국 찬성, 8개국 반대, 2개국 기권으로 통과된 진지한 결과물이기도 하죠. 세계인권선언은 대립하는 정치 제도, 종교 체계, 문화 전통 등을 초월해 환영받아 왔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0주년이던 2018년, 한국 여성인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시대적 한계와 남성으로 대표되는 보편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여성의 눈으로 일상의 차별과 권력의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향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여성신학자 강남순은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지만, 그 도착점은 다양한 차별의 극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가 있나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온갖 종류의 차별로 인권은 침해되고, 생존권 박탈의 강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자유주의, 자본중심주의 이데올로기는 여러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차별이 차별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고통당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지요. 지배집단에 의해 선택된 차이는 사회적 약자들을 권력과 자원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나아가 지배집단은 억압받는 집단들에게 차별화된 이점을 제공해 그들 간에 경쟁과 불안을 조장하면서 ‘나는 덜 차별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들끼리 새로운 위계를 만들어 억압적 체제를 유지하고 서로 차별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택배나 청소 용역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 및 일용직 근로자는 그 위계질서에서 억압당하는 존재들입니다. 교회의 부목사, 전도사도 계약에 따른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때 여성, 여성사역자들은 차별에 더 쉽게 노출됩니다.

개인이나 집단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가 차별로 전환될 때는 권력에 의한 위계성이 작용될 때입니다. 최근 ‘n번방’이라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가해자와 동조자들에 의해 가려지기 일쑤지요. 그 견고한 벽은 최근 정치인들의 잇따른 성범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소수자 문제, 이주민 문제, 장애인 문제 등도 엄청난 사건이 아닌 이상 주목받거나 차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굳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 같은 것일 수 있지만, 때로 사람을 전염시키거나 죽게도 하기에 예방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소수자 관점’으로 성경 읽기 

기독교인에게 성경은 삶의 기준이자 지표가 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느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생깁니다. 남성 가부장제하에서 상대적 약자인 여성, 노인, 아동, 외국인, 장애인의 눈으로 성경을 읽을 때 누리는 자유와 해방감은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삶을 통해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존중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소수자의 사전적 의미는 ‘적은 수의 사람’이지만 반드시 구성원의 수가 적은 집단을 이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 사회에서 출산 성 비율과 평균 수명에 근거하여 남성보다 여성의 수가 많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소수자입니다. 식민지인들은 그곳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소수의 식민 통치자에게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소수자에 해당합니다.

소수자에 대한 기준을 살펴보면, 첫째, 집단이나 대상이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실질적인 차별과 편견의 대상인가에 있습니다. 식민지 상황의 국민들은 적은 수가 아님에도 지배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둘째, 바꾸기 어려운 점이 있는가입니다. 장애나 인종, 나이, 신체 성별 등은 노력으로 바꾸기 어려움에도 배제되거나 소외됩니다. 셋째, 차별받는 집단이 집단의식과 운동으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는가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는 개인에 머물지 않고 노동운동, 성소수자 운동, 장애인 운동, 여성운동 등 집단으로 발산합니다. 그로 인해 인권에 대한 이해는 진일보되어왔습니다. 그러나 누가 소수자인지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겠지요. 오랫동안 소수자 집단이 편견과 차별에 노출되다 보면 자존감 상실, 자기혐오에 빠져 이런 차별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한 때에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구조를 극복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정신과 대립되는 차별과 억압 

성경 이야기로 들어갈까요? 지금 많은 국가에선 과거 노예제도처럼 사람을 도구화하는 제도는 없으며 그때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노예가 존재했고 노예무역도 활발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노예 하갈이 있고(창 16:1) 형들에 의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있습니다.(창 37:28)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을 경험한 이스라엘뿐 아니라 바벨론과 앗수르의 포로기를 맞는 남북 이스라엘 왕조시대의 말로도 성경은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예언자 아모스는 두로와 가자가 포로를 에돔에 팔았다고 비판합니다.(암 1:6, 9) 요엘은 두로, 시돈과 블레셋이 이스라엘인과 유다인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았다고 하며 하나님은 이들을 돌아오게 하고 똑같이 유다인을 시켜 스바의 노예가 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욜 3:6-8) 성경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공공연히 이뤄진 노예제도는 식민지 상황을 내면화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잘못을 범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여겨진 대상은 노예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십계명(출 20:2-17, 신 5:6-21)이 숫자가 붙은 각 계명으로 있지 않지만, 일찍이 구약학자 에발트(G. A. Ewald, 1603∼1675)에 의해 정리된 내용을 우리는 지금껏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굳게 믿으면서요. 하지만 더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것을 수행해야 할 대상은 ‘결혼한 남성 자유인’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남성이 아니거나 주인이 아닌 이들은 빠져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아내를 배제하고, 그녀를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상정하는 문화였습니다. 이를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십계명을 외우고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시대적 한계가 존재하는 성경에서조차, 성범죄는 몇몇의 경우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가해자의 잘못만을 지적합니다(창 38장 임신한 다말과 유다, 삼하 12장 임신한 밧세바와 다윗 등). 고대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피해자의 태도나 행동을 의심하거나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2차, 3차 피해로 이어지는 오늘의 모습과 비교가 됩니다. 문화사비평(Cultural-Historical Criticism)은 성경이 문화의 옷을 입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고 변화되는지 알려줍니다. 지식이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입니다. 현재 인식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성경 본문도 권력을 가진 자의 편이 될 때가 많지요. 따라서 적극적으로 ‘오늘’의 의미를 묻고 이를 자유와 해방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당시 차별문화에 반대하고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가치는 기독교 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출발한다면 각종 이유를 들어 종교의 이름으로, 특히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차별하고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디지털 성범죄 같은 경우, 특정 피의자를 비정상화·괴물화하면서도 피해자를 비난하고 이를 통해 범죄에의 가담을 정당화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많은 성범죄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관대하게 수용해왔습니다. 교회 내 그루밍 성범죄는 부모가 교회 직분자이거나 교회에 가족 모두 다니는 피해자는 피해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사건이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피해자의 취약성을 이용하고, 만약 드러나더라도 상대적으로 사소화되는 점을 노린 더욱 못된 범죄인 것입니다.

가부장제에 맞선 새로운 인간성의 선포

예수께서 찾아가거나 만난 이들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천시받고 차별당하는 문화가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이웃인 사마리아인을 알려주셨고(눅 10:30-37), 사마리아 여성을 만나 먼저 대화를 시도하면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시며 장벽과 경계를 허무셨습니다.(요 4:1-30) 이뿐이 아닙니다. 예수는 인종을 넘어 성에 대해서도 비유에서나 가르침에서 그 균형을 맞추셨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마 13:31-33; 눅 13:18-21)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를 여성이 누룩을 가지고 요리를 했을 때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설명합니다. 두 번째로 마지막 날의 주의 재림 비유(마 24:39-41)로 밭에 있는 두 남성과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여성을 동등선상에 두고 한 명은 데려감을, 남은 한 명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 기도의 비유(눅 11:5-9, 18:1-8)에서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응답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시며 친구(11장)와 과부인 여성(18장)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눅 15:8-10)인데,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아들 사이에 위치하는 본문으로, 샅샅이 뒤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성의 기쁨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는 허리가 굽은 장애 여성(눅 13:10-13)을 안식일에 고치시며 아브라함의 딸로 불러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출신 여성(막 7:24-28)이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찾아와 차별이 드러난 논쟁을 했지만, 결국 예수께서 한 민족, 한 성에 국한된 주가 아님을 알려주었지요. 혈루증 앓는 여성(막 5:25-34)은 당시 유출병자에 대한 율법(레 15:19-33)에 따라 가정과 사회에서도 12년이나 소외당했지만, 예수를 통한 치유의 확신을 실천해 신체뿐 아니라 사회적, 정신적으로도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께 향유 부은 여성(마 26:12-13; 막 14:3-9; 눅 7:37-50; 요 12:3-8)은 또 어떤가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그 중요성을 반영하며 예수의 메시아 되심과 장례준비를 하여 칭찬받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외에도 사마리아 여성(요 4:5-42)과 간음하여 잡혀 온 여성(요 8:4-9) 역시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해방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란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에 인식되어 온 예수의 남성성은 여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가 남성이었다는 것과 나아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여성은 배제되었으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라는 도식은 남성성의 우월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는 현재 몇몇 교단에서 불허하는 여성 안수 문제와도 연결되지요. 사실 예수와의 자연적 유사성에 따라 안수가 이뤄져야 한다면, 그가 태어난 나라, 인종, 계층, 나이, 결혼 여부, 학력, 직업, 경제 형편 등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대로 두고 성 범주만 기준삼아 여성만을 안수에서 배제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 속 예수는 가부장제를 비롯해 여러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하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정의, 평화, 사랑의 공동체 비전은 오늘에도 이어가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며 대표적으로 모든 사람, 특히 남성의 역할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uether)는 “예수의 남성성은 가부장제의 겸비(kenosis of patriarchy), 즉 위계적 계급특권을 파기하고 제시하는 삶의 양식을 통해 새로운 인간성의 선포”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당시 존재하던 차별의 문화에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차별은 힘의 불균형에서 발생합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센 사람이 그 힘을 행사해 누군가를 억압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이는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며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처럼 일상적으로 차별을 겪는 이들에게 이전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느냐며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이성애자이며 비장애인인 선주민의 기득권과 비교하지 않고, 같은 처지의 과거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세뇌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예수의 삶을 묵상하고 그의 정신, 환대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성신학자 레티 러셀(Letty M. Russell)의 《공정한 환대》에 의하면, 환대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입니다. 그 구체적인 여성주의적 해석학으로, ①권력의 분배 몫에 주의하기, ②외부자(역주 주변인)의 관점에 우선권을 주기, ③진상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기뻐하기가 있습니다. 결국, 환대를 실천하기 위해선 우리 곁을 가로막는 여러 차별적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말이나 생각에 그칠 때가 많은 우리로서는 미국의 여성주의 윤리학자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이 말한 ‘담대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울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찾습니다. 적당한 이들에게 차별과 혐오, 증오를 선택해 쏟아놓기 바쁘지요. 이는 존중, 환대, 소통을 택하는 이들을 두렵게 합니다. 특히 온라인상에서 익명성을 이용한 글들은 혐오·차별의 수위가 점차 높아져가고 있으며, 잘못된 정보들로 차고 넘치는 현실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차별과 폭력의 양산에 일말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작은 시도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1대 국회, 국민이 바라는 성평등 입법과제〉에 따르면 응답자 중 87.7%가 ‘성별·장애·인종·성적지향 등 다양한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전국 만18~69세 성인남녀 1,500명 대상)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의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에서도 차별 금지를 법률로 제정하는 데 88.5%가 찬성하였습니다.(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유엔인권기구들(국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유엔인권이사회의 국별인권정례검토)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2008년 발의되어 아직도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입니다. 차별 금지를 반대하는 일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무엇을 잃느냐고요? 사회적으로 인권감수성은 높아져가는 현재, 이들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않는 교회는 외면당하고, 다음세대를 잃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차별금지법에서 제외되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차별을 하자는 말입니다. 세밀하게 무엇이 차별인지 인식하고 그 감수성으로 차별을 줄이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유대사람이나 그리스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새번역)는 인종, 계급, 성 차별을 종식하며 평등과 환대의 삶을 살 것을 선포하고 권고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반대에 나선 교계 지도자와 이를 동조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다시 예수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환대와 환영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이뤄집니다. 환대에 우열은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고 작고 작은 자를 찾으시는 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차별받는 소수자를 발로 찾아가,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손을 사용해 나누고 돌보라고 말입니다.

 

최은영

성서의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구약학을 공부했고 가르쳤다. 실천여성회 ‘판’(옛 대전여신학자협의회)과 성서대전에서 활동하다가 올해 한국여신학자협의회로 옮기고 그 영역이 넓어졌다. 교회와 여성, 성서와 환대라는 주제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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