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이웃 곁으로 이웃 속으로]

부당해고자 이재학 PD의 죽음
722, 투쟁이 끝났습니다.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 CJB 청주방송(이하 청주방송’)이재학 PD가 세상을 떠난 지 17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기뻐해야 할까요, 슬퍼해야 할까요. 먹먹함과 막막함이 교차했습니다.

이재학 PD는 동료 프리랜서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강제 하차되는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14년 동안 오롯이 청주방송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던 헌신이 간단히 짓밟혔습니다. 회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눈 밖에 난 노동자를 거리로 내쳤습니다.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동안에는, 함께 동고동락했던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이재학 PD에게 부당한 증언을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회사의 압력 때문입니다. 해고 노동자 개인이 감당하기에 방송 산업은 너무 거대했고 동시에 끔찍했습니다. 꿈과 삶이 부정당하며 궁지에 몰린 이재학 PD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7월 故 이재학 PD 사망 사건 대책위가 연 '끝장 투쟁 문화제' 현장. (이하 사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제공)
지난 7월 故 이재학 PD 사망 사건 대책위가 연 '끝장 투쟁 문화제' 현장. (이하 사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제공)

이재학 PD가 세상을 떠난 지 15일이 되었을 때,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를 비롯한 노동·언론·인권운동 단체들이 ‘CJB 청주방송 이재학 PD 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유가족과 함께 기나긴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죽음의 진상규명과 더불어, 이재학 PD가 생전에 원했던 청주방송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청주방송의 무책임한 태도로 대책위 활동은 수개월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활동가들의 끈질긴 투쟁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통해 극적으로 최종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청주방송은 이재학 PD에 대한 완전한 명예회복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약속했습니다.

대책위에 참여한 날부터 지금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투쟁은 제가 경험했던 4년 전의 기억과 놀라울 만큼 비슷했으니까요.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이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노동자에게 부과하고 고작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들을 불러내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이한빛 PD 유서 중)


2016년 가을, 저의 친형이자 CJ ENM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이었던 이한빛 PD는 드라마 현장에 쌓여온 문제들을 지적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이 무너질 듯한 슬픔을 뒤로하고 작은 명예라도 회복하고자 회사를 찾아갔지만, 이재학 PD와 그의 유가족들이 마주했던 거대한 벽이 그곳에도 기세를 떨치며 존재했습니다. 회사는 한빛 PD가 조직에 적응하지 못했고 근무도 태만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고인을 핑계로 우리 회사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는 협박도 거침없었습니다. 심지어 형이 실종되어 가족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던 그 시간에도, 방송국 선임 PD는 생사 확인은커녕 고인의 근태가 얼마나 불량했는지를 어머니에게 설명하고 돌아갔습니다. 회사가 책임을 회피하고자 벌인 만행이었겠지요. 어머니는 혹시 자식에게 해가 될까 그 자리에서 선임 PD에게 사과하였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곧바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는 참담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일하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방송 현장에서는 전혀 취급되지 않아 왔습니다. 위계적 피라미드형 제작시스템에서는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할 수 없고 오로지 부품이 되기만을 요구받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저항하다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도태되거나, 아니면 잘못된 문화를 체화하고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빛 PD는 두 선택지 모두에 환멸을 느꼈고, 3의 길을 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이를 극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꿈꾸는 한빛 PD를 향한 눈초리는 매서웠습니다. “너만 잘났어?” “드라마 판에 발 못 붙이게 할 거야.” 모욕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가해졌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거대한 방송 산업에 맞서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꿈을 가지고 미디어에 발을 들여놓은 수많은 사람이 좌절과 상처 속에 현장을 떠나야만 했고 지금도 떠나고 있습니다.

3년 반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재학 PD와 그의 가족들에게 꼭 같은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재학 PD 유가족들은 청주방송 회장을 비롯한 방송국 주요 인사들에게 비상식적인 말을 들으며 묵묵히 싸워야 했습니다. 짐작건대 유가족들은 지난 반년 동안의 일들을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전달하는 방송의 현장에 어떻게 화면 속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만 가득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원인은, 너무 당연하겠지만 사람을 갈아 넣어야만 굴러가는 방송 산업 전반에 있습니다. 비단 CJ ENM, 청주방송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 바닥은 원래 그렇다.” 모두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계속해서 쌓아온 부조리가 넘쳐흐르게 됐을 뿐입니다.

다시는 한빛 PD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난 4년을 살아왔지만, 결국 이재학 PD의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혹자는 한빛센터와 제가 4년간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지루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4년간 같은 문제점들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사태에 타격 받은 방송 노동환경
52시간 근로는 방송 현장을 비껴갑니다. 2020년에도, 방송 종사자들은 한 주에 100시간을 넘게 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계약서조차 제대로 쓰지 않으니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무리한 밤샘 촬영, 부실한 세트장 관리 등 노동자들의 안전 역시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안전불감증은 여전하고, 사고가 발생해도 산재조차 처리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인격 모욕, 도제 문화로 인한 폭력적 업무 지시, 계약 형태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현장의 갑질, 빈번한 성폭력 문제는 개선의 희망을 꺾어버릴 듯 반복됩니다. 폭력적 환경은 예능이든 드라마든 장르를 불문합니다. 화유기〉〈킹덤〉〈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아스달연대기> <아일랜드> 등 유명 프로그램들에서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코로나와 기후변화로 인해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회차를 기준으로 혹은 일당으로 수입을 받는데, 촬영 자체가 코로나와 장마로 인해 연기가 되자 자연스럽게 수입이 끊어졌습니다. 종영이 아니라 연기이기 때문에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4대 보험에 가입되지 못해서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러한 이야기가 어제 오늘 나온 이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프리랜서, 비정규직, 고용보험한빛 PD의 외침 이후 오랫동안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예측할 수 있는 재난이었습니다. 충분히 예방하지 못했기에, 악재는 겹치고 겹쳐, 카메라 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큰 상흔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청주방송이 故 이재학 PD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 수용을 거부한 가운데 청주방송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단체별 릴레이 시위가 이어졌다.
지난 6월 청주방송이 故 이재학 PD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 수용을 거부한 가운데 청주방송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단체별 릴레이 시위가 이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재학 PD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00시간의 고강도 촬영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빛센터가 방송 현장 노동자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그에 맞춰 제보도 많이 들어오고 있으며 조금씩 현장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방송스태프노조, 방송작가유니온 등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조직도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몇몇 방송사나 제작사도 자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지키려 노력합니다.

시청자이기도 한 독자들께서도 계속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워야 시청자도 진정으로 행복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2017년과 2020년 한빛 PD와 이재학 PD에게 보내준 시민들의 응원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방송 현장의 케케묵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습니다. 한빛센터와 저는 계속 이 자리를 지키며 시청자분들의 응원과 지지를 방송국과 제작사 그리고 정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조금씩 바뀌어 가는 현장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형 앞에서 더 당당해지고 스스로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현장 노동자분들도 지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지치지 않으시길 응원합니다.

이한솔
사단법인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hanbit.center)와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minsnailcoop.com)에서 활동 중인 투잡러. 노동과 주거 영역에서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고자, 다양한 작당과 기획을 벌이고 있다. 대학 때 복수전공으로 신학을 선택하며, 기독교의 사랑에 대해 작게나마 관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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