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호 그들이 사는 세상] 11년 일한 직장 접고 충남 홍성으로, 임현성 독자
인터뷰이는 7년 전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커버스토리 ‘도시생활자 6인의 도시 탈출기’(2013년 9월호)에 글을 기고했던 임현성 독자다. 당시 그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광주에 터를 잡게 된, 복잡하고 불안정한 이야기를 셀프 인터뷰 형태로 보내왔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면, 가는 거죠’라는 제목을 단 그의 글은 “이곳에 있을 수 있음 있고, 밀리고 튕겨 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면 그곳으로 가는 거죠”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난다.
그런 임현성 독자가 지난 7월, 충청남도 홍성으로 주소지를 변경한다고 전화를 해왔다. 11년 만에 거주 지역을 옮긴 것이다. ‘밀리고 튕겨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일까. 커버스토리 주제와 관련해 현실적인 고민을 들을 수 있을 듯해 조심스레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고, 만남은 10월 5일 그의 집(전세)에서 이뤄졌다. 2층에 있는 그의 방 한쪽 꽤 좋은 자리에 복상이 꽂혀 있었다.
햇볕 잘 드는 곳에 비치된 복상을 보고 감동했다.
친한 친구로부터 소개를 받아서 다른 책보다 친숙하다. 다달이 내세우는 코드가 내 성향에도 잘 맞는다. 사회 이슈를 개신교의 시각으로 해석해주는 것이 좋다. 개신교에 다소 반감이 있는 아내도 복상이 다룬 주제에는 관심을 보이곤 한다. 생소한 분야나 현장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뷰도 좋다. 30대 초반에는 그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는 좀 동떨어진 느낌이었는데, 마흔을 바라보게 되어서 그런지 더 재밌게 읽힌다.
최근 인상 깊게 본 인터뷰는 무엇이었나?
9월호 활동가 인터뷰 재밌게 읽었다. 특히 기독교 단체 행정간사(성서한국 송지훈 팀장) 인터뷰가 좋았다. 조직에는 ‘너무 목적과 의미에만 몰입하지 말고,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돈도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일을 해왔던 터라 공감하며 읽었다. 결국 밥벌이다.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뛰어넘었거나, 다른 걸 누리고 있거나, 마음이 정말 순수한 이들인데 나는 그 경지에까진 이르지 못해서인지 다른 사람들 인터뷰보다 그 행정간사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그분은 더 세게 말했을 것 같은데, 편집한 거 아닌가?(웃음)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니, 그동안은 무슨 일을 했나?
(2019년 12월까지) 11년 동안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성인 발달장애인이랑 즐겁게 지냈다. 지금 돌아보니 너무 즐겁게만 일해서, 다른 직원들이 힘들었을 것 같다. 실질적인 것 고민하지 않고 의미와 목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일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필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즐겁게 일한 것 같다.
11년 동안 즐겁게 했던 일을 그만둔 이유는?
경력도 10년 넘었고, 팀장도 몇 년 하고, 새 아이템이나 사업도 보였다. 너무 잘 적응해서 조금 과장하면, 가만히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 느낌? 그런데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어서였다. 한마디로 미련이 없었다. 아내 영향도 컸다. 아내도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육아를 전담하면 되겠다 싶었다. 내가 팀장이라는 이유로 아내만 두 번 육아 휴직을 했는데, 아내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자신이 육아 휴직을 하면 되었을 텐데, 굳이 왜 그만두었나?
복지관의 상황도 있고, 애매한 시기를 만들기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멋있게 그만둔 것 같다. 요리조리 피하지 않고, 3개월 전에 관장님 국장님께 말씀드리고 인수인계 제대로 하고 그만뒀다. 퇴사하는 날 직원들 앞에서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춤을 추고 나왔다.
육아가 더 힘들지는 않나?
여기 오기 전까지 6개월 정도 육아를 전담했다. 난 육아가 맞다. 의외였다. 아이들 관찰하는 게 재밌다. 같이 놀면서 성향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해와서 그런지 아이들 돌보는 게 딱히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제발 좀 늦게 들어오라’고 말하곤 했다. 또 육아가 좋았던 게 게으를 수 있었다. 늦게까지 놀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음 날 출근 걱정하지 않고, 새벽 3시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육아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때는 한 사람이 전담해서 돈을 벌어올 때라 육아가 안정이 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마음가짐이 좀 변한다. 아내와 둘이서 돈을 벌고 육아를 분담하는 일을 조율 중이다.
결국 두 분 다 오래 다닌 직장과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아내도 중간리더로 일을 하다 보니 지친 것 같았다. 나한테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고 말하던 사람이 정작 자기가 열심히 하다가 지친 거다. 직장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면, 가정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직장에서 성취와 개인 성장이 있어도, 속사람이 헐떡거리면 가정이 피해를 본다. 아내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아내는 평소에도 생태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다. 곧바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거주지 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무엇이었나?
우리 형편에 맞으면서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 좋았다. 다른 기준은 크게 생각 안 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전원생활을 바란다. 다만 현실적으로 돈 걱정을 많이 한다.
우리 부부 기질이 걱정이 별로 없다. 특히 아내가 그렇다. 아내는 늘 후회가 없다. 대담하다. 많이 배운다. 아내에 비하면 나는 생각이 많고 우유부단한 편인데, 사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수입을 걱정 안 할 수 없다. 고민을 많이 했다. 아직 완전한 결론은 아니지만 적당히 버는 것으로 타협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와서 3개월 동안 수입 대비 400만 원 적자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800만 원을 벌었을 거다. 그런데 내 개인 건강을 기준으로 보자. 거기서 돈 벌면서 나한테 체감되는 득이 있었나? 내가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여기는? 득이 되는 게 굉장히 많다. 늦잠을 잘 수 있고, 햇빛을 누릴 수 있다. 내 방도 생겼다. 돈은 그때 더 많이 벌었는데 내 방도 없었다.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재정이 걱정되진 않나?
마이너스 재정은 예상을 했다. 처음에 2천만 원 까먹을 생각은 있었다. 지금은 ‘돈을 더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가 마이너스 재정이더라도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 자문했을 때조급해지지 않더라. 보통 마이너스 재정이 걱정되면 일자리도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 돈 벌려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면 사는 장소만 바뀐 거지 삶은 이전과 똑같은 거니까. 그냥 가만히 있다.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드나?
이것저것 계산해보니 월 고정 지출이 140만 원이고, 여기에 식비 60만 원을 더하면 200만 원이다. 좀 풍족하게 살려면 230만 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은 일단 지출을 줄이는 중이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빠와 엄마가 돈이 없다. 앞으로 치킨 많이 못 먹는다. 외식도 자주 못 한다.
삶의 질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른들이 보면 궁상맞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내와 나는 이런 게 너무 좋다. 일단 가장 큰 변화는 냉장고가 비워진다는 거다. 냉장고에 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무엇이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 기분 참 좋다. 냉장고에서 음식 버릴 때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이제 그런 일이 없다. 우유를 먹을 때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다. 치킨을 시켜도 남기지 않는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걱정은 없나? 흔히 ‘애들은 서울에서 가르쳐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솔직히 말하면 자신감이 있다. 부모로서의 자신감이랄까. 나중에 애들한테 욕은 안 먹을 것 같다. 아이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 ‘엄마 아빠는 왜 서울 강남권에 못 들어갔어?’라고 물을 때 할 말이 있도록 살면 된다. 엄마 아빠와 보낸 수많은 시간, 그 좋은 기억과 추억으로 안정적인 자존감을 갖추게 할 거다. 아이들에겐 맛있는 걸 많이 먹거나 좋은 제품을 소비하는 것보다 부모와 함께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게 더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지금부터 세뇌(?)시키고 있다.(웃음) 그게 진짜 좋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 그리고 좋은 교육이라는 게 이제는 뭔지 잘 모르겠다. 대안학교 교육이 좋은 교육인가?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게 좋은 교육인가? 전교 1등 부러워하게 만드는 게 좋은 교육인가? 난 아이가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게 좋은 교육인 것 같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토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다져진다. 그래야 스무 살 때 아이들을 독립시킬 수 있다. 이곳에서 그런 교육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치킨 먹는 횟수가 진짜 줄어들었나?
그렇다. 빈곤한 삶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보다 알뜰하게 사는 분들도 많다. 이게 참 좋은 교육이다. 한 번 먹을 때 남기지 않는다.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말은 영화 보는 날이다. 평일에는 안 보여준다. 그래서 첫째 은유는 영화 보면서 무엇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한다. 그때 먹는 것이 치킨일 때는? 정말 정말 행복한 거다. 일부러 아이들에게 ‘설렘’을 많이 주려고 한다. 누구를 만나기 전, 무엇을 먹기 전, 가슴 꿀렁이는 기다림의 시간을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그 시간에 아이들 몸에 엔돌핀 도는 게 보인다.
검소한 삶과 뒤에 있는 카라반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웃음)
저건 싼 편에 속한다. 요즘엔 1억 원 넘는 카라반도 있는데, 우리 건 1천 8백만 원이다. 물론 8천만 원 전세 사는 처지에서 큰돈인 건 맞다. 도시에 있을 때,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를 생각하다가 방송에서 카라반으로 동해에서 북유럽까지 다녀온 가족의 이야기를 보고 알아봤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지식을 쌓는 것도 좋지만 엄마 아빠와의 여행이 더 좋겠다 싶었다. 돈 끌어모아서 샀다. 나만을 위해서 사려는 게 아니라는 명분으로 애들 통장의 돈도 보탰다. 지금까지 40회 넘게 캠핑을 나갔는데, 사실 이곳에 오고서는 카라반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캠핑의 끝이 전원생활인데, 우린 이미 이곳에 와 있으니까. 캠핑 열풍일 때 비싸게 팔아버릴까 했는데, 첫째가 팔지 말라고 하더라. 아이들에게도 지분이 있으니 의견을 존중해서 팔지 않았다. 둘째가 더 크면 카라반 끌고 제주도를 다닐 계획이다.
맥락을 모르는 동네 주민은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다.
위화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거다. 죄송한 마음이 있다. 몇몇 원주민 분들에겐 이곳이 주말도 없는 힘겨운 삶의 현장일 수도 있는데, 젊은 부부가 마치 ‘대안적 삶’ ‘이상향’을 누리러 온 것처럼 비칠까 죄송스럽다. 찾아가 인사도 드리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소득 활동을 하고 있나?
낮에 3시간 동안 인근 중학교에 가서 방역 노동을 한다. 학생들 급식을 돕고, 공동의 공간을 소독하는 일이다. 코로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4대 보험도 적용되고, 69만 원 받는다. 방과후 교육(댄스 수업)이 시작되면 100만 원 정도 소득이 더 생길 것이다. 문화예술 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어 조금 더 벌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에서 방과후 교사를 해보니, 마음먹고 시간과 마음을 쓰면 돈 많이 벌 수 있겠더라. 그래도 거기에 오랜 시간 매달려 일할 생각은 없다.
문화예술 공연이라면?
가장 만족하는 것이다. 친한 형이 우연히 홍성에 왔다가 소개해준 분이 이곳에서 문화예술 공연을 하는 단체 관계자였다. 그게 인연이 되어 공연에서 춤을 한 번 췄고,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요즘엔 공연을 준비하며 전통문화 이수자에게 탈춤을 배운다.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주는 데 재밌어한다.
춤을 잘 추나 보다.
내 분야에서는 1등이라 믿고 있다. ‘내 삶’을 표현하니까.(웃음) 주로 나의 고민을 춤으로 표현한다. 언어로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몸짓이나 행위로 표현하려고 한다. 지난 공연 때는 수행(기도)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던 때라 기도하는 마음을 춤으로 표현했다.
7년 전 복상에 쓴 글의 필자소개를 보니 “지적-자폐성 장애인들과 함께 춤추고, 축구하고, 숲을 거닐다가 퇴근한다”라고 쓰여 있다.
어렸을 때부터 춤추는 걸 좋아했다. 누군가의 춤을 본다는 것은 가슴 꿀렁이는 일인데, 당시는 문화예술과 사회복지를 접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울을 오가면서 실용댄스 1급 자격증을 땄는데, 복지관에서 성인 발달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가장 큰 장점이 됐다. 앞으로 아내와 함께 준비하는 일에도 접목하고 있다.
어떤 일인가?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찾아가는 클럽(무도회장)’을 구상 중이다. 그들이 마음 놓고 춤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같이 놀면서 교제하는 프로그램이다. 잘 모를 때는 그분들 클럽 데리고 가는 게 내 신념이었다. 돌아보면 그건 내가 바라는 것이었지 그분들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복지관에서 일할 때 200명 발달장애인과 함께 춤추고 노래한 적 있었다. 내가 ‘판돌이’가 되어서 그분들 좋아하는 동요와 클래식으로 춤추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는 10명 정도로 구성해서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분들 끼를 살짝 접목해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주말에도 교제를 하고, 그분들이 고유한 정체성으로 대인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시설, 복지관, 가정에도 직접 찾아가 같이 춤도 추고 노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둘 그분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붙여갈 계획이다.
10년 넘게 성인 발달장애인과 함께했는데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겠다.
엄청 많이 받았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복지관 국장님은 자녀가 발달장애인이었는데, 평소 성인 발달장애인을 대(大)영성가라고 표현했다. 그들이 헨리 나우웬처럼 영성이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감각 중심의 우뇌가 발달하고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분들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인다. 내가 본 그들은 급할 때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킨다. 우리는 저마다의 고민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고,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해 현재를 망친다. 그분들은 미래를 기대하거나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지금 현재, 가방의 지퍼를 닫는 게 중요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 언제나처럼 일정한 속도로 딱 닫는다. 우리 기준에서는 강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분들은 바로 지금! 자기 스타일대로 사는 거다.
정말로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게 느껴지나?
우리는 논리적이고 사고적이다. 좌뇌 중심으로 이성적 판단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분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게 잘 안 느껴질 수는 있다. 물론 학술적으로 발표된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분들은 평화를 사랑한다. 그분들 자체에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작은 거에도 표현을 잘하고, 심지어 이성적인 논리에서 봐도 욕심이 없어 보인다. 그분들 안의 문화는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자리 욕심도 없어 보인다. 내가 더 나아 보여야 한다, 멋져 보여야 한다, 이겨야 한다는 욕망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기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크다. 안 하면 어때? 그러면 좀 어때? 평안함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과 소통하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한 차원 깊이 내다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분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인 발달장애인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하다.
그분들을 ‘인디언’에 비유하곤 한다. 소수민족이다. 주류가 아니다. 그래서 주류인 우리가 우리의 문화로 그들의 문화를 바꾸려고 한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인디언을 친구로 만나는 것과 ‘인디언문제개선연구소’를 통해 만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복지관에서 일할 때도 그들을 개선시켜야 할 대상, 우리 비장애인에게 적응하도록 바꿔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싸워야 했다. 나는 성인 발달장애인만의 관점과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형적인 접근을 벗어나 그들 본연의 문화를 알리려고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일이 많아졌다.
일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
전반적으로 일은 즐겁게 했다. 다만 성인 발달장애인의 부모를 만나면서 힘든 적이 많았다. 그분들의 어려움을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나에게 그럴 힘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참 힘들었다. 성인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부모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쉽게 비유하자면, 세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샤워를 시켜도 세 번, 밥을 먹여도 세 번…. 24시간 돌봐야 한다. 부모는 직장을 가질 수도, 취미 생활을 할 수도 없다. ‘여섯 살 지나면 괜찮겠지? 스무 살 지나면 괜찮겠지?’ 희망을 품지만 60세 넘어도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국가책임제 이야기가 나오는 맥락인데, 사회문화적으로 정착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부모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2시간씩만 돌봐주어도 큰 힘이 된다. 성인 발달장애인과 10년 넘게 좋은 시간을 보낸 입장에서 그분들과 그 부모가 주말에 딱 2시간만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서 말한 ‘찾아가는 클럽’도 계획하게 된 거다. 특히 복지관에서 꺼리는 ‘도전적 행동’이 많아 대인관계가 어려운 분들까지 포함해 모임을 가지려 한다. 그런 분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로의 진입이 어려워 더 고립되는 경우가 많고, 가족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는 직접 찾아갈 생각이다.
‘찾아가는 클럽’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춤으로 그분들 존재감을 확인시켜주고 나아가서 친구 관계까지 되려는 게 목적이다. 우리가 배철수는 못 만나도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드는 안정감 같은 게 있지 않나. 보지 않아도, 누군가 존재하고 그와 관계 맺고 있다는 인지가 성인 발달장애인에게는 매우 필요하다. 그들은 관계 욕구가 엄청나다. 요즘에는 탈시설화 추세인데, 물리적으로 지역사회에 나온다고 저절로 적응되는 게 아니다. 집이라는 자립 공간이 어렵게 마련되어도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면 결국 다시 시설로 돌아간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이 가능한 분들도 시설에서 나오면 외로워한다. 외로우면 술 마시고, 술 마시면 통제 안 되고, 다시 시설로 돌아간다. 자기 의지로 시설로 돌아가는 분들도 있다. 적어도 그곳에선 자기를 책임져주니까. 현실적으로 성인 발달장애인이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비혈연 중심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은 사회 인프라가 도저히 받쳐주지 못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분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감각적인 쪽으로 접근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작은 역할을 하려는 것뿐이다.
너무 열심히 일하기 싫어서 이곳에 왔다고 했는데, 비슷한 일을 준비하는 것 아닌가?
처음엔 ‘내가 왜 이러지?’ 싶었다. 나와 우리 가족 잘 살려고 이기적으로 이곳에 왔는데, 왜 또 이런 생각을 하나? 큰 교회에서 제자도 훈련을 받아서? 아니다. 내가 만족을 누리니까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하게 된 거다. 내가, 또는 가족이 만족하지 않는데 남을 위해서 사는 분들은 언젠가는 사고를 치더라. 직장 만족도가 낮은데 계속 다니면 사고가 난다. 가족 때문에 자기 삶을 살지 못하면 숨이 헐떡이게 되어 있다. 내 만족이 가장 기본이다. 지금은 내 마음이 충만하니까 돈을 벌고 있지 않은데도, 마이너스 400만 원인데도 이런 이타적인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생긴다.
집 이야기를 해보자. 이번 달 주제가 ‘집’이다. 주변에 부동산 시세 차익을 본 이들이 많을 텐데 흔들릴 때는 없었나?
지난 10년을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는데 그곳 아파트값이 2억 원에서 6억 원까지 올랐다. 주변에 이익 본 사람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매일 하소연한다. 일하기 싫어 죽겠다고. 이해가 안됐다. 4억 원이면 일 열심히 안 하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지금 멈추지 못할까? 아내에게 말했더니 “시세 차익 4억 원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왜 멈추겠냐”고 하더라. 맞는 말이다. 6억 원, 8억 원 계속 더 얻고 싶을 거다. 이해 안 되는 측면은 있는데, 내가 흔들리진 않는다. 이 집이 전세 8천만 원인데, 이 앞에 논 600평을 포함해 3억 원 매매로 나왔다. 돈만 있으면 사고 싶다. 그런데 그 돈 마련을 위해 또 열심히 일하며 살기는 싫다.
2년 뒤에 전세 계약이 끝나면 나가야 하지 않나?
주변에서 구할 생각이다. 전세지만 이 집은 나에겐 과분한 느낌이다. 내 옷이 아닌 느낌? 이 지역 소프트웨어가 좋아서 온 거기 때문에, 집은 더 좁거나 불편해져도 된다.
이주를 고민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었나?
내 자존감이 가장 취약해질 수 있는 부분을 가정해봤다. 장인·장모님께 혼나고 비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결정했다. 여기 오면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건 좀 욕심인 것 같다. 내가 만족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이 상처가 안 되더라. 만약에 그분들을 만족시켜드리는 게 내 만족이다? 그러면 여기 못 왔다. 만약에 이곳에 오는 대가가 아내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것이었다면? 그럼 아마 안 왔을 거다. 우리는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주변에서 만족하는 것을 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나도 이런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무시당해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 같다. 이걸 열 살 때 알았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웃음)
부모님을 비롯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어머니는 “너 정말 잘했다” 하고, 나는 “엄마, 나 지금 산책하는데, 구름이 참 예뻐” 이러면 참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직장을 가져야 된다” “나중에 무시당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 “왜 경쟁에서 벗어나려고 하냐” 이런저런 충고를 많이 하신다. 그렇다고 내가 내 삶의 옳음을 막 주장하고 논리로 싸워서 이기고 싶진 않더라. 내 삶이 평안하니까 다 흘려보내게 된다. 예전에는 성적이나 연봉에 있어서 '중간'은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여기 와서는 그런 기준을 측정하는 가늠자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세상의 기준이 더는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경쟁에서 벗어나려고 온 것도 있나?
경쟁을 피한다기보다는 이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내면의 평화가 더 찾아온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건 이게 누구에게나 옳은 방법은 아니라는 거다. 나라는 사람에게 맞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나는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에 욕심이 있는 것인데, 스포츠카 타며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욕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게 살아서 마음의 평화가 오면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살아야 내면의 평화가 깃든다. 이것은 사실 다른 말로 하면, 돈을 많이 벌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돈 많이 벌 능력이 있는데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는 거다.(웃음) 밤에 모닥불 보면서 멍때리는 게 좋고, 하루에 세 번 아이들과 산책하는 게 설레고,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애쓰는 집 근처 거미를 관찰하는 게 재밌다. 지금 아무 소속도 없이 하는 아르바이트도 너무 좋다. 밥도 주고, 운동도 되고. 20대 때 이런 일 했으면 더 좋은 일 얻고 이름 있는 곳에 소속되고 싶어서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내년이면 마흔인데, 이런 게 미혹되지 아니한다는 불혹인가 싶다.
‘도시 탈출’을 고민하는 독자에게 해주고픈 실질적인 조언이 있나?
돈이나 각자가 처한 환경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내 안의 안정이었다.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둘째 낳고 갑자기 마음이 안정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 전까지는 자기계발 욕구와 성장에 대한 강박감이 있었는데, 둘째를 낳으니까 바뀌었다.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고, 난 이미 엄청난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여기서까지 경쟁하며 로또 맞을 확률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확신이 왔다. 그 전에는 늘 노력해야 하고, 내가 살아가는 명분과 이유를 남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는데, 둘째 낳고는 그런 강박이 다 사라졌다. 본래의 내 인성으로는 아이들 교육 못 시킨다. 그냥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싸게 해주면 좋은 거라는 확신이 생기니 자신감이 생겼다.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독자 인터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나.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