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호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
복잡 미묘하고 신기한 인간의 삶에 대해 영국작가 존 파울즈는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열린책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에서 한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도시의 냉혹한 심장으로 끌려 들어간 인생이 아무리 불충분하고 덧없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인생을 견뎌 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강물은 흘러간다. 다시 바다로, 사람들을 떼어놓는 바다로.(649쪽)
모든 인생은 소외와 번민으로 가득한 어두운 밤을 지나곤 한다. 파울즈의 말대로 불충분하고 덧없고 절망적인 시간을, 하나님 없는 세상을 누구나 겪는다. 넘실거리는 물살에 마냥 흔들리는 게 인생이라고 체념하거나 냉소를 품다가도, 곧 숨을 크게 내쉬고 생명을 붙잡으려 용을 쓴다. 흔들림 자체를 멈추게 할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는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의 저자 토마시 할리크는 흔들림을 견디고 마땅히 존재할 힘을, 용기를 지닐 방법을 알려준다.
우리 안의 삭개오들
할리크는 공산정권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며,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교회에서 활동했다. 1989년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자유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광장에 선 모습을 목격했다. 이전 생활과 달리 너무 다양한 선택과 필요성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혼란을 겪다가 이내 극심한 피곤과 무력감에 빠졌다. 이들 중에는 그간 숨겨온 신앙을 지지해줬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해를 가했던 사람도 있었다. 여기서 할리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또 다른 한 무리를 목격한다. 이들은 바깥세상으로 나온 그리스도인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딱히 합류할 뜻도 없어 보였고, 뒤로 물러서 거리를 두었지만 궁금증과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바로 “호기심과 기대, 관심과 수줍음, 때로는 일종의 죄책감과 ‘합당치 않다’는 감정이 이상하게 뒤엉켜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숨은 삭개오(자캐오)들이었다.(책의 표기와 달리, 인명 및 호칭은 개역개정을 따랐다. - 필자)
누가복음 19장은 삭개오가 키가 작고, 세리장이며 부자였다고 전한다. 이 몇 마디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삭개오의 상은 다수가 당연히 여긴 정서를 공유하지 못한 소외자이자 개인주의자, “경계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둘러싼 열정적인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예수의 말과 행동에 쏟아지는 분노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할리크가 보기에 물질세계 너머에 관심은 있으나 선뜻 신앙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사람, 신앙이 있음에도 늘 의심하고 고민하는 사람, 구호를 외치는 신앙을 크게 거부하는 사람 모두 이 시대의 삭개오들이다.
삭개오들은 불안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해 신중히 질문하고 숙고할 줄 안다. 의기양양한 종교인들이 성급하게 던진 그들만의 해답에는 이미 질렸고 그 맹목이 향한 하나님은 정작 숨은 현실에서, 마땅히 어디 속하지 못한 채 질문을 품고 가장자리를 맴돈다. 할리크는 책임 있는 무신론자들도 곧 이 시대의 삭개오들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이름을 불렀을 때 나무에서 급히 내려온 삭개오처럼, 책임 있는 무신론자들은 진리가 자신을 부르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망가진 교회, 변질된 신앙 언어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감지하려 귀 기울이는 이들이 지금도 교회 바깥 도처에 있다. 여러 가지가 얽혀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인생 앞에서 교회의 태도는 간혹 가혹하리만치 무례하고 오만하며, 이들에게 말을 거는 신앙의 언어는 일상과 동떨어져 공감을 얻지 못한다. 할리크는 “‘하늘나라는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와 같다’하신 예수님의 비유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말라 죽은 가지들 위에 이상한 새들이 자주 앉아 있는 나무를 위험하게 닮아가기 시작하고 있다”라는 요제프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을 빌려 생명력 잃은 교회를 무섭게 지적한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진중히 따져볼 줄 아는 능력, 타인을 향한 사랑과 개방성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능력,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할 능력을 잃은 교회의 행태는 숨구멍이 막힌 줄도 모르고 할딱대면서도 숨은 쉰다고 자위하는 꼴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교회는 누가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질식하고 말 것이다.
뻔한 신앙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평강과 은총은 주일 예배시간 설교의 도입부에 머문 지 오래다. 우리의 말, 생각과 행동은 살과 살이 맞닿은 관계나 공동체 안에서 어떤 평강과 은혜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에서 끄집어 낸 단어의 뜻을 곰곰이 음미하기도 전에, 그 단어들을 생활에서 경험하기도 전에, 우리는 섣불리 이 단어들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미워하며 판단한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허공에 떠도는 겨 같은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낸다. 더 끔찍한 일은 마치 우리 입술에 말의 권위가 주어진 듯이 상투적이고 능숙한 구호로 통제하고 조련하려 드는 것이다. 신앙의 표현들은 단박에 옹골찬 상징이 돼버려 얽히고설킨 맥락을 깡그리 무시한다. 마치 진공에 동동 떠 있는 듯 냄새와 색깔, 촉감마저도 똑같은 얼굴을 모두에게 요구한다. 비대면 시대이기에 이런 행태는 줄어들었을까? 이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소셜네트워킹 플랫폼 담벼락마다 남긴 공해에 가까운 단어들이 눈앞을 스친다.
망가진 교회 안에서 앵무새처럼 변질된 신앙 용어만 반복하다가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목이 찢어져라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바깥에서 맴도는 의심과 구도의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을 할 수 있으며, 세상과 인류에게 벌어지는 수많은 참상을 두고 어떤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호흡이 가쁜 교회에 어떻게 찬 숨을 불어넣고, 신앙 언어에 쌓인 끈적끈적한 더께를 무엇으로 걷어낼 수 있을까? 여기서 할리크는 아주 신박한 제안을 한다.
나는 무신론자들에게 동의할 때가 많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믿음만 빼고는 종종 거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 (9쪽)
할리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없는 세상을 체험하지 않고서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 인내의 얼굴인 믿음과 소망, 사랑의 뜻을 깨닫기는 어렵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멀리 계시는 느낌을 인정하고, 무신론자들처럼 주저하며, 가만히 쳐다보고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할리크는 독단적으로 확신하지 않는 태도, 낯설고 불편한 감정과 의심을 그대로 내비치는 언어,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볼 뿐만 아니라 경계 바깥도 의식할 줄 아는 넓은 시각이 종교의 망상을 걷어내는 데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불신앙의 역설
맹목적인 신념과 신을 포기하는 불신앙은 서로 매우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사실 둘 다 충분히 의심하고 질문을 던질 만큼 인내할 줄 모르기에 나온 모습들이다. 할리크는 어두운 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이를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러 다른 길로 우리를 이끈다. 그의 제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신의 죽음의 전령인 니체와 ‘교회 박사’로 불리는 리지외의 소화(小花) 데레사(St. Therese of Lisieux)를 함께 소환했다는 점이다.
니체처럼 19세기를 살았던 데레사는 가르멜회의 젊은 수녀였다. 그가 교회 박사가 된 이유는 신학적으로 탁월한 글을 기록해서가 아니다. 심지어 신학논문은 한편도 남기지 않았다. 데레사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동안, 대답 없는 질문들의 십자가 위에서 신앙이 죽는 경험을 했다. 교회의 심장 안에서 사랑이 되겠다던 어린 시절의 열망이 어떻게 시들어 가는지 철저히 느껴야 했다. 신앙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 완전히 부재한 공허의 한복판을 지나며, 그는 모든 확신과 빛을 잃었다. 니체의 광인에게 전해들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에게도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가 죽음을 앞두고 영적 갈등과 내적 어둠을 겪으며 한 고백은 비신자들의 무신론을 해석해 볼 여지를 주었다. 인생은 하나의 상징이나 얼굴, 단번의 판결이 아니며 삶의 밀도와 결이 한 사람 한 사람 다르기 때문에 공감과 연대는 사실 말만큼 쉽지 않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데레사의 아픈 체험은 우리를 한데 묶을 요소는 고통뿐이라고 깨우쳐주는 듯하다. 수녀가 되기까지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그는 이제 신앙 대신 열렬히 사랑하는 일을 붙잡는다. 시련으로 타인과 하나 되는 사랑은 신앙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완성해간다. 십자가에서 죽고 묻힌 신앙은 부활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된다.
할리크가 우리에게 제시한 의심자, 구도자는 자기중심적이거나 목적 없이 떠도는 인간과는 다르다. 삭개오는 궁금했던 예수를 보기 위해 나름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예수가 부르는 소리에도 재빠르게 반응했다. 우리는 나무 위로 조심스럽게 오르는 삭개오에게서 무언가를 추구하고 주시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추구, 주시, 타인을 향한 개방성, 자기 초월의 근본 원천이시다. 예수의 말과 행동에서 온전히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개방성은 삭개오와 같은 이를, 신앙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타인들을 향한다. 즉 하나님은 숨은 것 같지만 사실은 지켜보고 계신다.
가장자리에 거하는 경계인의 삶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예수를 통해서도 직접 밝혀진다. 누가복음을 비롯한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는 당시 통상적으로 확실한 것,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을 모조리 무시했다. 종교 권력을 형성한 제도와 상징, 성전과 제사장, 서기관과 율법학자, 바리새인 등 종교·사회·정치의 중심과는 날선 긴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경계인들에게는 다정했다. 이들의 이름을 알아 불러줬고, 누구보다 이들을 편애했다. 나아가 예수는 선포했다. “행복하여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가운데에, 심장부에 올 것이다.”(36쪽) 예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자리로 초대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알 수 없는 하나님
역설적으로, 신앙과 불신앙은 숨어계신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서로 근접해 있다. 할리크는 책 전체에서 여러 사례들과 명민한 문장들, 다정한 말투로 이 감추임조차 역설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계시기에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 우리의 얼굴에 가장 가까이 계신다. 인간이 거울로 얼굴을 비추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라는 거울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예수 때문에, 이웃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가 다른 인간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들을 예수가 새로이 변모시킨다. 니체는 이 지점을 잘 묘사했다.
할리크는 니체가 신의 죽음을 곧 구태의연한 인간의 죽음, 오랜 인류와 인성의 종말이라고 이해한 점을 지적한다. 새로운 인간, 초인이 죽음이 비워놓은 자리에 와서 존재해야 한다. 니체의 명백한 경쟁자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간성이 도래했음을 선언했다. 할리크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모든 형태의 어둠, 십자가에서의 버려짐, 생명의 새로움 전부를 포함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그대로 노출된 부활절의 역설, 파스카의 역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 파스카의 승리는 지금 바로,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 너무 가까이 있어 알 수 없는 하나님,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이웃의 얼굴을 다시 발견하기까지,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힘이 이 세계 안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한다는 충만한 믿음을 갖고, 파스카의 거울에 비춰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살 것임을 소망하며, 매일 신앙의 대상을 죽이고 열렬히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행복하여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함께 읽을 책
• 토마시 할리크·안셀름 그륀, 모명숙 옮김, 《신이 없는 세상》(분도출판사, 2018)
• 토마시 할리크, 오민환 옮김, 《상처 입은 신앙》(분도출판사, 2018)
• 제럴드 싯처, 신은철 옮김, 《하나님 앞에서 울다》(좋은씨앗, 2020(2005 초판))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