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

이 책은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쓰고 싶었다.” 거장 야로슬라프 펠리칸(1923-2006)을 알지 못해도 이 문장을 읽으면 저자가 지녔던 깊은 바람과 이를 성취해낸 뿌듯함이 느껴져 설레게 된다. 동시에 엄청난 노력이 응집된 책 한 권을 읽게 되리란 기대가 솟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2,000년간 일반 문화에 영향을 미친 예수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필요에 따라 빚은 예수상(image) 이야기다.


문화사가로 예수상 살핀 야로슬라프 펠리칸
신약성서는 예수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다고 말한다. 이런 신학적 본질을 지닌 예수의 의의를 각 시대는 매번 재해석했다. 그래서 어떤 집단, 세대가 만든 예수상이 다른 이들의 입장과 일관되지 않거나 심지어 모순되기도 한다. 저자는 문화사학자의 시각으로, 처음 성서가 기록됐을 것이라 추정되는 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문화, 교회, 정치, 사회, 철학 등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그 시대정신이 어떤 예수상을 그려냈는지 좇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에 관해 쓰는 것만큼 참된 자신을 드러낼 만한 역사적 작업이 없다는 아주 현명한 관찰을 했다. 특정 시기를 배경으로 창조된 예수의 상에 관해 쓰는 것은 예수를 말하는 것 못지않게, 심지어 더 많이 그 시대를 말해줄지 모른다. 이런 예수상에 대한 기대로 여러 사건들, 역사가 남긴 고급 문화재와 유수의 문학 작품, 예술 작품에서 당시 인류가 상정한 예수상을 꼼꼼히 읽어내는 작업은 매우 흥미롭고 지적이며, 때로는 도발적이다.

이 방대한 작업을 기꺼이 해낸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예일 대학교 역사학과 석좌교수이자 저명한 교회사가였다. 종교개혁과 중세철학, 동방정교 전통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사상, 아우구스티누스와 키르케고르 등 특정 시대와 종파에 국한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역사 전반을 연구한 엄청난 활력을 지닌 학자였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교리를 다룬 신학 연구서들을 저술했는가 하면 마르틴 루터의 작품을 영어로 편집, 소개하기도 했다. 예수와 마리아를 밀도 높게 다룬 그의 책들은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성공적이었으며, 미국 의회 도서관이 수여하는 존 W. 클러지 상 등 인문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수상을 했고, 빌 클린턴 행정부 때는 미국 백악관 대통령 산하 예술·인문학 위원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신앙 여정 역시 특별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슬로바키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와 정교회 신자인 어머니 아래서 태어나 자란 펠리칸은 그 자신 역시 오랜 기간 루터교 목사로 활동하다 말년에 정교회로 옮겨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사회를 넘나드는 그의 광범위한 활동과 지적 수준, 다양한 교회 전통의 경험이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쓰고 싶었다로 시작하는 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변하는 예수의 개념
펠리칸은 자연스럽게 신약성서에서 1세기 예수상을 찾는다. 복음서에 실린 예수라는 그림 자체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전통이 빚은 예수상으로, “사진보다는 그림에가깝다. 예수의 메시지들도 랍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로서 유대교 맥락에서 더 잘 해석된다. 동시에 유대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및 주로서 예수상을 확장한다. 예수의 승천 후 종말(파루시아)이 지연되자 다시금 예수상을 재형성할 필요를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와 예수를 연결하기 시작한다. 시간과 공간, 역사와 세계 자체에 영향을 미친 예수상을 빚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에우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의 기술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예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나와 베르길리우스, 소크라테스 등 이방 문학과 그리스-로마 시대 쿠마에의 시빌레 신탁을 발판 삼아 이방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한 후 4-5세기를 거치며 예수상은 만왕의 왕이 돼 곧 크리스텐덤 세계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한다. 신플라톤주의와 제도화되는 교권과 맞물리며 로고스로서 신성한 이성을 구현한 예수상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열쇠가 되며, 사람의 아들로서 인성까지 갖춰 죄로 물든 인류와 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에서 온전한 중재자 역할을 감당한다. 여기서 펠리칸은 거대한 주제들을 어렵고 추상적으로 다루는 교부들의 글을 사려 깊게 설명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비잔틴 문화에서 성상(이콘) 옹호론자들과 반대론자들의 논쟁 속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세상을 다스리는 수도사의 원형, -디오니시우스 등 신비주의적으로 경험한 영혼의 신랑이라는 개념, 토마스 아 켐피스가 저술했고 아씨씨의 프란치스코가 실천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빗댄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의 표상으로서 예수상이 중세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14-16세기는 에라스무스, 단테 등 인문주의자들의 사상 속 드러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수상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육신한 예수를 본보기 삼는 문화를 보게 된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성서번역, 설교권 확장 등에서 더욱 가까워지고 친숙해진 동시대 사람이 된 예수상, 이후 벌어지는 종교전쟁 속에서 세속정부와 교회의 대립, 각 전쟁관을 대표하는 예수상을 설명한다. 이어 17세기, 계몽주의와 자아의 발견으로 개인화되고 상식화된 교사로서 예수상, 18-19세기,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에 반대해 등장한 슐라이어마허와 콜리지, 에머슨이 주창한 낭만주의 속 영혼의 시인인 예수상이 다채롭게 묘사된다. 20세기 들어서 북미와 남미에서 해방자 역할을 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넘나드는 온 세계에 속한 그리스도를 묘사한 후 예수상의 역사는 마무리된다.

펠리칸은 1차 문헌이 지닌 특권을 강조하는 듯 거리낌 없이 원전을 길게 인용한다. 1세기 이후 서구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15-16세기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과 18-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제국주의의 식민지화를 통해 예수상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어떻게 전해졌는지 살피는 과정은 마치 유럽의 박물관과 유적지를 꼼꼼히 돌아보는 것 같다. 예수상과 관련해 근대 이후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 문학작품을 조각조각 읽으며 갖는 감동이 적지 않다. 자유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엿보는 일은 버겁고 힘들지만 충만한 지적 유희를 선사한다. 하나하나가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여러 예수상의 원류를 발견하는 계기가 돼 신기하기도 하다. (이 두텁고 꽉 찬 책 한 권을 다 읽고 덮게 되면,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한 학기 충실히 배운 후, 마지막 주 모든 걸 쏟아내 기말고사를 보고 교실을 빠져나온 느낌이 들 것이다.)
 

예수를 누구 손에 맡길 것인가?
예수상의 변화는 인간 존재 당위성의 변화로 읽힌다. 인간과 사회가 예수의 개념을 이용한 방식, 그의 면모들을 단편적으로 사용해 자신을 이해받고 발 디딜 장소를 다져온 방식으로 말이다. 촘촘하게 많은 정보로 논의를 이끄는 펠리칸의 속도를 매우 바쁘게 따라가며 예수상을 톺다가 그 끝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질문은, 이제 예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지금 누가 예수상을 빚고 있는가이다.

얄궂게도 20세기에서 멈춘 예수상 추적에 잇대 새 천 년의 초반 20년을 지나는 한국의 예수를 생각해본다. 우선 누구나 동감하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예수상은 많은 의미로 광화문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몇 년 전, 한 외국인 남성이 오늘날의 교회는 타락했어요. 예수님을 찾으세요, 혼자서라는 글귀를 형광색으로 적은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뉴스의 배경 사진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 당분간 안 받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양해의 글귀를 써 붙인 음식점이 나왔다. 두 장면이 담지한 교회상, 이런 교회가 이용한 예수상을 떠올릴 때 씁쓸함을 넘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싶어 마음이 아린다.

하루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았는데, 맞은편 탁자 너머로 랩톱을 켜고 열심히 타자를 치는 한 여성이 보였다. 랩톱 커버에는 체 게바라 얼굴이 홀로그램 스티커로 붙었고 티셔츠 앞면에도 체 게바라 얼굴이 마블링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감각 있는 차림새를 별생각 없이 쳐다보다가, 불현듯 부패한 자본주의가 양산한 빈부격차와 남미 사람들의 피폐한 삶을 뒤엎고자 인생을 고스란히 바친 혁명의 화신이 자본주의 상징들에 안착한 모습에서 묘한 역설을 느꼈다.

예수상도 이와 비슷하다. 신약성서가 일러주는 구세주 예수가 상업문화 속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이 충돌이 충격으로 와 닿지 않을 만큼 우리는 무감각해졌다. 유럽과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는 파벨 야쉬추크(Pawel Jaszczuk, 1978~)라는 폴란드 태생의 사진작가는 예수의 이미지가 무분별하게 사용된 모순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는데, 그의 사진 속에는 속옷, 초콜릿과 사탕 포장지, 목욕제품 등 다양한 상품에 새겨진 예수상이 나온다. 성육신한 예수를 물질화하는 방식이 그대로 찍힌 것이다. 최근 개최된 그의 사진전 제목인 ‘¥$U$’(JESUS)는 상업화된 예수상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예수를 이렇게 둬도 괜찮을까? 타락해서 도망 나와야 하는 교회, 식당에서도 안 받아주는 교회가 이 시대의 예수상을 빚도록 그냥 둬도 되는지, 또는 상업문화 속 미끼로 자족하게 둬도 되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호기롭게 신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일목요연하게 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루터의 반박문을 다시 요구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많은 언변과 선포가 온라인 세상 속에서 금세 복사돼 모든 곳에 게시되는 수단 좋은 사회를 살고 있다.

슈바이처는 끝내 유명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포기하고 예수에 대해 그는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알지는 않는다. 사실 거의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주님은 누구시냐고 질문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결국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지극히 강하시며, 항상 계시되 어디에 의존해 계시지 않으시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나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라는 원점으로 돌아간 고백을 하고 만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확신하고 교만하게 단정하지만, 사실은 펠리칸이 말한 예수상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 속에서 좌표를 수정하며 살 뿐이다.

그렇다면 개혁의 도화선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삶, 무용한 삶일지 모른다. 거창하고 화려한 선언이 아니라 너무 소박해 눈에 띄지도 않는 일상 말이다. 우리가 예수와 교회를 지켜낼 영웅인 것처럼 포악을 떨며 앞장서는 대신 공중의 새도 들풀도 입히고 먹이는 분에게 의존해 사는 일상, 그래서 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옳은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도해보는 일상, 화려하게 소비하는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손과 발로 노동하는 일상 말이다.

예수를 누구의 손에 맡길 것인가?

 

함께 읽을 책

스티븐 프로테로, 노동래 옮김, 아메리칸 지저스(새물결플러스, 2020)

마커스 보그, 남정우 옮김, 예수 2000(대한기독교서회, 2003)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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