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호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중, 1935년 완성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다리라는 작품이 있다. 회화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충실히 따른 그림으로, 높은 산과 폭넓게 흐르는 강, 이를 둘러싼 뿌연 물안개가 낀 풍경은 한국의 여느 산자락 경치를 보는 듯 전반적으로 익숙하다. 문제는 그림 전면에 등장한 다리다. 강을 가로지르는 실제 다리의 중간은 끊어져 있는데, 강물에 비친 다리의 모습은 끝까지 이어져 있다. 의식이 언제나 실재를 반영할 것이란 전제는 어쩌면 착각일 수 있음을, 실재와 의식에는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그림이다. 오랜 기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의식의 권위가 무너져 내린다.

 

하나 = 여럿?
우리는 충분히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모든 생각과 인상이 우리 자신을 절대 속이지 않는다고 섣부르게 확신한다. 특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하지만, 관계성을 무시한 문화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은 결국 개별성을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개인을 전체로 순응시킨다(상업광고가 일으키는 유행과 이에 금세 순응한 이들이 온라인 공간 안에서 소위 패션피플이나 인플루언서가 되는 풍조, 이대로 자신을 특별하게꾸미려는 개인들을 떠올려 보자). 개인은 특별해지기 위해 모두를 획일화하는 물질 문화에 귀속된다. 초현실주의 그림이든,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든, 우리는 이성이나 의지 같은 고정된 특성만으로 환경과 인간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온전치 않은지 생생히 경험한다.

영원하고 고정된 것을 향한 열망, 고정과 순환에서 추구하는 안정감과 절대성이 다원성과 다양성을 억압하고, 각자에서 공통분모를 뽑아 하나로 통일시킬 위험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근대 이후 개인의 자아가 존중되면서 이런 획일성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사실 현대성은 통일성과 개별성의 조화를 이루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에 콜린 건턴은 하나 셋 여럿에서 현대(또는 포스트모던)의 도전에 반응하는 신학의 대안적 모습을 구체화하며, 특히 삼위일체 신학으로 현대성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구의 시작에서 건턴은 현대성의 시기에 대해 정확한 경계를 언급하지 않는데, 현대성이란 단일 구조가 아니므로 단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일련의 도그마들과 실천들이 공통으로 향하는 방향, 풍조에서 현대성을 파악하고 이 안에 포스트모더니티를 포함시킨다. 건턴이 보기에 현대성은 두려움 없고 호기심 많고 합리적이고 자립적인 개인들의 문화를 약속했지만, 그것이 낳은 것은 무리 사회, 즉 불안하고 소심하고 순응적인 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으며, 지극히 진부한 문화였다.”(28)

 

현대성의 변증법이 낳은 문제들
현대성은 세계와 신체에 비관여하는 접근 방식과 건턴이 도구적 태도라고 부르는 접근 방식, 즉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타자를 이용하는 접근 방식을 촉구한다. 타인은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존재가 아니며, 통합의 일부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항해야 할 거짓 이유를 제공하고, 선한 창조 질서에 통합되기보다 세계를 외부에 설정한 후 위압적으로 이용하게끔 교만한 의지를 돋운다. 이런 현대적 비관여는 세계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좌표를 갖고 위치하려면 우리 역시 세계의 일부임을, 관여됨을 깨달아야 한다.

건턴은 현대성이 야기한 문제들이 정작 완전히 새롭지 않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게서 유사하게 발견되는 비관여 정신에 대항해 국가를 저술했으며, 계몽주의가 일으킨 하나님의 변위에 대해 19세기 낭만주의에 속한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이런 플라톤 사상을 재발견했다. 건턴은 플라톤과 콜리지가 제시한 관여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앞선 시대와 달리 현대적 비관여의 경향에서 추가로 발생한 문제를 비로소 밝힌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비관여함을, 그래서 삶이 소외되고 파편화됐단 사실이다. 사람과 세계가, 사람과 하나님이 찢어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하나와 여럿, 단일성과 개별성을 관련시키고자 벌인 투쟁을 현대성 역시 그대로 치르고 있다. 우주의 양 측면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은 현대성 문제에서도 핵심이며, 최근 수십 년 동안 단일성과 다원성, 또는 하나와 여럿 중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른 사회(집단주의와 개인주의)에 제시된 전망 및 실질적인 결과는 다양했다. 이런 질문은 고대인들이 인정했듯이, 우주에 대한 지식과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연관되기에 더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는 우주론과 사회질서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런 점에서 건턴은 현대성을 인류가 자연의 결정에서 자유로워진 환경에서 자율성을 획득한 시대, 이를 달성하려고 시도한 시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관여에 의한 분리는 파괴적이었다. 우리는 우주를 통일되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원성을 존중하는 조화된 통일이 가능한지 묻게 된다.

건턴은 전반적으로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한 (또는 타협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비롯된 하나의 폐단이 현대성에까지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영지주의에 가깝도록 영과 육을 나눠 영을 실재로, 육을 질료로 국한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형성하고 이해하게끔 토대를 구성했다고 본다. 영원/시간 역시 분리하여 이해한 반면, 시간과 죄성을 면밀히 구분하지 않는 그리스 사고는 그대로 받아들여 종말론에 변위를 일으켰다는 책임을 지우는 듯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 아래서 발전한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 해석과 더불어, 계몽주의 이후 하나님이 변위된 잘못은 칸트나 헤겔에게 묻기도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더 격상시켰기 때문에 역사가 하나님으로 변위됐다고 언급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개방적 초월자와 창조 신학
건턴은 현대성이 야기한 문제의 근원은 신학적이므로, 신학적인 전망이 다시 제시돼야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한계를 이레나이우스의 총괄갱신, 시간 지향적인 그리스도론과 성령론, 동방정교의 삼위일체 관계인 페리코레시스(상호침투, 상호적 구성) 개념 등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계몽주의에 이은 칸트와 헤겔의 문제는 콜리지의 사상에 의존해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보기에 현재 우리는 칸트의 비판과 이후 작업이 객관적 진리라는 생각 자체를 의심하는 상황, 포스트모더니티가 지닌 균일화된 메타서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가능성을 통제하려 드는 상황에서 하나 또는 여럿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회피하거나 철회하지 않으면서 개별성을 유지할 방안으로 건턴은 개방적 초월자들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다. 삼위일체를 관념들 중의 관념이라고 봤던 콜리지의 의미를 확실시하면서, 건턴은 관념과 초월자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한다. 관념과 달리 초월자는 모든 존재의 표시이며, 관념은 초월자를 생성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개방적 초월주의자들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무조건적인 대립조차 초월해야 한다. 건턴은 삼위일체적으로 발전시킨 초월자들이 고대와 현대 세계 모두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기며, 초월자들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창조 질서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 관계성, 개별성, 시간성, 즉 진선미라는 세 초월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의 위상과 관계된 질문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기초해서, 다원성을 사물들의 존재 안에 포함시키는 작업이 가능하다.

이어 관계됨의 신학을 추구하며 현대의 현세성의 문제,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도 삼위일체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고자 시도한다. 공간과 시간에 대해 적절히 이해할 만한 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의 적절한 통합을 가능케 할 개방적 형이상학 혹은 창조 신학을 제안한다. 이런 신학으로 참 인간이 되기에 필요한 자유 및 새로운 타자를 향한 개방성을 유지하는 실재로 우리를 이끈다. 세계 안에서 관계성을 확보해 개인의 한계, 의식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런 존재론을 얻기 위해서는 창조와 구원의 관계, 즉 신적 경륜에 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 건턴은 이레나이우스의 총괄갱신 사고를 빌려와 하나님의 창조, 유지, 구속 및 완성하는 활동으로 시간과 공간에 독특한 관계됨의 역동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의 질서 특유의 존재론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빌려와 시간 안에서, 시간을 통해서, 시간의 창조자의 행위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음을 보인다. 창조된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그 질서에 시간도 의존해야 한다.

건턴은 신적 경륜을 이해하기 위한 초월자로서도 페리코레시스를 제안한다. 경륜은 관념이고, 페리코레시스는 결과적으로 초월자이다.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관념을 다양한 가능성으로 연결시키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토록 역동적으로 상호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위격이 페리코레시스 관계에서 이룬 일체에서 우리는 인간 개인들이 서로의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 맥락에서 인격이 형성되고 인간성을 얻을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인간 상실의 문제, 소외의 문제를 찾고,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분석 및 대안을 제시한 흐름은 다층적이고 많은 사고가 오가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현대에서 표면적으로 대두되는 여러 문제를 떠올릴 때 또 금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현상 자체는 인정할 수 있고, 심지어 이런 지적과 원인 파악은 매우 통찰적이며 지혜로워 보인다. 다만 이에 대한 모든 원인을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자체로 돌리는 자세에서 누명을 씌운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인간적, 시대적 한계를 수긍하는 것 못지않게, 건턴의 통찰 역시 아주 오래전 고찰임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이 책은 1992년 뱀턴 강좌에서 8회에 걸쳐 진행한 공개강좌다). 이 뛰어나고 해박한 논의 역시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여러 부분에서 수정되고 보완해야 할 기회를 놓쳤을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다리
마그리트 그림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다리라는 그림의 제목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라고 불리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단일성을 옹호했던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다원성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만물이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고 봤다. 세상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변하므로 세계는 결코 정지해 있지 않다. 세상의 원리는 고정이나 안정이 아니라 변화 자체이다. 오직 변한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이어진 다리가 실은 끊어진 다리일 수 있고, 그 다리를 비춰 보여주는 강물마저 한순간도 동일한 강물일 수 없다.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균일화돼 획일적인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전적으로 보여준다. 여럿을 무시한 하나는 폭력적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진리로부터 우리를 떨어뜨려 놓기까지 한다.

 

대림의 기간이다. 태초에 혼돈하고 공허하여 어둠이 짙은 땅 위를 하나님의 영이 운행했듯, 2천 년 전 두려움에 떠는 한 어린 소녀를 성령이 덮었다. 변화로 인해 초래되는 새로운 상황에서 거짓이 아닌 진정한 보편자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그와, 인간의 의대로 선택하지 않은 그의 약혼자 덕분에 곧 성탄을 맞는다.

하나님 형상으로서 각자 인격이 회복될 때, 그래서 개별성이 회복될 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창조주인 성부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부담 없이, 끊어진 다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성부에게 이끌려 간다. 우리와 우리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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