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호 편애하는 리뷰]
누군가 내게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막장 드라마 보기’라고 대답하곤 한다. 최근 시즌2가 막을 내린 SBS 〈펜트하우스〉는 ‘길티’의 궁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회 상식의 한계를 넘어섰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부활’하는 수준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이어서 막장 드라마에 단련되어 항'막'력 높은 나조차도 눈을 질끈 감을 때가 많았다. 〈펜트하우스〉뿐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 소위 ‘막장’으로 분류될 만한 드라마가 부쩍 늘었다. 이런 막장 드라마는 왜 죽지도 않고 되살아나는 것일까?
죽지도 않고 더 강력해진 ‘김순옥 월드’
〈펜트하우스〉는 막장 드라마 중 가장 자극적인 서사를 통해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적극적으로 재현한다는 면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드라마 속 폐쇄적인 상류층 공간 ‘헤라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의 면면은 사회적 불의의 총합이기도 하다. ‘절대악’이자 헤라팰리스 ‘펜트하우스’의 주인인 주단태는 ‘제이킹홀딩스’라는 건축회사 대표로 부동산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그의 목표는 아예 ‘주단태 월드’를 건설하는 일이다. 주단태와 쌍벽을 이루는 천서진은 유명 소프라노이며 ‘청아재단’ 이사장이다. 청아재단은 청아유치원에서부터 청아예고까지 소유한 사학 재벌이다. 몇 해 전 방영된 JTBC의 〈스카이 캐슬〉이 ‘서울대 의대’ 입학을 위한 입시 전쟁터였다면, 〈펜트하우스〉는 청아재단을 중심으로 ‘서울대 음대’ 입학을 위한 각종 비리를 자행한다. 학교 폭력도 빠지지 않는다. 청아예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학폭’은 어른들의 세계만큼 폭력적이다. 물론 이 ‘악의 연대’에 법과 정치가 빠지면 섭섭하다. 법조 재벌가인 ‘빅토리 로펌’의 외아들이자 이혼 전문 변호사인 이규진은 시즌2에서 국회의원이 된다. 막장이라는 요소를 걷어내고 본다면 〈펜트하우스〉는 부동산 투기, 학교 폭력과 사학 비리, 법과 정치의 문제 등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하는 현상들을 한데 모은 ‘사회 고발극’ 혹은 ‘풍자극’에 가깝다. 게다가 시즌2에서 ‘천수지구’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해 투기에 몰두한 헤라팰리스 사람들이 몰락하는 사건은 최근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LH 사태’를 떠올리게 하니 〈펜트하우스〉는 의도치 않게 가장 동시대적인 드라마로서 우리 사회의 ‘거울’이 된 셈이다.
물론, 그 거울은 일그러진 거울이다. 〈펜트하우스〉가 재현한 사회는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윤리적으로는 파산한 디스토피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불법과 폭력과 배신의 에스컬레이팅밖에 없다. 그래서 거의 매회 폭력과 죽음이 발생하지만, 그 폭력에 죽어간 생명들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가족과 공간과 재산에 피해가 올까 두려워 사건을 은폐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죽음의 공간에서 파티를 벌인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폭력과 혐오를 묵인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은 물론, 복수 또한 속물적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증오하는 상대를 망하게 하려는 도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권선징악’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선’(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선(善)의 선(line)이 무너진 세상
선(善)은 착하거나 윤리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선(line)은 지켜야 할 기준이나 표준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선(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통의 윤리적 기준(line)이나 규칙(rule)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펜트하우스〉는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디 〈펜트하우스〉뿐일까. 막장 드라마로 분류되지 않더라도, 최근 방영된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면, 선과 악의 선(line)이나 사회적 규칙(rule)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대표적으로 tvN 〈빈센조〉가 있다. ‘기업-사법기관-정치’라는, 마피아보다 더한 불의한 권력 카르텔에 대항할 ‘안티 히어로’로 이탈리아 마피아 콘실리에리(Consigliere)였던 빈센조를 배치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작가는 현실의 ‘바벨 그룹’을 중심으로 한 마피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힘을 내세워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빈센조가 자신을 “쓰레기를 치우는 쓰레기”라고 명명한 것처럼 악이 강할수록 악에 대항할 자리에 선한 것들이 놓이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벨 그룹 피해자 가족이 바벨 그룹 측에 의해 살해당하자 일말의 선(善)의 선(line)을 지키던 빈센조는 이런 말을 한다. “이분들이 흘린 피의 대가, 반드시 치르게 할 겁니다. 이건 나한테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룰에 대한 문제예요. 확실한 건 지금 네 분(살해당한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마치 ‘법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저들이 룰을 어겼으니 나도 룰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펜트하우스〉나 〈빈센조〉가 재현하는 사회는 룰, 즉 공적 시스템이 무너진 사회다. 〈펜트하우스〉의 모든 것은 사유화되고, 복수조차 사적으로 이루어진다. 〈빈센조〉는 한국 사회에서 기업과 사법기관과 정치는 마피아보다 더한 곳이라 선언하고 조롱하며 ‘마피아’를 구원자로 여긴다. 이렇게 공적 시스템과 선이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 놓이고 있는가? “요새 시대적 트렌드는 용서와 화합이 아니라 척결과 분리”라는 〈빈센조〉의 대사처럼 정말 ‘척결과 분리’가 새로운 정의가 되고, ‘펜트하우스’를 향한 열망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이미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이기에 당분간, 어쩌면 꽤 오래 막장 드라마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더 자극적인 얼굴로 소환될 수밖에 없겠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