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상류사회’ 이야기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드라마 소재다. 압축적으로 성장한 신자유주의 사회답게 한국 드라마에서는 상류사회가 ‘재벌가’로 표상되곤 한다. 재벌가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는 언제나 흥미롭다. ‘막장 드라마’와 같이 주로 치정에 의한 갈등, 출생의 비밀, 음모와 배신 등 자극적 설정으로 점철되기에 관음증적 재미를 유발한다.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모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tvN 드라마 〈마인〉은 ‘효원가(家)’의 대저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입구에서부터 건물까지 차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넓은 정원을 지나면 ‘카덴차’와 ‘루바토’로 불리는 두 저택이 나타난다. 카덴차에는 효원가 맏며느리 정서현 가족이 살고, 루바토에는 둘째 며느리 서희수 가족이 산다. 이야기는 카덴차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 엠마 수녀의 회고를 빌려 사건이 일어나기 60일 전으로 거슬러 간다.
평화롭던 효원가에 ‘프라이빗 튜터’ 강자경이 입성하며 비극은 시작된다. 자경이 등장하면서 그간 은밀하게 숨겨졌던 치정 관계와 출생의 비밀과 각자의 욕망이 드러나고, 효원가 사람들은 파국의 길로 전력 질주한다. 여기까지 보면 재벌가를 중심으로 한 다른 막장 드라마의 문법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짜 나의 것을 찾아가는 강인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제작진이 밝힌 소개처럼 드라마의 중심은 ‘효원가’로 표상되는 가부장 사회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mine)을 지키기 위해 억압과 편견에 맞서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문을 나가는 방법
〈마인〉은 다양한 소품들을 메타포로 활용하는데, 특히 인상적인 소품은 4회에 등장한 ‘좁은 문’이라는 이름의 그림이다. 좁은 문틈에서 울고 있는 코끼리가 그려진 이 그림은 “좁은 문에 갇혀 울고 있는 코끼리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을지” 모른다는 엠마 수녀의 말처럼 레즈비언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서현을 비롯해 ‘계급’과 ‘정체성’과 ‘가부장제’라는 좁은 문에 갇힌 여성들의 사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코끼리 그림에 공명한 서현은 소년 화가에게 묻는다. “좁은 문에 갇힌 코끼리가 좁은 문을 나가는 방법은 뭘까요?” 생각에 잠긴 화가에게 서현은 그 대답을 작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얼마 후 화가가 가져온 작품에는 벽이 없었다. 코끼리가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 애초에 벽은 없었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한 발만 더 디디면 넓은 들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좁은 문틈에 낀 코끼리’ 메타포는 그동안 종종 등장하곤 했던 ‘벽을 부수는’ 여성들의 서사가 이제는 ‘애초에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본질을 깨닫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여성들의 서사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그들을 가둔 (허상의) 좁은 문은 무엇이었으며, 여성들은 어떻게 전진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서현에게 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라며 자신의 아들과 연애하는 ‘메이드’ 김유연을 비꼬는 다른 메이드들을 향해 서현은 이렇게 일갈한다. “신데렐라가 죽어서 귀신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얘기예요?” 그러고 난 후 유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만은 수혁이 엄마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먼저 산 사람으로서 한마디만 할게. 넌 이제 구시대 신데렐라 레퍼토리와 계속 싸우게 될 거야. 사람들은 네가 신은 유리구두가 깨지길 바랄 거고. 세상의 편견에 맞설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 너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네가 다치지 않는 결정을 하길 바라.”
서현의 이 말은 유연을 향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여성들을 비롯하여 ‘구시대 레퍼토리’와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 문화가 지긋지긋하게 반복해온 구시대 레퍼토리를 공들여 반복하는 듯싶다가 이를 전복한다. 다른 드라마라면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고, 서현은 감히 자신의 아들을 넘보는 메이드를 핍박했을 것이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자경과 희수는 ‘여적여’ 구도에 갇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자신들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계급과 입장의 차이를 넘어 연대한다. 이것이 〈마인〉이 비슷한 종류의 드라마와 다른 점이고 ‘코끼리가 좁은 문을 나가는 방법’이다.
서현, 그리고 연대하는 여성들(정서현들)의 대척점에는 효원가 둘째 아들이자 야심가인 한지용이 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낳은 자경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인간이다. ‘프라이빗 튜터’ 자격으로 자경을 다시 효원가에 입성시킨 지용은 자신을 왜 불러들였냐는 자경의 원망에 이렇게 대답한다. “하준이를 낳아준 너(자경), 키워준 희수, 함께 하준이를 위해서 공생하란 거야. 그럼 내 아들은 더 완벽해지니까.”
그러니까 〈마인〉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것도 모자라 여성을 가문과 아들을 지키는 도구로 여기며 억압하던 구시대 레퍼토리에 대항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명예롭게 전진”하는 ‘정서현들’의 서사다. 이들의 ‘언니’인 서현은 가부장을 넘어선 ‘가모장’의 품격을 보여주고, 그가 지키고자 하는 효원가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한다. 그는 약자이면서도 강하고, 자신의 ‘강함’을 자신 주변을 돕는 일에 현명하게 사용하며 그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도록 책임지는 사람이다. 〈마인〉은 정서현이라는 명예롭게 전진하는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