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호 편애하는 리뷰]
“‘법원권근(法遠拳近)’.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 현실에서 위기에 빠진 힘없는 약자에게 법이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 속 강하나 검사의 말이다.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위험한 말이지만, 법과 정의보다 권력과 주먹이 훨씬 가까운 상황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을 이들에게는 공감되는 말일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어떤 이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신뢰를 상실한 누군가는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것이다. 〈모범택시〉는 후자의 길을 걷는다. 택시 회사 ‘무지개 운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는,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의뢰를 받아 그들을 대신해 복수를 완성하는 ‘사적 복수 대행극’이다.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 현실에서
‘무지개 운수’ 대표 장성철은 부모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현장검증 자리에서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당한 후 ‘공권력’을 불신하게 된다. 그런 장성철이 기도문처럼 반복하는 말이 있다. “악에게 지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이길 거야!” 장성철을 비롯한 ‘무지개 운수’ 직원들은 이 말을 집요하고 성실하게 구현한다. 장애인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사회적 기업’ 젓갈 공장 고용주, 학교 폭력 가해 학생 일당, 불법 촬영물을 유통하는 ‘유데이터’ 박양진 회장, 보이스 피싱으로 불법 이익을 취하는 업체 등이 ‘무지개 운수’의 처벌 대상이 된다. ‘무지개 운수’는 이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않는다. 사설 감옥에 가두거나 폭파해버린다. 공교롭게도 장성철의 사무실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로마서 십이 장 이십일 절”이라고 쓰인 낡은 액자가 걸려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성경 속 명령이 어쩌면 낡은 액자 속 문자처럼 무력하게 여겨지는 시절이다.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며 “악은 견고하며 광활”하다는 tvN 드라마 〈빈센조〉 속 빈센조의 말처럼 공적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할 뿐 아니라, 견고하고 광활하게 ‘공공의 악’을 도모하는 데 활용될 때가 많다. 그렇기에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낡고 무력한 신의 명령은 ‘나만의 방법으로 이기라’는 새로운 명령으로서 신적 권위를 얻는다. 〈빈센조〉의 정의 구현과 〈모범택시〉의 사적 복수에 대중이 호응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정의를 ‘그렇게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다.
이런 흐름이 ‘지향’ 되어도 괜찮은 걸까? 이런 딜레마 속에서 JTBC 드라마 〈괴물〉은 앞의 드라마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물론 출발은 비슷했다. 경기도 문주시에 사는 청년 이동식은 쌍둥이 여동생이 열 손가락의 첫 마디만 남기고 실종된 것도 모자라 수사 당국에 의해 여동생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객사하고, 어머니는 정신을 놓아버린다. ‘무지개 운수’ 10개를 차려도 시원찮을 비극을 겪은 이동식은 경찰이 된다. 경찰이 된 그는 여동생 실종 사건을 비롯하여 20년 동안 끊이지 않는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용의자’로 의심을 살 만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라는 ‘괴물’을 찾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그 앞에 법적 근거와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찰대 수석 졸업생이자 차기 경찰청장 후보의 아들인 한주원이 부임한다. 한주원은 ‘법과 절차’에 관해 이동식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드라마 전반부가 주요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리며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후반부는 연쇄살인범이 만양슈퍼 사장 강진묵으로 밝혀진 이후를 다루며 다음과 같은 물음을 건넨다. “괴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혹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드라마는 이 물음을 위해 ‘드러난’ 괴물보다 ‘드러나지 않은’ 괴물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 장애인인 자신을 무시하는 여성들을 증오하여 살인한 강진묵이 ‘드러난’ 괴물이라면, 자신의 욕망과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20년 전 교통사고를 은폐한 경찰청장, 문주시 시의원, 신도시 개발 전문 JL건설 대표 등은 ‘드러나지 않은’ 괴물을 표상한다.
이런 ‘괴물’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괴물〉은 사적 복수와 그 복수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며 ‘사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다른 드라마라면 신속하게 단죄했을 일도 〈괴물〉은 심판받아야 할 이들을 법적 테두리 안으로 몰아넣기 위해 신중하게 공을 들이며 근거를 쌓는다. 심지어 범인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에도 이동식과 한주원은 서둘러 체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사체 없는 살인 기소는 불가능”하다는 법 때문이다. 결국 이동식과 한주원은 긴밀하게 공조해서 ‘드러나지 않은’ 괴물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며 그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운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불법을 자행한 것에 관해 심판받는다. 즉, 자신들도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하며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괴물〉의 이런 선택은 중요하다. 법과 정의는 멀고, 권력과 주먹이 가까운 현실에서는 ‘사이다 정의’가 잠깐의 시원함을 줄 수는 있겠지만, 궁극의 해결이 될 수는 없다. ‘법원권근’의 상황일수록 더디지만, 법적 테두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을 쌓으며 ‘법근권원(법은 가깝고 권력은 멀다)’의 경험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또한 괴물을 처벌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나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일이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