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호 내 인생의 한 구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새번역)
장애를 갖고 자라는 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근심거리가 된다. 생후 9개월에 소아마비라는 전염병에 걸린 나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는 후유증을 얻었다. 보행에 장애가 생겨 혼자 서는 것도, 걷는 것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다. 그냥 열나고 아픈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게 소아마비라는 사실을 아신 부모님은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실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들의 사회적 지위나 그들을 향한 보편적 인식이 어떤지 아시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들의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면서 처음 마주하는 현실은 자의식이나 열등감 이전에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는 기구함이다. 존재로 근심거리가 되어 의도치 않은 불효자가 된다. 나중에 성인이 된 후 엄마는 말씀하셨다. “네가 커서 사람 구실이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장애인들이 열등감이나 차별의 경험 속에 엇나간 인생을 사는 경우를 보셨기 때문이리라.
장애는 비장애인에게 생소한 소수자 경험을 다양하게 안겨준다. 유년기에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장애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 결국 인간관계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보는데,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경험들이다. 놀림을 당하거나 비장애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보게 된다. 나도 병신, 쪽쪽발, 절뚝발이 등 다양한 차별과 조롱의 언어를 들으며 자랐고, 체육시간이면 열외가 되어 남들 하는 걸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존재로 배려라는 이름의 소외를 경험했다. 옆집 사는 동네 친구 중 못된 녀석 한 명이, 나를 때리고 도망가면 못 쫓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괴롭혔던 일도 기억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존감을 형성하는 과정은 평탄치 않다. 나를 감추고 포장하는 법을 더 많이 익혔고, 장애가 대표적인 평가 요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 존재에 대한 고민은 진로 선택, 결혼, 대인관계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다리를 고쳐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가장 잊고 싶으나 잊지 못하는 말이 있다. 1991년 말 졸업을 앞두고 선교단체 간사로 지원하여 면접 때문에 이사 한 분을 만나러 갔을 때 들은 말이다. “뭐 이 일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겠구만.” 차별과 편견의 언어에 익숙했지만, 이 말은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든 참으로 못된 말이었다. 지금 다시 그 자리에 간다면, 나는 방금 하신 말씀을 취소하고 사과하라고 단호하면서도 정중하게 요구하고 싶다.
장애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어릴 때부터 간절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 부흥회에 가서 마룻바닥에 방석 깔고 앉아 간절히 찬송을 따라 부르고, 부흥사 목사에게 안수를 받으며 다리를 고쳐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매달렸건만, 내 다리는 한 치의 개선도 없었다. 이 당황스러운 현실을 5학년 어린이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고, 결국 고스란히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의문이 되어 마음속에 남았다. 이 상심을 꺼내어 되짚어보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서른 살이 넘어서였다.
비록 기적 같은 경험으로 나를 고쳐주시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하나님은 장애와 더불어 사는 법, 장애에 매이지 않고 사는 법을 알려주셨다. 부분적으로는 장애가 개선되는 일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아니었으나 이 또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스스로 의식하지 않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나를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로 받아준 공동체의 역할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나도, 친구들도 장애를 의식하지 않는 만남 속에서 지냈다. 그렇게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소아마비로 생긴 변형 중 일부를 수술로 치료하면서 보행이 개선되는 경험도 했다. 비록 내가 바라는 방식과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그 2년 전의 기도는 분명 응답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서른 살 이후에 묵상하며 침묵으로 기도하는 훈련을 받던 중, 5학년 때의 거절 경험을 놓고 예수님과 대화했던 일은 마음으로 장애를 수용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행복이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과 상황을 초월해 이미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장애가 사라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교정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애와 더불어 사는 여정의 끝은 수용이 아니었다.
마르바의 삶을 통해 기쁨을 배우다
장애를 그냥 수용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기뻐하기로 다짐하게 된 데는 한 사람과의 만남이 큰 역할을 했다. 나보다 훨씬 심각한 장애를 갖고 평생 사셨지만, 늘 기쁨으로 가득했던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마르바 던(Marva J. Dawn, 1948.8.20.-2021.4.18.)과의 만남이다. 그분을 처음 뵙게 된 건 1998년쯤으로 기억된다. 신학교 봄학기에 특강 강사로 오셨다. 목발을 짚고 강단에 섰는데, 너무나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마르바 던은 젊어서부터 수많은 질병을 겪었으며, 평생 장애와 더불어 사셨다. 남편 손에 의지해야 일상을 사실 수 있었는데, 첫 번째 남편에게는 버림을 받았다. 이분을 섬기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는 두 번째 남편 마이런(Myron)과 함께 세계를 돌며 영혼을 움직이는 강연을 하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후로 한국에서 두 번 뵈었다(2007년 사랑의교회 특강, 동아시아 IVF 학사 수련회). 그 후 만난 곳이 2014년 코스타였다. 이 중 두 번은 강사와 통역자로 만났는데, 코스타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당시 그분은 낙상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셨고, 왼쪽 다리는 심한 변형 때문에 체중을 싣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고 계셨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80분 정도를 서서 설교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세 번에 걸쳐 설교하시는 동안 양쪽 팔로 강단을 붙들고 초인적 의지로 서서 메시지를 전하셨다. 설교 후 휠체어에 다시 앉으실 때는 거의 쓰러지실 정도였다. 셋째 날 아침이었나, 앞에 서시더니 참가자들에게 물으셨다. “여러분 아침에 여기 오기까지 혹시 기적을 경험하셨습니까?” 참가자들은 무슨 소린가 싶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저는 왼쪽 귀가 안 들리고, 오른쪽 눈이 안 보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면역 억제제를 비롯해 수십 알의 약을 먹어야 겨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보실 수 있죠? 들으실 수 있죠? 걸으실 수 있죠? 사실 이 모든 게 기적입니다.” 마르바는 일상에서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기적임을 알게 해주신 분이셨다. 그러면서 평생 약함을 친구 삼아 지내오시면서 배운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도 기뻐하며 일상과 오늘을 감사하는 영혼의 부요함을 간증하셨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들 앞에서, 많은 것을 상실했고 약함으로 평생 고통당하면서도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신 마르바의 모습은 큰 외침과 울림이 되었다. 이제 당뇨, 신장병, 장애, 고통 없는 곳에서 평안히, 기쁘게 계실 그분을 통해 나는 고통을 기뻐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장애를 기뻐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고통을 기뻐하는 것은 고통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얻게 된 새로운 은혜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고통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고 행복하고 자긍심이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만, 장애는 여전히 불편하고 낯설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계 21:4, 새번역) 마지막 때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며 장애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한 가지가 또 있다. 장애나 고통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갖게 해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차별에 눈뜨고 내가 겪지 않은 일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창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를 가진 인생은 복된 삶이기도 하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아니겠는가. 또한 이 지면을 통해 나누는 내용도 장애가 없었다면 펼쳐내 보일 수 없었을 나만의 이야기다. 이런 스토리를 갖게 된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아니면 삶이 얼마나 밋밋했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는 장애가 신체 기능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인 동시에, 뭔가를 얻어 균형을 맞추는 ‘공평한 경험’으로 연결되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자전거 같은 분
2014년 7월 한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간증 프로그램 녹화를 다녀왔다. 질문을 미리 알려주었는데, 첫 번째가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때 적은 글을 다시 소환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내게 자전거 같은 분이시다. 내가 어떤 목적지에 이르도록 도와주지만, 차와 달리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교통수단이 자전거이다. 하나님은 내가 넋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페달을 밟길 원하시고 사방을 살피며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나아가길 원하신다. 인생은 하나님이라는 자전거에 올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때로 오르막을 오를 때는 내던져버리고 싶은 게 자전거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회의가 밀려온다. 때려치우고 싶은 인생처럼 느껴질 고된 순간, 지겨운 오르막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러나 참아내고 어느덧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감개무량해진다. 잠시 후 내리막을 내달릴 때는 천하를 얻은 것 같은 상쾌함을 만끽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이라고 해서 오르막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고단함을 다 겪지만, 그 끝에 말할 수 없는 보람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자전거를 탈 때 자유를 느낀다. 내 다리의 장애를 가장 덜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뛸 때 장애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고, 걸을 때도 조금 느낀다. 그러나 자전거를 탈 때는 잊게 된다. 꽉 막힌 차들 사이로 시원하게 내달릴 때 느끼는 상쾌함과 자유는 경험해본 사람만 알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느끼는 자유가 바로 이런 느낌이다. 나로 사슴과 같이 달리게 하신다. 자전거 같은 하나님. 바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어릴 적 엄마의 염려는 ‘이 아이가 커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였다. 지금 나는 약함 가운데서도 기쁨을 경험하고 제약 가운데서도 자유를 경험하며,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기뻐하는 삶을 배우고 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계신 엄마도 이제는 안심하셔도 되겠다.
김종호
세 딸을 키운 아빠이고, IVF 간사로 30년째 일하고 있다. 커피를 볶아 아내와 함께 마시고, 자전거를 애용하며, 사진과 자연과 음악과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만나 그만의 스토리를 찾게 도와주는 일에 관심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