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호 미디어 솎아보기] 평화의 관점으로 보는 미디어 리터러시 1
사진 #1: 어둡고, 거칠고, 위태로운, 폭력적인, 불행한1)
검은 연기가 짙게 뿜어지는 가운데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서 있다. 얼핏 보면 화재 현장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이어를 태우며 발생한 연기인 걸 알 수 있다. 타이어를 태우면서 발생하는 유독가스를 떠올리니 사진을 보는 사람마저 숨을 참고 입을 막게 된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하다.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거대한 검은 장막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장면이다.2) 무리의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장막을 향해 서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니 뭐라고 외치는 것일까? 어깨동무를 한 사람들도 보인다. 팔을 들어 무언가를 외치는 듯하다. 무리의 뒤에는 조금 거리를 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들은 지금 저 짙은 검은 연기 속에서 무얼 하고 있나? 검은 연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중앙 아래 검은 히잡을 두른 한 여성이 나무 막대에 깃발을 들고 있다. 빨간색, 검은색, 흰색, 녹색으로 이뤄진 저 깃발은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인데 바로 팔레스타인 국기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사진만으로 저 깃발이 어느 나라의 국기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사진만으로는 지금 저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이 사진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고 고정시켜 시각화하는 매체이다. 사진 안에 담긴 이미지는 때론 어떤 말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사진은 시간의 전후를 포함하지 못하고, 프레임 밖의 이미지도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진은 전체적인 맥락을 담아낼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진은 지표적인 특징을 지닌다고 하겠다. 지표성(indexicality)이란 특정한 맥락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의미(기호·표지·표상)를 말한다. 사진의 온전한 의미 전달은 사진 이미지의 표시의미(denotation)와 맥락 속에 해석되는 암시의미(connotation)를 모두 포함할 때 가능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의 ‘결정적 순간’(critical moment)이란 사진의 미학적 구도와 사진가의 역사적 이해도가 만났을 때 가능하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비단 사진만이 아니라 언론의 역할이 그러하다.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다양한 사건·사고들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다. 언론은 우리의 눈과 귀이며, 또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취재하고 대중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정보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합리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민주 사회에서 언론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모든 일을 취재하고 보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건과 덜 중요한 사건을 결정하고, 정해진 지면 안에 어떤 기사를 넣을지 뺄지, 어떤 순서로 배열할지 등을 정해야 한다. 언론의 결정적 역할은 소위 ‘뉴스거리’(newsworthy)에 대한 편집 데스크의 결정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언론의 편집 과정은 사진을 찍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사진은 매 순간 수많은 피사체 중에서 무엇을 찍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찍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 네모난 프레임 안에 무엇을 넣을지 그리고 무엇을 뺄 것인지, 먼 거리에서 찍을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서 자세히 찍을 것인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 이 결정에 따라 사진이 재현하는 시각적 결과는 다양해진다. 우리가 보는 사진 이미지는 결국 사진이라는 매체에 의해 그리고 사진가의 의도에 의해 편집된 결과이며, 그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매개된 이미지’(mediated image)이다. 비슷하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언론 보도 또한 편집 데스크의 의도와 체계에 의해 편집된 결과로서의 세상, 즉 ‘매개된 현실’(mediated reality)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는 세상, 즉 언론이 재현하는 현실은 얼마나 진실한가?”
미디어 속 진실(truth)은 사실(fact)과 다르다. 사실은 사건의 그러함을 말하지만 진실은 사건의 가치판단을 동반한다. 사실은 사진 이미지가 전달하는 표시의미와 같고, 진실은 사진이 내포하는 암시의미를 포함한다. 사실은 단일한 사건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진실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수전 손택이 사진이 전달하는 의미가 단순히 정보의 전달에 그치게 될까 우려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반면 진실을 보는 힘은 정보의 유무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통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론은 사실에 기반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실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국제 갈등 보도를 생각해보자. 언론/미디어의 도움 없이 먼 타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의 갈등 보도가 충분히 진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국제 갈등 보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특정한 언론 보도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다양한 사회 갈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언론이 편향되었다고 지적하곤 한다. 그런데 이 비판에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이 작용한다. 지금 나의 관점은 어디서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형성되었는가 성찰해보면 상당 부분 언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성숙한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미디어를 수용하는 자세의 첫걸음은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 갈등 보도는 그 특성상 언론의 편향성(?)을 좀 더 분명하게 돌아볼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사진 #2: 밝고, 깨끗하고, 안전한, 평화로운, 행복한3)
검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건물 입구에 모여서 금발의 키 큰 여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중앙에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은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치고 있는데 그 방향은 여성이 아닌 사진 왼편을 향하고 있다. 바닥에 깔린 전선들과 캠코더 마이크로 보이는 검은 물체로 보아 이 남성은 취재 온 방송국 카메라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검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거나 드레스를 입었다. 신분증으로 보이는 목걸이를 걸고 있는 모습들에서 일상적인 모임이 아니라 공적인 행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진 중앙에서 마이크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현판을 가리키는 여성은 백악관 특별고문 이방카 트럼프이고 그녀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남성은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이다.
〔사진 2〕는 2018년 5월 14일, 재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의 이전식 모습이다. 미국 정부는 텔아비브에 있었던 기존의 미 대사관 위치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는 공약을 기어코 단행하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하여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고문과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 등이 이날 이전식 행사에 참석하였다.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에 둔다는 것은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의미와 같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발언을 해 상당한 충격을 준 지 5개월 만의 일이기도 하다.4)
이스라엘 정부는 1948년 국가 건립 이후부터 줄곧 예루살렘의 영토권을 주장해왔다. 당시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리고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1967년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예루살렘 전 영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실제 거주자였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을 무단으로 점령한 것이라 반발하였다. 유엔 또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으며 국제법상 예루살렘은 분쟁 지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1946년 기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87.5%를 팔레스타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유대인은 6.6%, 나머지 5.9%는 영국의 위임 통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5)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쟁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가 이스라엘 영토를 임의로 유대 국가에 56.47%, 아랍 국가에 42.88%로 분할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지속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그곳에 살던 실제 거주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6)
이제야 밝히지만, 〔사진 1〕은 주이스라엘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에 반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지구 접경지대에서 반대 시위를 하는 장면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석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위대한 귀환 행진’이라 불렀다. 반면에 이스라엘 정부는 (마치 큰 혼란을 조기에 종식하려는 듯) 무력을 사용하여 강경 진압했다. 시위는 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약 50여 명이 사망했고 1,200여 명이 다쳤다.7) 사진 속 검은 연기는 시위에 참가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타이어를 태웠던 것이다. 필자의 눈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저 검은 연기보다 더 어둡게만 느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시위대의 배후로 (서구 언론은 테러 조직이라 부르는) 하마스를 지목했고 하마스의 비밀기지를 폭격했다. 2014년 7월 이후 3년 만에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폭격이다. 그 지역 민간인들은 또다시 전쟁의 위협에 떨어야만 했다.
국제 갈등 보도 삐딱하게 보기
예루살렘(아랍어로는 ‘알쿠드스’)은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이 진행 중인 곳이다. 국가적으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의 중심이자,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다양한 종교들이 아슬아슬한 공존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트럼프 대통령 이전까지 어떤 미국 대통령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 있어서 편향된 언급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적으로는 이 문제에 중립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것이 미칠 외교적 영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주류 정통 언론 가운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룰 때 노골적으로 편향된 입장에서 보도하는 매체는 전무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언론/미디어가 편향되었다고 말하고, 이를 다소 삐딱하게 봐야 할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에 대한 주류 언론들의 보도를 분석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BBC, CNN, 로이터 등의 주류 언론들이 “갈등의 한쪽(즉 이스라엘 측의)의 어법, 표현, 문체를 뉴스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사실의 부정확성이라는 오류를 범했고 나아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또 다른 연구에서는 서구의 주류 언론들이 주로 팔레스타인을 폭력적인 공격자로 묘사하는 반면, 이스라엘을 선량한 방어자로 묘사하는 경향성을 가진다고 지적한다.9) 이어서 이 언론들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선 충분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폭력적인 집단의 이미지로 언론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갈등 보도의 편향성은 두 집단의 갈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왜곡되고 고착화된 이미지를 형성한다.
국제 갈등을 다룰 때 언론의 역할은 사진이 가진 장단점과 유사하다. 네모난 프레임 밖의 세상을 알려주지 않는 사진의 지표적 특성처럼, 현 언론의 국제 갈등 보도 방식은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공정하게 담아내기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다수 독자들은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수 언론들은 이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는 듯 보인다. 이 논의는 주류 언론의 국제 갈등 보도 방식에 관한 비판이자, 언론 스스로도 반복적으로 성찰하는 문제이다. 더구나 매일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언론의 판단이 항상 공정하고 정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앞서 살펴본 두 사진은 각각의 독립된 사실이자 긴밀하게 연결된 사건이다. 언론의 역할은 이 두 사건을 연속선상에서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섬세한 작업이 요구된다. 〔사진 1〕이 재현하는 이미지는 ‘어둡고, 거칠고, 위태로운, 폭력적인, 불행한’ 반면, 〔사진 2〕가 재현하는 이미지는 ‘밝고, 깨끗하고, 안전한, 평화로운, 행복한’ 모습이다. 이 상반된 사진이 전달하는 사실과 배제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이런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이스라엘 미 대사관 이전식’과 ‘그에 저항한 팔레스타인인의 폭력적 시위’라는 ‘표시의미’ 너머의 문맥과 상황은 무엇인지 따져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 저 팔레스타인 무리가 검은 연기 속 유독가스를 참아내며 검은 장막을 향해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지,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독자로서 우리 역할은 언론이 공정하게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지 다소 삐딱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덧. 〔사진 2〕는 미국 국영방송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판 뉴스의 메인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1)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앞이 보이지 않는 검은 연기 너머를 향해 무언가 외치고 있다. AFP의 사진으로, 〈한겨레〉 등 국내외 여러 언론에서 사용했다.
2)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섀도우 앤 본〉이라는 판타지 드라마를 본 독자라면 이해할 것이다.
3)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고문과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이 14일 예루살렘에서 새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 개막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의 사진.
4) “트럼프,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중동 뇌관 터트려”,〈YTN〉(2017. 12. 7) www.ytn.co.kr/_ln/0104_201712070502290136
5) 홍미정, “국제사회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찬수 외, 《세계의 분쟁들: 평화라는 이름의 폭력들》(모시는사람들, 1994), 59쪽.
6) 이는 세계열강에 의해 냉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과 북으로 갈린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는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올 부분이라 느낀다.
7) “미국대사관 예루살렘서 개관…팔레스타인 시위대 52명 사망(종합2보)”, 〈연합뉴스〉(2018. 5. 15) www.yna.co.kr/view/AKR20180514181452108
8) 황치성, 《갈등이슈 보도의 새로운 접근》(한국언론재단, 2008), 15쪽.
9) 위의 책.
김상덕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와 언론사진, 공공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근무 중이며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같이 쓴 책으로 《The Role of Religion in Peacebuilding》 《평화의 신학: 한반도에서 신학으로 평화 만들기》 《더불어 함께하는 평화교육》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