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호 미디어 솎아보기] 평화의 관점으로 보는 미디어 리터러시 3
해외 갈등 보도 다시 보기
지난 글에서 해외 갈등 보도 방식에 대해 독자들이 삐딱한 시선을 지녀야 할 것을 주문했다. 언론 보도는 단순 사실 전달이 아니다. 사건을 선택하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편집하는 과정이 동반된다. 우리가 접하는 언론 기사는 누군가의 선택과 배제의 결과물이다. 그 선택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다양하다. 언론인의 개인적 요인, 언론사 내부 요인과 정치·경제적 외부 요인 등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외국 갈등 보도의 경우, 이런 전체 맥락을 충분히 알기 어려워 실체를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이 다루는 사실은 연속적이기보다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이기보다는 부분적이다.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특정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공정한 언론 보도를 하려면 기사 내용이 사실에 기반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갈등 보도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언론 환경은 다양한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미디어 진실’이란 실체적 진실의 조각들과 같아서 복잡한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마치 사진이 순간적이고 일부만 포착하듯이, 해외 갈등 보도 중 상당수는 갈등 현상만을 피상적으로 재현할 뿐 갈등의 뿌리와 과정, 복잡한 이해관계를 충분히 다루지는 못한다. 대표적 사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는 ‘고질적이고 지속적인 갈등’(intractable and persistent conflict)을 다루는 언론 보도들이 고정화된 이미지들을 재생산하거나 특정 담론을 강화하는 형태의 전달 방식을 반복하고 있음을 첫 번째 글(2021년 9월호)에서 지적하였다.
폭력 저널리즘: 이분법과 경쟁 구도를 넘어서
두 번째 글(2021년 10월호)에서는 언론이 해외 갈등을 보도할 때 자주 사용하는 폭력 프레임을 살펴보았다. 제이크 린치와 요한 갈퉁은 폭력 저널리즘(violence journalism)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다수의 갈등 보도에서 발견되는 폭력 저널리즘은 갈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피아(彼我)를 나누거나 강자와 약자로 구분한다. 해결보다는 갈등의 정도에 집중하거나, 갈등을 경쟁과 승패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런 보도를 접한 독자들은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폭력 저널리즘은 갈등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여 구분하곤 하는데, 종종 이를 선과 악의 대립처럼 재현한다.1)
문제는 사회적 갈등이 선악 구도로 다뤄지면 합리성을 잃고 감정적인 태도로 갈등을 대하기 쉽고, 갈등의 정도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점이다. 특별히 종교와 이념, 문화적 차이가 여러 양상과 겹쳐지면서 갈등의 대상은 소통과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궤멸해야 하는 악마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때 갈등의 해소는 더욱 어려워진다. 혐오와 차별이 늘어나고 문화적 갈등의 단계로 악화된다. 언론과 독자 모두 폭력적 프레임에 길들여진 채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갈등의 현상만 재현하고 또다시 갈등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특정 언론 보도를 반복적으로 접할수록 독자들은 어느 한쪽 입장에 서서 사안을 바라볼 가능성이 크다. 폭력 프레임에 길들여진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선과 악, 강자와 약자, 정의와 불의 등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입장과 다른 상대 집단을 향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느낀다면 그 감정이 어디서부터 비롯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분노와 적개심만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관용하며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서로 입장이나 요구가 다를 때 내 것을 일부 포기하거나 협상을 통해 얻어내는 설득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대감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면서 신뢰의 용기를 내고, 어쨌든 제안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안다. 다수의 해외 갈등 사례가 다층적 이해관계로 얽혀있다는 점도 알며, 이 모든 실타래를 풀기 위해 길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인 노력과 인내의 과정 가운데 뜻밖의 기적과 같은 순간들, 상황을 급변하게 만드는 일종의 ‘섭리’를 기대하곤 한다.2)
한국인은 해외 갈등 보도의 제한적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바로 남북문제가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3) 해외에서 볼 때 한반도 갈등을 둘러싼 보도 방식은 철저하게 갈등 중심의 이분법적이고 단순화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엘리트 중심의 폭력 저널리즘의 예이다. 실제 한반도 역사와 남북한 정부 상황이나 시민단체 의지, 주변국과의 문제, 체제 및 안보 위기,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시장경제 상황에서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한반도 갈등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 갈등 자체를 보도하는 일은 핵심이 아니다. 결국 평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평화 저널리즘: 진실, 해결, 시민
평화 저널리즘(peace journalism)은 평화학 배경에서 등장했다. 기존 언론 보도의 방식이나 구조적 문제점을 살피고, 대안적 방향으로 평화라는 가치를 제시한다. 주류 언론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보도를 위한 보도를 넘어서 평화라는 인류 공영의 가치를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평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이라는 개념은, 들리기에는 이상적이고 매력적이지만 실천하는 데는 현실적 장애물이 많다. 언론 특성 자체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한입으로 모두의 목소리를 담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언론사는 국가라는 지역적 한계 안에 있어서 해당 국가의 법과 질서, 사회·문화적 요인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수의 주류 언론사들이 상업적 구조 안에서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고 관심을 끌기 위하여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로 경쟁하는 일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수많은 언론사가 생존이라는 눈앞의 목표 때문에 언론의 사회적 가치와 공적 책임을 포기해야 할 때도 빈번하다. 이를 위해서 장기적으로 언론의 독립성과 전문성, 책임성을 높이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현행 언론 보도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대안을 살펴보겠다.
1. 탐사보도: 진실, 공정, 균형
가장 먼저 언급할 모델은 탐사보도(investigative journalism)이다. 진실은 평화를 위한 초석이다. 진실에는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없다. 탐사보도는 갈등 이면에 숨겨진 권력이나 자본 등의 흐름을 포착하고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객관적 자료들을 시민사회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세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낡은 언론 구조를 극복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빠르고 선동적인 기사를 지양한다. 느리지만 진실에 다가가는 언론의 근본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은 사실보다 공정함의 문제에 가깝다. 갈등을 보도할 때는 양쪽 집단의 주장이나 내러티브를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 지난 글에서 살핀 것처럼,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전달하거나 부분적 진실을 전달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표시의미) 이면의 숨겨진 진실(함축의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전달하는 일은 진실이 아니라 선동(프로파간다)이다. 탐사보도는 국가·이념·권력·자본 등의 외압에서 벗어나 성역 없는 조사와 모두를 위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탐사보도를 할 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바로 균형이다. 간혹 탐사보도는 특정한 사회적 편견, 예를 들어 엘리트 권력 그룹의 부패 등을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조사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는 해당 논의에서 제외된다고 여기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어떠한 언론이나 시민단체, 심지어 권력을 감시하는 기관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으며 다양한 이해관계에 노출돼있다. 탐사보도를 할 때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진실을 추구하는 성역 없는 공정함과 균형감이라는 가장 큰 숙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속에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에 대해) ‘정해진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정함과 균형 잡힌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국경지대에서 타이어를 태우며 돌을 던지는 이유와 주장은 무엇인지, 이에 대응하여 이스라엘 정부가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이유와 주장은 무엇인지를 다룰 때 공정과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2. 갈등 해결 저널리즘: 현상보다 원인에 집중
두 번째로, 갈등 해결 중심의 저널리즘을 살펴보자. 제이크 린치와 요한 갈퉁은 폭력 저널리즘의 특징을 ‘폭력-승리주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평화 저널리즘의 특징을 ‘갈등-해결 중심’으로 설명한다.5) 이는 언론이 갈등 현상만을 다루지 말고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특별히 물리적 폭력은 갈등의 현상일 뿐이다. 현상만을 보도하는 것은 갈등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실제 갈등 원인을 살피는 일이 곧 평화 저널리즘의 핵심이다. 여기서 갈등의 원인이란 갈등을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의와 불공정한 체계 등을 포함한다. 요한 갈퉁은 ‘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이를테면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거주자들이나 하루아침에 직장으로부터 퇴직 명령을 받은 노동자들이 벌이는 시위와 그에 따른 물리적 충돌 등을 다룰 때, 언론은 왜 그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하게 되었는지 근원적 원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특별히 평화 저널리즘은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하며,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근원적 해결을 촉구한다.
언론이 평화에 기여하려면 갈등의 현상이 아닌 갈등의 원인에 대해 더욱 조명해야 한다. 평화학자들은 이를 신체의 건강에 비유하곤 한다. 몸이 아픈 것은 증상(현상)일 뿐 질병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식습관, 과도한 스트레스, 운동 부족 등의 원인을 진단해야 비로소 정확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갈등-해결 중심의 언론은 갈등을 보도할 때 원인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고 이에 대한 정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함께 이를 시청자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질적이고 지속적인 갈등을 가자지구 국경지역을 둘러싼 폭력적 시위와 이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만 다루는 것이 전형적인 폭력-승리주의 방식의 언론 보도 사례이다. 그에 반해 평화 저널리즘은 왜 이런 갈등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왜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독특한 사회·문화적 배경 등을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원만한 갈등 해결을 위해서는 갈등의 원인, 즉 인과관계와 사건의 선후 관계, 각 집단의 구체적 요구 사항과 수용 여부 및 실질적 해결 가능성 등에 관한 다층적 논의와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3. 시민 저널리즘: 모두가 평화를 만든다
평화 저널리즘은 시민들의 참여가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고 믿는다. 전통적 언론이 소수 엘리트에 의한 선택과 편집의 과정으로 이뤄졌다면, 평화 저널리즘은 시민 중 누구나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최근 언론 보도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늘어나면서 주류 언론을 보완할 대안적 모델인 시민 저널리즘(citizen journalism)이 주목받고 있다. 독자들이 과거 언론의 수동적 수용자 혹은 감시자 역할에서 벗어나, 갈등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입장을 표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유기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언론을 형성하는 모델을 말한다.
갈등 보도의 경우, 정보 접근권이 제한되어 있거나 일부 정책 입안자들이 밀실에 모여 논의한 내용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런 갈등 사례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남북관계에 대한 결정과 언론 보도 방식이 대표적 사례이다. 엘리트 집단의 정보력이나 전문성은 갈등을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갈등 해결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상당 부분 호전되리라고 예측했지만, 미국 내 강경파의 반대로 정상회담 협상이 결렬되고 이후 북미 관계나 남북관계는 더 악화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위의 노력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민간 외교나 시민단체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엘리스 볼딩은 인류 역사 속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온 진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평화를 위해 일한 수많은 개인과 민간단체들이 존재했다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6) 언론 역할도 비슷하다. 일부 엘리트 집단의 목소리에 의존하고 이들을 대변하기보다는,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특별히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의견을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야말로 실제 갈등의 현실을 살아가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다양한 국가 및 글로벌 기업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를 둘러싼 국제사회 개입의 역사와 당위성, 국가적 실익이나 군사 안보 등을 논의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은 이미 오랫동안 그곳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살아온 실제 거주자들의 입장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서방 국가와 중동 국가 간의 대립이나, 막대한 오일머니를 둘러싼 다툼, 종교 간 경쟁이나 포교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조상들이 살았던 고향에서 가족들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뿐인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평화 저널리즘의 세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평화를 위한 좋은 보도’란 다음과 같다. 첫째, 갈등의 숨겨진 진실을 공정하고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한다. 둘째, 갈등의 현상이 아닌 원인과 해결을 중심으로 질문하고 제안해야 한다. 셋째, 소수 엘리트에 의존하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이에 덧붙여, 정말 좋은 평화 저널리즘은 폭력적 갈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지 않고, 어려운 갈등의 현실 가운데에서도 평화적 대안은 가능하다고 믿으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상상력을 일깨우는 보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짧은 연재 속에서 내 머릿속에 염두한 평화를 위한 언론(언론사진)의 특징은 무엇일까? 질문해보았다. 쉽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 부족한 글과 여러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내용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도 하고, 불의와 불평등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여 갈등의 해결과 변화를 추구하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평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런 눈과 기대로 언론을 바라본다면 조금이나마 갈등을 다루는 언론 보도가 성숙해지지 않을까.
2021년 5월 10일부터 11일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저항군 간의 무력 분쟁으로 가자지구에서는 최소 230명(이 중 61명이 아동)이 죽었고 1,22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최소 12명(아동 2명)이 숨졌고 부상자는 27명으로 집계되었다.7) 그들은 자신들의 집과 가족을 잃었지만, 여전히 거기서 남은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글을 연재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관련하여 상당히 많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특히 가자지구 국경을 따라 세워진 장벽과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점령군의 물리적 충돌, 이후 이어진 양국 간의 폭격과 공습으로 발생한 민간인 피해자들의 사진들이었다. 평화 저널리즘을 떠올릴 만한 좋은 사진을 찾기 원했으나 며칠간의 노력은 실패했다. 몇 장의 사진을 소개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친다.
1) 시각적 재현의 경우 선악 구도는 더욱 두드러진다.
2)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이 하나의 예다.
3) 제이크 린치·요한 갈퉁, 김동진 옮김, 《평화 저널리즘》(선인, 2016), 112-125쪽. 린치와 갈퉁은 ‘평화 저널리즘’ 의 첫 번째 사례연구로 한반도 관련 언론 보도를 다루고 있다.
4) 언론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언론 또한 한반도 갈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만드는 데 일조 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5) 한 단계 더 나아가, 갈등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기보다 변화와 전환의 기회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6) Elise Boulding, 《Cultures of Peace: The Hidden Side of History》(Syracuse, NY: Syracuse University Press, 2000)
7) 국제앰네스티, “[집중 분석] 지난 1달여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일”, 〈Amnesty International〉 (2021.5.21.) https://amnesty.or.kr/41461
김상덕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와 언론사진, 공공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근무 중이며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같이 쓴 책으로 《The Role of Religion in Peacebuilding》 《평화의 신학: 한반도에서 신학으로 평화 만들기》 《더불어 함께하는 평화교육》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