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호 커버스토리]

평화로운 소멸 앞에서

첫새벽, 검푸른 하늘에 걸린 그믐달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고 공기는 맑았다. 육중한 차량이 몸을 틀어 승화원 입구에 멈춰 섰다. 운구행렬을 따르며 관에 손을 얹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힘껏 밀어드릴게요. 이제 평안하세요.”

겨울이 익어가는 소설(小雪)에 아버지는 홀연히 떠나셨다. “사랑한다, 그만 자라.” 그날 밤 그는 거친 숨을 비집고 말했다. 여느 때처럼 우리 가족은 아침 인사를 건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사람 손도, 연명장치도 원치 않는다는 바람대로 깨끗하고 반듯하게 주어진 시간을 마감하셨다.

일 년간 우리는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생의 마지막에 선 그를 조금이라도 붙들겠다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아버지 역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생의 마지막에 가족을 붙들지 않으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찬바람이 부는 높은 산 중턱에 한 줌이 된 그를 묻고, 하늘을 향해 긴 숨을 내쉬었다. 멀리 북한산 자락의 수많은 봉우리 사이로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았다. 안개 속에서 햇살이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드넓은 하늘에는 시린 바람이 가득했다. 미풍에 한 폭의 수묵화가 펄럭거리는 듯했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추모공원의 하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졌다. (이하 사진: 송진순 제공)<br>
아버지를 보내드린 추모공원의 하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졌다. (이하 사진: 송진순 제공)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슬픔이나 격정은 없었다. 담담하니 말쑥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간결하고, 이렇게 편안한 것을, 우리는 왜 그토록 견디고 이겨내라고 다그쳤을까. 어깨에 짐을 짊어지우며 끝까지 버티어 살아내라 했던 무모함과 한 치 앞을 모르는 무지함을, 흙으로 내어놓는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바람이 되고 햇살이 되는 순간에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생의 본능과 안간힘도, 애달픈 삶에 대한 감흥도, 미어지는 그리움도 하늘과 바람 속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다. 그곳의 수많은 영혼도,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이의 슬픔과 비통함도, 애틋하고 따사로운 마음들도 그렇게 풍화되어 흩어져 있었다.

예견되었든 예견되지 않았든 죽음은 그 자체로 늘 갑작스럽다.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생의 시작이 그렇듯 생의 마지막 역시 가장 능동적인 순간을 가장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죽음이 삶의 과정이자 엄연한 현실임을 알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삶을 직접 매듭지을 수 있다면, 그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내어본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매 순간 삶의 무게를 성실히 들어 올리며 이 순간조차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 위안이고 모진 안달일 뿐이다. 삶을 잡는 법을 알았다면 내어놓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진정으로 사는 것일 터이다. 그가 내려놓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삶에 동행하는 것, 그것이 평화로운 소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터이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함을 감내하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마지막 한 걸음까지 홀로 내딛는 것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무력함을 견디게 할 것이고, 그 길을 홀로 걷고 있을 테니 말이다.

엘리사벳은 느지막이 얻은 아들인 세례요한의 머리를 받아들고 세상의 절망을 품었다. 마리아는 십자가 위에서 찢긴 아들의 몸을 내려받으며 침묵 속에 슬픔을 묻었다. 마르다는 오라비의 주검에 붕대를 감으며 신의 부재에 울음을 삼켰고, 수넴 여인은 열병으로 숨진 아들을 홀로 누이고 예언자 엘리사에게 치달렸다. “평안하나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여인의 첫마디였다. 동시에, 풍화된 삶을 견뎌낸 이들의 마지막 마디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감내하는 무게만큼이나 어떠한 생도 떨리게 치열하지 않은 생은 없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였음을 발견한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 2:18, 새번역) 없는 듯 있는 그이는 고난 앞에서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삶 깊숙한 곳에 파고든다. 그러나 그의 무력함으로 인해 우리는 생의 마지막 한 걸음을 스스로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삶의 끝에서야 새로운 삶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말쑥하게 빛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의미들을 발견한다. 그가 없이 있는 세상에서, 매 순간 기억과 망각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내고 삶의 또 다른 세계를 열어가게 된다. 그러기에 삶의 풍화는 덧없는 사라짐이나 공허한 명멸이 아니다. 평화로운 소멸은 의미로 가득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또 다른 생을 선사한다. 작은 성자로 나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그를 기억하며 모든 이의 생은 아름다운 것이라 나지막이 읊조린다.

예배: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

아버지의 죽음은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다름없는 일상을 살면서도 난데없이 떠오르는 기억에 당황스러울 만큼 시간이 정지되곤 한다. 아버지 손의 감촉, 순간의 이야기에 동반된 감정들, 해물탕, 어리굴젓, 뭇국, 즐겨 드신 음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쌓이고 묻히기를 반복한다. 그사이 빈 허(虛)의 공간은 새삼스레 마주하는 갑작스러움에 의미를 쏟아부으며 한 번도 빈 적이 없는 듯 충일의 공간으로 화한다. 언제든 다른 의미들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평정을 맞춰가며 말이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애도 중이다. 다만 거칠고 진한 심상에서 곱고 옅은 심상으로 발을 옮기고 있다.

몸담고 있던 교회에서는 대림절 전 주일을 영원주일로 지키고 있다.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교인을 기억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함이고, 기나긴 애도의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남은 사람들 곁에서 먼저 가신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부활의 소망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멸이 영원한 단절이 아니었음을, 그러하기에 나의 생에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근원임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개인의 소멸이나 하나의 사건을 넘어 그가 속한 사회 일부분이 와해되는 경험이다. 우리 사회가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삶에서 분리하고 외면할수록 존재의 부재를 간직하고 고통을 표출하는 것은 당사자 개인 몫으로, 속히 넘겨야 하는 일로 간주되곤 한다. 슬픔을 간직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실을 마주하고 삶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언제든 낯설지만 긴 시간에 걸쳐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참여해야 하는 일이다.

몇 해 전 담임목사님이 전체위원회의에서 ‘영원주일’을 제안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삶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의 소망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가능하다면 제 방에 먼저 가신 분들의 사진을 두고 싶습니다.” 생각지 않은 제안에 점잖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고, 당혹감에 머리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이 영원주일을 지키는 데 동의했다. 다만 교인들의 만류에 고인의 사진이나 이름을 담임목사실에 두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동의에는 기억과 애도의 예배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먼저 가신 이를 기억하고 서로 지지하고 돌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예배를 담당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의미를 예전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가 과제로 남겨졌다. 신앙의 의미와 에너지가 오롯이 설교에 집중되어있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영원주일의 취지와 의미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은 말씀만으로도 가능했다. 문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는 말씀이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친 경청의 미덕은 참여와 경험의 예배가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예배를 양산해왔고, 그 근거로 교회는 문자 그대로의 성서와 말씀 선포의 주역인 목회자에게 예배 전권을 위임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는 예배’가 아니라 ‘하는 예배’, 머리로 이해하는 예배가 아니라 가슴이 동하는 예배를 어떻게 감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가가 고민이었다. 그것은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하여, 예배를 구성하는 상징물 하나하나, 입당에서 파송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과거 기억이 현재 삶에 말을 건네고, 역으로 현재가 과거로 찾아 들어가는 작업을 경험한다. 이러한 소통은 언어 행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어적 행위 이전에 감각적으로 환기되는 비언어적 행위와 예배 자체가 담고 있는 분위기가 교인을 예배로 초대하고 응답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완벽하게 제공된 서비스가 아니라, 하나의 예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수용하는 교인들의 자세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영원주일 예배는 삶과 죽음의 괴리를 넘어 죽음이 생의 마지막이자 동시에 그 자체로 삶이라는 포용적 자세를 환기하게 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소통을 통해 상실을 경험한 개인의 치유를 넘어, 와해된 공동체 일부분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통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예배는 단순히 먼저 가신 분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추모예배와는 달라야 했다. 또한 그간 교회에서 배제되고 격리되어온 죽음이 어둡거나 무겁지 않은 이미지로 드러나야 했다. 동시에 모두의 고백 가운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추구하는 시간이어야 했다. 현대 과학 문명이 보여주는 죽음의 실증적 차원 넘어 종교가 갖는 죽음의 고백적이고 인식적 차원의 복기, 이는 그리스도의 진리인 죽음에 배태된 부활을 구원의 신비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예배를 통해 죽음 속에서 고백하는 구원의 신비는 개인의 사건을 넘어 공동체의 사건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예배 한 달 전부터 가족들이 고인을 기억하는 작은 물건과 기도문을 가져오면 교회에서는 십자가, 형형색색의 유리볼, 램프와 초, 모래시계 그리고 돌과 같이 다양한 의미를 상징하는 오브제와 함께 예배를 준비한다. 예배 안에서 영으로 참여하는 이들의 이름이 불리면, 가족들이 드리는 기도와 바람은 공동체의 화답으로 이어진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교인들은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 기도하고, 가족의 이름이 있는 자리에 서서 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예배 후에도 의미 있는 공간 속에서 공동의 기억들이 소환되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소통은 그렇게 이어진다.

첫해에는 익명의 교인이 한 아름의 꽃을 모두에게 선사했다. 이듬해에는 먼저 간 가족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던 교인이 용기를 내었고, 더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 내게 찾아와 “목사님, 이런 예배가 성경적인가요?”라며 의구심을 표하는 교인도 있었다. 친절하게 답변은 했지만, 그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 12:27)라는 대목이 걸렸던 것일까? 아니면 거리낌이 되어버린 죽음이 공적으로 표현된 일이 불편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무엇이 성경적인가’, 아니 ‘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삶이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성서는 산 자의 하나님을 통해 현재의 삶을 긍정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의 존엄과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성은 숨을 내쉬는 순간뿐 아니라 숨을 마감하는 전 과정에서 드러난다. 비록 고인이 되었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간 한 사람이자 공동체 일원으로서 한 생을 보낸 이들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구원이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앙으로 고백한다면,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어쩌면 애도가 깊을수록 구원으로 더욱 깊이 다가가리라. 그리하여 예배가 전하는 풍성한 의미가 죽음을 마주하는 가운데 피어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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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주일 예배를 위해 발품을 팔아 만든 오브제들과 제단 장식.<br>
영원주일 예배를 위해 발품을 팔아 만든 오브제들과 제단 장식.

애도의 연대

나의 상실의 경험은 영원예배와 추모예배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꾸어놓았다. 예배에 가슴을 담고 삶을 싣는 작업이 무엇인지 어설프게나마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 해 한 해 예배를 마치면,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하나, 둘 연결되었다. 난치병으로 어린 딸을 먼저 보낸 부모 이야기, 오랜 암 투병으로 엄마를 일찍 보내야 했던 딸 이야기, 스스로 생을 마감한 딸을 혼자 간직했던 엄마 이야기, 병환으로 남편을 보내고 그의 부재를 공동체에 터놓지 못했던 여성 이야기, 갑작스러운 엄마의 상실에 담담하기만 한 아들 이야기. 조용히 찾아오는 이야기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 예배에서 그들을 위한 특별한 오브제로 응답했다. 영롱한 빛의 유리볼, 탐스러운 한 송이 꽃, 검은 촛대와 금빛 레이스, 작은 천사 도자기 등 그의 존재를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으로, 그를 가장 빛나게 해줄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는 며칠을 고심하며 여러 곳으로 발품을 팔아야 했다. 성물 판매점에서 수많은 디자인의 십자가를 선별하고, 특별한 모양의 티라이트를 찾아내고, 지나는 길에 모양이 고운 돌을 줍고, 입자가 고운 모래를 구입하며, 교회 창고에서 깨진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 올리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애도 한가운데 있는 이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기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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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했던 이들은 행여 자신의 애도가 타인을 지치게 할까 봐 두려워했고, 오랜 슬픔이 정상적이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 뜻에 맞지 않을까 하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남겨진 이의 분노는 떠나고 없는 이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무력한 상황에 쏟아지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실에 대한 슬픔을 숨기고, 선명한 기억을 삼키며, 존재의 부재에 대해 하나님과 성나게 씨름하였다. 일상의 자리에서는 담담하고 품위 있는 신앙인으로 매 주일을 지키면서도, 부단히 자신을 억누르고 깎아내어 격정을 무화하는 과정은 매 순간 치열하게 벌어진다. 과연 이들에게 예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또한 그간 외면해왔던 죽음에 대해, 개인의 문제로만 여겼던 상실감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묻게 된다.

자크 데리다는 애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실패한 애도만이 성공한 애도’라는 그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기나긴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발되지 않는 슬픔에 지친 이들을 위로한다. 실패한 애도는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고 감정과 에너지를 부재의 빈 공간에 쏟아내는 것이다. 애도는 필요하지만 그가 경계하는 것은 사랑했던 이를 섣부르게 나의 기억 속에 내면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재한 이에 대한 일종의 배반 행위이다. 우리는 죽음의 아우라에서 벗어나 사회적 정상성에 귀속되기 위해 너무 쉽고 빠르게 상실감과 슬픔을 지우는 길에 서려고 애썼다. 그보다 부재 가운데 있는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실패한 애도라 해도 그 과정에서 나의 존재와 그의 존재가 서로에 대한 부채감 없이, 지나친 슬픔 없이 마주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느리고 길어도 괜찮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삶에서 죽음의 흔적을 깔끔하고 빠르게 밀어내지 않아도 된다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의 존재를 느긋하게 인정하고 기억해도 된다고 말이다.

그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에 안긴 청년 예수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애도 가운데 있다. 죽음 앞에 선 그의 무력함은 제자들을 흩어지게 했고, 새로운 세상을 바랐던 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한 죽음이 선사하는 부활의 소망은 어찌할 바 없는 깊은 슬픔 속에 이미 기쁨의 빛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무력한 슬픔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예배가 발화하지 못하는 이들의 애도를 지지하고, 이들의 고통을 인정하며, 슬픔과 슬픔이 만나 보이지 않는 애도의 연대를 이루어간다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이들이 온전한 자기로 서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가는 예배의 또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모든 이들을 보다 섬세하는 배려하는 재구성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초월의 신비와 구원의 풍요로운 이야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송진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성서신학(Ph.D.)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학부생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성서를 인문학적으로 읽고 소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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