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호 돈을 모아보자]

‘돈을 벌어보자’ vs. ‘돈을 모아보자’
이번 커버스토리 글을 제안받으면서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곧바로 든 의문은 “왜 ‘돈을 벌어보자’가 아니라 ‘돈을 모아보자’일까?”였다. 얼핏 둘은 비슷한 말 같지만, 누구든 직관적으로 양자 간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통 돈을 번다는 것이 어딘가에 취직을 해서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거나 아니면 자영업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수익을 쌓는 과정으로 연상된다면, 돈을 모은다는 것은 이미 벌어들여서 갖고 있던 현금이나 현금에 상당하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유무형의 재산을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 혹은 더 큰 가치를 지니도록 만들기 위해 모종의 경제적 과정에 투입하는 행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가 스스로 일하는 자영(自營)의 노동이든 남에게 고용(雇傭)된 노동이든 어쨌든 노동을 통해 주어지는 임금형태의 소득을 추구하는 행위라면, 후자는 자산가치(asset values) 상승을 기반으로 하여 소득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증식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돈을 모아보자’라는 주제의 기획 취지는 노동을 통해 소득을 확보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소득이 발생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자산을 통해서 소득을 축적하고 자산가치를 증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해진 시대를 문제시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왜 이 시대에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모으는 것, 즉 임금노동보다 자산형성이 더욱 중요한 경제적 행위로 부상하게 된 것일까? 당연히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노오력과 관계없이) 훨씬 더 쉽고 (대박만 터져준다면) 거둬들일 수익 규모도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설문조사를 할 때마다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건물주’로 나오는 한국 사회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론 어른들의 장래희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적어도 할 수만 있다면) 돈을 모아서 돈이 돈을 벌게 하는 것이 더 편익이 크다는 사실을. 가령, 영화 〈기생충〉의 결말에서 언제나 계획이 다 있었던 아들 기우가 그날의 일을 겪고 나서 아버지 기택에게 자신이 숙고한 근본적인 계획을 들려주던 장면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대학, 취직, 결혼, 뭐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기우의 내레이션에서 이어지던 기택과 기우의 감격적인 해후 장면이 기우의 한낱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듯이, 아무리 살인 사건이 났어도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이 지은 그 비싼 저택을 대학도 나오지 못한 채 여전히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우가 구입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를 뿐 전 세계 관객들은 다 알고 있다. 설령 기우가 뭘 해서 돈을 번다하더라도 그렇게 번 얼마간의 돈으로 아버지 기택이 지하 방공호에 갇혀있는 그 집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일만 해서, 혹은 열심히 돈만 벌어서 부자가 되는 일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점을 기우만 모르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집을 산다는 것은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말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실히 노동을 해서 돈을 ‘벌기만’ 하는 대신에 차곡차곡 모으고 그 돈을 끊임없이 자산화하여 돈이 돈을 벌게 하는 일이 시대정신이자 정언명령이 된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문제화하려면, 결국 ‘왜 자본은 일하는 자보다 더 많이 버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회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계층화 과정과 불평등의 구조화에 관한 학계의 최근 논의를 참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왜 자본은 일하는 자보다 더 많이 버는가?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2013년에 출간한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전체 논점은 한마디로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인간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르다”로 요약된다. 피케티는 소득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r>g’라는 간단한 부등식으로 표현한다. r이 “임대료, 배당금, 이자, 이윤, 자본소득, 로열티, 그리고 정확한 법적 분류와 상관없이 단지 토지, 부동산, 금융상품, 산업설비 형태의 자본을 소유한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소득”을 포괄하는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을 “자본총액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자본수익률을 가리킨다면, g는 “임금, 급여, 상여금, 비임금노동에 따른 수입, 법적으로 노동과 관련된 것으로 분류되는 다른 보수”로 정의되는 ‘노동에서 나오는 소득’이나 생산의 연간 증가율을 의미하는 경제성장률을 지시한다.1)
피케티는 자본주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 일반을 언제나 웃돌았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에는 특히 자산가치 성장률이 임금 상승률을 뛰어넘으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상속재산이 노동으로 평생 동안 쌓은 부를 압도할 것이고 자본의 집중도는 극히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 자명하다고 주장한다.2) 결과적으로 이러한 파괴적 수준의 자본 집중과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지난 몇백 년에 걸쳐 인류가 발전시켜온 “능력주의의 가치(meritocratic values), 그리고 현대 민주사회의 근본이 되는 사회정의의 원칙”이 불과 몇십 년 만에 훼손되어 시대착오적이게도 사실상 19세기식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가 21세기 초에 새롭게 번성하는 기괴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피케티가 분석한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불평등 동학에서 자산가치 상승을 견인한 것은 다름 아닌 부동산, 그중에서도 단연 주택이었다. 피케티는 말하길, “18세기 초 농경지의 총가치가 국민소득의 4-5배, 혹은 국민총자본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컸지만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난 뒤, 프랑스와 영국의 농경지는 국민소득의 10퍼센트가 채 안 되는 가치를 지녔으며 국부 총액의 2퍼센트에 못 미쳤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자본주의사회가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국민소득과 국민총자본에 비해 급락한 농경지의 가치를 상쇄한 것은 먼저 주택 가격의 상승”이었다. 마침내 21세기에 이르러 주택 가격이 국민소득의 3배 이상으로 오르면서 “과거에 주로 토지였던 자본은 이제 부동산, 산업 및 금융자산으로 바뀌었다.”3) 그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현 단계는 “부동산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자본소득 비중의 증가나 전체 자본 총 가치의 증가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주택자산의 압도적 비율로 특징지어진다고 볼 수 있다.4)
자산화와 함께 더욱 공고해지는 불평등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특징을 투기적 논리 및 신용-부채 관계의 사회적 확대나 금융기관이나 금융 부문의 지배력이 관철되는 현상으로 이해하던 기존의 주류적 관점 대신에 자산화(assetization), 즉 모든 종류의 재산을 굳이 판매되지 않더라도 반복적으로 소득을 발생시키는 수입 창출 자원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부상(浮上)한 데서 찾기 시작했다.5) 자산화에 집중하는 연구들은 대체로 오늘날 자산, 그중에서도 특히 주택자산의 불평등한 생산 및 분배가 부의 격차의 핵심이고, 사회 전체의 위계적인 계급구조를 형성한다고 파악한다.
예컨대,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상품 기반 자본주의에서 자산 기반 자본주의로 변형하는 과정을 추적한 일군의 호주 연구자들은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로 주택으로 대표되는 자산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한 반면 임금 인상은 일관되게 억제되었다는 점에서, 자산 인플레이션과 임금 정체의 모순적 결합이 서구 자본주의사회에서 계급과 불평등의 논리를 재편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피케티가 자본수익률 상승의 결정적 요인으로 주택자산 증가를 강조했다는 사실이야말로 《21세기 자본》의 중요성을 입증한다고 인정하였다. 1970년대 이래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선 (소비자 물가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주택을 위시한 자산 가격만은 높은 유동성에 의존하여 줄곧 상승하는 이른바 자산 인플레이션이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그와 더불어 임금은 지속적으로 정체됨에 따라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이 소비자 신용, 대출, 모기지 등을 통해 정체된 임금에서 비롯된 생활비 부족을 부채로 돌려 막는 관행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일상의 금융화가 고용을 통한 임금소득보다 자산 운용을 통해 반복적인 소득 흐름을 가진 수입 창출 자원을 확보하는 데 헌신하는 자산 기반 사회의 출현으로 이어졌음을 피케티의 연구는 방대한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주었다.6)
이렇듯 자산으로서의 주택이 불평등을 규정하는 거의 최종심급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21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국민총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경지의 총가치가 소수 귀족들에게 집중되었던 19세기식 세습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는 불평등 구조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개인들 간의 불평등을 형성하는 핵심적 요소는 더 이상 각 개인이 고용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가 아니라 물가 및 임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치가 오르는 부동산, 즉 주택자산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로 바뀌었다. 고용시장에서 남들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릴 수 있는 노동력 상품이냐 아니냐(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 고급인력이냐 아니냐)보다, 심지어 고용관계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관계없이, 금융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한 사람의 계급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케티는 자산 불평등의 전례 없는 심화가 현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사회의 근간인 능력주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능력주의의 기반이 되는 ‘능력’이 물질적 재화 및 서비스 생산을 위한 인간의 능력(즉 노동력)에서 미래의 산출물에 대한 금융적 청구권을 포함한 자산 매입 능력으로 변형되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고용관계 속에서 돈을 얼마나 버느냐는 것, 즉 현재 임금소득이 어느 정도인지만 봐선 한 사람의 계급적 지위를 적절히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인구 중 대다수가 여전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하더라도, 직업이나 고용상의 지위, 조건, 임금수준 등은 오늘날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각 개인의 계급적 지위를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그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의 계급적 지위를 결정하고 사회 전체의 계급적 불평등 관계를 구조화하는 데 고용이 갖는 의미는 더 이상 독립변수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자산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서 자산 경제의 논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 즉 대출 상환 능력이나 자산 매입 능력을 보증하는 종속변수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임금소득은 자산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임금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고용상태나 고용상의 지위는 자산 매입 능력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것이다.7)
우리는 다시 자본의 주문(呪文)에 걸리고
소득주도성장을 경제정책의 기치로 내건 문재인 정부 집권기에 임금은 일정하게 상승했지만, 임금상승률이 주택 가격 상승률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면서 소득주도성장은 끝내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소 논란이 있는 조사이긴 하지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4년 동안 임금소득이 7% 증가한 반면에 서울 집값은 무려 93% 올랐다.8) 최근 〈한겨레〉의 조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이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선 순자산 상위 20%에 속한 사람들이 전국의 부동산 63%와 비거주 부동산 77%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 전체 가구가 소유한 부동산 중 절반 이상을 상위 20%에 속한 사람들이 독점하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위 20%의 부동산 점유 비율이 지난 5년 사이에 계속 증가해온 데 반해 하위 20%의 점유율은 계속 하락했다는 사실이다.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률이 연평균 7.8%를 달성했다고 정부는 자랑하지만, 자산 상위 20%와 하위 20% 집단 사이에 부동산 자산 격차가 지난 4년 동안 77.6배에서 95.5배로 증가함으로써, 소득 격차가 4.1배에서 3.87배로 ‘약간’ 감소한 것을 압도하는 실정이다.9)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어보자’ 대신에 ‘돈을 모아보자’라는 말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도 신용을 통해 미래의 소득을 현재에 자본화하는 자산화 전략이 아니고선 상위 계급으로 진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니 그전에 내 집 마련의 꿈조차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승산이 불확실하건 말건 너도나도 ‘빚투’로 주식을 사고, ‘영끌’로 주택을 사며, 대박의 꿈을 안고 도박 같은 코인판에 뛰어드는 것이다. 자산 인플레이션과 임금 정체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세계에서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노동자에서 자산가로, 채무자에서 투자자로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달리 인식해온 것이다. 이처럼 고용 및 임금노동이 미래의 가치 상승을 달성할 수 있는 자산의 잠재력에 대한 접근권으로서만 의미 있게 된 시대에 노동자의 존재는 당연하게도 자본에게 점점 더 쓸모없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간다. 모두가 투자자·자산가 되기를 꿈꾼 덕분에 금융자산을 통한 자본의 거대한 축적이 가능해짐에 따라 산업자본주의적 축적의 토대였던 인간노동에 의한 물질적 부의 생산(과 잉여가치 전유) 논리가 단지 금융시장의 미래 예상을 확증하는 상상적 자료 정도로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이 노동자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라고 답한 바 있다.10) 물론 이때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정태적 의미에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무한한 자본의 증식 운동으로 인해 결코 노동자로 남아있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리게 되는, 즉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 있는 동태적 의미의 임금노동자로 규정된다. “즉 ‘자본’을 생산하고 증식하는 기능이 있고, 페케르가 의인화하여 부르는 ‘미스터 자본’의 가치증식 욕구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당장 거리로 내쫓기는 바로 그 임노동자이다.”11) 그런데 놀랍게도 노동자들을 무참하게 착취하던 19세기 맨체스터의 자본가를 두고서 마르크스가 전했던 축도(benediction), “축적할지어다, 축적할지어다!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다!”를 오히려 현재의 자산 기반 사회에선 노동자들이 더욱 신실히 감당하게 되면서,12) 금융주도적 또는 자산중심적 축적 체제의 번영과 함께 노동자들이 자신을 스스로 거리로 내모는 역설적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 누구도 일해서 돈을 벌지 않더라도 모든 이가 유능한 투자자나 고액 자산가가 될 수 있다고 우리 귀에다 끊임없이 달콤한 주문(呪文)을 외고 있다. 어느 사회학자의 예언대로, 그 주문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게 될 때,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붕괴로 가는 전 단계가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의 자본주의 붕괴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긴커녕 멸망에 더욱 가까워지는 파국적 재앙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1) 토마 피케티, 장경덕 옮김, 《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 29, 39쪽.
2) 같은 책, 29쪽.
3) 같은 책, 145-146쪽.
4) 토마 피케티·이강국, 〈토마 피케티에게 묻다〉, 류이근 엮음, 《왜 자본은 일하는 자보다 더 많이 버는가》(시대의창, 2014), 47쪽.
5) 대표적인 연구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권창규, 〈‘위험사회’의 자산화 현상〉, 《인문과 예술》 제9호, 2020, 145-165쪽; Fulong Wu et al., “Assetization: The Chinese Path to Housing Financialization”, 《Annals of the American Association of Geographers》 110(5), 2020, 1483-1499쪽; Kean Birch and Fabian Muniesa eds., 《Assetization: Turning Things into Assets in Technoscientific Capitalism》(Cambridge: MIT Press, 2020); Paul Langley, “Assets and Assetization in Financialized Capitalism”,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28(2), 2021, 382-393쪽; Jesús Suaste Cherizola, “From Commodities to Assets: Capital as Power and the Ontology of Finance”, 《Review of Capital as Power》 2(1), 2021, 1-29쪽.
6) Lisa Adkins, Melinda Cooper, and Martijn Konings, 《The Asset Economy》(Chichester: John Wiley and Sons, 2020), 26-27쪽. 그렇지만 《21세기 자본》에서 거듭 주장하는 내용과 달리,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몇 세대에 걸쳐 축적되어 상속된 부(富)나 몇몇 유력 가문으로 대변되는 큰손 금융(haute finance)이나 귀족적인 금리생활자로 특징지어지는 19세기식 세습자본주의로 결코 회귀하고 있지 않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는 주택자산 총량 증가가 보여주듯, 계급적 차이를 초월하여 주택 소유의 증가와 자산 소유의 성장이 전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관찰되는 맥락에서 고용 중심에서 자산 중심으로 계급 및 불평등의 패턴 자체가 구조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말이다.
7) Ibid., 64쪽; Lisa Adkins, “Labor in the Financial Era: Assets, Debt and the Speculative Worker”, Philip Mader, Daniel Mertens and Natascha van der Zwan eds., 《The Routledge International Handbook of Financializati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20), 337-338쪽.
8) 이재호, “현 정부에만 서울 아파트 값 93% 올라…국토부 통계는 거짓”, 〈한겨레〉(2021.6.23.).
9) 장필수, “소득주도성장?…노동소득은 부동산 ‘불장’ 앞에 무력했다”, 〈한겨레〉(2021.12.31.).
10) 카를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 《자본 I -2》(길, 2008), 839쪽.
11) 같은 책, 839쪽.
12) 같은 책, 814쪽.
정용택
한신대 신학과에서 〈자본주의적 노동사회의 변형 및 재구성에 대한 기독교사회윤리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민중신학을 연구하고, 계간 〈뉴래디컬리뷰〉의 편집위원으로 사회인문학 잡지를 만드는 일도 함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