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호 에디터가 고른 책]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17,000원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17,000원

“서울역 맞은 편, 남대문 경찰서 옆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낮고 낡은 건물들이 나타난다. 세월을 몇십 년은 되돌린 듯 보이는 풍경, ‘양동’陽洞이다. 볕이 잘 드는 동네라서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지금은 빌딩숲에 가려 볕이 머무는 건 찰나다.”

여러모로 상징적인 풍경 묘사로 시작되는 이 책은 서울역과 힐튼호텔 사이 ‘양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주민 8인, 곁에서 함께해온 활동가 2인의 생애를 담고 있다. 양동 재개발 계획이 추진되어 쪽방 주민들이 하나둘 거처를 잃고 쫓겨나는 일들이 이어지던 때에, 야학 교사들과 활동가들로 꾸려진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11명이 청자를 자처했다. 2020년 10월부터 1년 동안 쪽방 주민들의 ‘스스로 말하기’를 돕고 기록한 결과물로, 빈자를 규정하는 국가·자본·사회의 시선과 움직임에 맞서는 대항 서사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미래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머슴살이, 일용직, 돼지농장, 넝마주이, 염전 노동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오랜 노숙 생활 끝에 쪽방촌에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착취와 억압, 배신, 질병, 범죄 피해 등이 삶 속에 뒤엉켜있다. 이들이 풀어낸 서사 앞에서 ‘무능한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게으른 사람’이라는 빈자를 향한 관념은 부서지고, 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빈곤 비즈니스’와 갖은 복잡한 절차로 가난을 증명해야만 하는 ‘복지제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로 말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서사를 담아내는 작업은 쉽지 않다. ‘듣기’를 둘러싼 청자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져야 하는 이유다. “연령과 성별, 문화적 배경과 삶의 터전의 차이로 인해 화자의 말과 청자의 질문은 서로 미끄러지곤 했다. … 화자가 미처 ‘말로’ 만들어 내지 못한 경험과 판단을 청자가 짐작하고 넘겨짚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더 물어야 할 질문들 역시 나중을 기약하며 묻어 둘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귀 기울여 들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 편 한 편 후기처럼 달아놓은 글들이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가 듣고 적은 이야기는 아마 그의 삶의 작은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 그 조각들이 반사하는 이야기가 세상을 향할 수 있도록, 그의 곁에 보다 오래 머물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리가 이어 가야 할 일이다.”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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