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호 교회력, 계절의 독서] 부활의 실전성을 이야기하는 두 권의 책

중국 전통 무술의 실전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장풍이라도 쏘는 듯 문하생을 가볍게 넘어뜨리는 고수들이지만, 링에 올라 아마추어 종합격투기 선수 앞에 서면 그럴싸한 자세 한번 못 잡고 두들겨 맞는다. 깨끗하게 패배라도 인정하면 좋으련만, 이런저런 변명만 일삼는 모습이 무도인답지 않아 조롱과 비판이 쏟아진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교회의 어두운 면이 떠올랐다. 교회는 오랫동안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인 성육신과 부활에 대한 장엄한 선포를 이어왔다. 문파(교단)마다 전수되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례들도 있으며, 부활의 의미를 세련되게 선포하는 설교들도 있었고, 웅장한 칸타타도 있다. 부활절 아침이면, “주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기쁨의 인사도 나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 바깥으로 나가 세상과 일상에서 부활을 선포하자니, 어쩐지 종합격투기 앞에 선 전통 무술가와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활의 메시지는 정말 우리 삶의 생명이 될 수 있을까? 부활은 과연 세상 앞에서 실전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 과제를 지고 링 위에 오른 두 명의 고수가 있다.

부활은 일상을 사는 것이다

먼저 목회자들의 목회자, 유진 피터슨이다. 그가 《일상, 부활을 살다》(복있는사람)를 통해 보여주는 부활의 실전성은 영성이다. 부활은 영성 형성의 기초다. 바로 “마음의 태도나,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그저 하나의 희망 사항, 욕구, 공상 혹은 기분전환 거리에 지나지 않던 영성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제적 삶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30쪽)이다. 부활을 실제 삶과 연결하는 단서는 예수의 부활 장면에 있다.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인 여인들은 부활과 같은 거룩한 일을 찾아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생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죽음’을 수습하는 ‘일’을 위해 달려갔다. 그 가운데 예수의 부활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우리가 기대 없이 일하러 가는 평범한 ‘일터’ 역시 부활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원초적 경험은 ‘경이’다. 이는 친밀함과 경외감을 모두 포함한다. “두 요소가 결합하여 예배가 된 것이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경외감의 표현만으로 부활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만지고 그분의 발을 붙잡는 친밀감의 표현 자체도 부활 예배는 아니다. 경외감과 친밀감 모두 있어야 한다. … 그들은 살아계신 예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분께 경배했던 것이다.”(33-34쪽) 그렇다. 실로 사순절과 부활절은 경이의 감각을 훈련하는 절기다. 전례 전통에 따르면 사순 시기에는 우리의 예배에 빠지지 않았던 ‘할렐루야’(복음환호송)와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과 고난을 묵상하며 참회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다시 경이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부활 앞에 선 우리의 기본적 반응과 감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경이의 감각을 지닌 채 우리 삶을 살아가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유진 피터슨은 그 경이의 감각을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상 영역으로 식탁을 소개한다. 예수의 사역 전반(오병이어, 칠병이어, 식탁 교제, 최후의 만찬)에는 물론, 부활한 그가 제자들과 거닐며 나눈 것 역시 음식이었다. 소망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 밤새 실패하여 지친 제자들을 찾아가 식탁의 주인이 되어주셨다. 그리고 이는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성찬을 통해 반복된다. 성찬에서 반복되는 취하여-감사드리고-떼어-나눌 때, 우리는 평범한 음식이, 그리고 우리 생명이 변화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일상적인 식탁으로 돌아와, 매일 차려지는 식탁에 주님께서 앉아계심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성찬의 식탁 앞에서 부활의 실천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식사에서 동일한 부활의 실천을 계속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식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인으로 임재하시는 성만찬에 그 근거를 두며, 우리는 이 성찬을 매일 먹고 마심으로 부활의 의미를 확장해 간다.”(102쪽)

마지막으로 경이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의 우정 가운데 발견된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사순절을 세례 준비 기간으로 삼고 부활절에 세례를 거행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예수님을 부르셨던 사건을 재현한다. 세례에서 사랑으로 이름이 불리고, 서로 용납하며 하나가 된다. 세례는 우리의 잊었던 존재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관계를 재형성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숫자나 역할, 기능 필요에 따라 축소하는 데서 멀어져 가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가 보여주는 새로운 인간관계이다.

부활은 함께 사는 것이다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19-20세기 신학의 주류였던 자유주의신학의 종교적 개인주의, 주관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로핑크는 자유주의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개인 안에서, 곧 내면과 영혼의 사적 영역 차원으로 소급시켰다고 본다. 이미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 영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라는 물음을 던진다.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후 예루살렘으로 모인 것은 유대 전통의 종말론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포개지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나라가 출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가룟 유다 이후 열두 번째 사도를 보선한 이유 역시, 회복된 이스라엘이라는 종말론적 자의식의 실천이다. 그들은 아직 별 볼 일 없지만, 자신들이 새롭고 위대한 사회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았다.

로핑크는 이 새로운 사회를 ‘대안-대조사회’라 부른다. 이는 전통적인 지배는 물론, 당대 사회질서를 거절하며 이루어가는 새로운 사회다. 이 대조사회는 폭력을 단념하고 배격하여 하나님 아래서 모두가 형제·자매로 평등하다. 사랑과 비폭력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의 세상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룬다. 그렇게 낡은 세상의 대안이 된다. 대안-대조사회인 교회는 사회적 실재이자 부활한 그리스도의 사회적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돌발한 하나님의 새 세상은 대안-대조사회 안에 이미 시작되었다. 성별, 나이, 신분, 학벌 같은 사회적 장벽들이 모조리 허물어지며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새 사회질서를 매력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과 비폭력이다. 이것이 새 사회질서의 가장 중요한 표징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선교 전략은 다름 아닌 비폭력 사회로 세상을 매료시키는 일이다.

로핑크가 보기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메시아가 도래했다면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는가?”라는 유대인의 물음이었다.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 평화는 재림 이후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손쉽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이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인기 있는 대답이며 신학적으로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과 ‘언젠가’는 실전성을 입증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다. 교회는 이런 무난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로핑크는 새로운 세상이 바야흐로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불편한 길을 에누리 없이 주장했다. 이제 교회는 꼼짝없이 자기 삶으로 그 평화를 드러내야만 했다.

대조사회인 교회는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지만 오롯이 윤리적 노력으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넘치도록 풍부한 은혜를 입는 데서 비롯한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의 옆구리에서 비롯하여 살아감을, 교회의 생명은 죽음에서 나옴을 알았다. 따라서 언제나 생명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라야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상의 폭력과 죽음을 넘어 참 평화와 생명을 살아가는 일, 바로 그것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안내해준다.

어느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부활절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짧을수록 좋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부활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데는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부활 신앙의 중요성과 별개로 우리는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를 그다지 갖고 있지 않다. 유진 피터슨과 게르하르트 로핑크 모두 결국 실전성인 ‘함께 사는 삶’에 주목한다. 아름다운 전례도, 세련된 설교도, 웅장한 노래도, “주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기쁨의 인사도 모두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그러했듯, 우리 몸과 포개져야만 한다. 부활의 실전성을 입증할 역사적 증거란, 역사 가운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하는 교훈을 두 고수에게서 배운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으로.

이광희
그렇게나 교회를 좋아하더니 교회의 일꾼이 되어 ‘덕업일치’를 이루었다. 한신대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과 유튜브 〈예배에 관한 아무 말〉 등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 글도 쓴다. 옮긴 책으로 《내일의 예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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