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호 교회력, 계절의 독서] ‘삼위 하나님의 친교’를 돌아보는 두 권의 책
새해 다짐
새해가 시작된 지도 한 달, 새해와 함께 힘차게 다짐했던 일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도대체 몇 번을 더 속아야 새해라는 이름에 ‘영어 마스터’나 ‘다이어트’ 같은 헛된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있을까?
과월호를 펼쳤나 싶어 갸우뚱할지 모르겠지만, 10월호가 맞다. 교회력 이야기다. 내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삼위일체력’이라는 독특한 교회력을 따르는데, 이 달력은 9월 ‘창조절’로 한 해를 시작한다. 통상적인 교회력(그리스도력 혹은 통상축제력)도 12월 대림절에 시작하여 세상의 시간보다 한 달이 빠른데, 삼위일체력의 시작은 그보다도 석 달이나 이르다. 통상축제력은 성탄절기와 부활절기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성자의 핵심 활동을 증언한다. 만약 그 시간에 성부와 성령의 이야기가 더해져서 우리 시간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우리의 시간은 또 다른 시차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력은 그렇게 다른 이야기를 품는다.
삼위일체력은 성부의 절기인 ‘창조절’을 9월부터 약 3개월간 지키고 있다. 또한 본래 하루뿐인 성령강림절(5~6월) 역시 3개월로 확대했다. 그렇게 성부-성자-성령의 절기를 골고루 마련해 삼위 하나님의 이야기가 순환하게 한다. 이제 삼위일체력을 따르는 교회는 매우 적지만, 삼위일체력은 동·서방 그리스도교의 시차가 만나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세계 교회의 전통이다. 9월은 한 살을 더 먹기에 좀 이른 시기지만, 아무튼 새해가 시작되었다. 삼위일체력과 창조절의 안내를 따라 삼위 하나님의 친교와 그분의 창조 활동에 젖어보겠다는 필멸의 다짐을 올해도 반복해본다.
친교 참여하기
삼위일체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그야말로 모순이다. 이해를 시도해봐도, 유사본질·동일본질·경륜적·내재적 등 어려운 용어 앞에서 번번이 실패한다. 나름대로 설명을 해보다가 결국 이단으로 끝나버린 수많은 사례 또한 삼위일체에 관해 말하기를 주저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삼위일체론은 당연히 풀리지도 않고 구태여 풀지도 않을 미해결 난제 취급을 받고, ‘신비’로 밀봉되어 우리와 상관없는 곳에 보관된다. 그러나 신비가 우리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우리가 신비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붙잡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마크 A. 매킨토시의 《신앙의 논리》(비아)에서 만날 수 있다. 매킨토시는 신비와 신학에 관해 이렇게 운을 뗀다. “신비란 우리 일상과 멀리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 감추어진 진리, 우리 삶의 참된 의미입니다. 신학이란 바로 저 신비의 손길과 건네는 말에 반응하고 귀 기울이는 것, 삶 표면 아래 자리한 깊이, 그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15쪽)

대체 초대교회는 어쩌다 ‘삼위일체’라는 이 난해한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수학적 모순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순진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현대인의 사고 너머 아득한 곳에 있는 고대의 현자였을까? 둘 다 아니다. 삼위일체는 초대교회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이다. 그들은 무한한 사랑에 참여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만났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사랑하심으로써, 그리고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자기를 내어주심으로써 세 위격이라는 인격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성부는 당신의 생명을 아들에게 남김없이 주시며, 성자는 이 생명을 말하고 구현하며, 성령은 비할 바 없는 기쁨으로 사랑 아래 이를 하나로 모읍니다.”(61쪽)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보이신 자기 내어줌의 사랑에 대한 감탄이다. 이 감탄이 그 친교를 품은 예배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었고, 이내 예식문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원초적 경험에 닿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예식문의 형식으로 남아있는 삼위일체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그 사랑의 신비는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소개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이유는 ‘논리의 모순’보다는, 무한한 자기 내어줌을 마주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삼위일체는 오차 없이 만들어진 코딩이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참되게 고백된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여러 신학 이론 중 한 분야에 위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 존재와 모든 신학적 활동(Doing Theology)의 토대다. 매킨토시는 이 위에서 신학을 이야기한다.
신학은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말하는 것,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40쪽)
창조·계시·구원·종말 같은 신학의 주제는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건의 증언이며, 성서·기도·성례전·교회는 그 무한한 친교에 참여하는 활동이다. 삼위일체론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서 밀봉한 채 보관해둔 미해결 난제라기보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초대장’에 가깝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통해서 ‘사랑의 존재’라는 온전한 인격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 매킨토시의 책은 일종의 신학 입문서이다. 이 책이 신학 논쟁의 무기를 무장하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일부가 되어 자신을 내어주고 싶은 겸손한 열망이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전에 없던 신학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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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력을 지키지 않는 교회에서도 9~10월을 창조의 기운으로 채우는 운동이 퍼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피조세계를 고통으로 내모는 인간의 죄를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을 지향하는 개교회들이 교단의 교회력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창조절을 지키기도 한다. 세계 교회는 9월 1일을 ‘피조세계를 위한 기도일’로 지키고 있으며, 다른 피조물들과 깊은 우애를 나눴던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10월 4일)까지 한 달의 시간을 ‘창조시기’로 보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는 것은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무한한 친교에 참여함을 긍정하는 일이다. 하나님 생명의 숨결로 지음 받은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참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저마다’에서 ‘누군가’를 배제한다. 우리와 같이 여섯째 날에 지음 받은 존재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배제하는 ‘누군가’는 바로 동물이다. 《동물신학의 탐구: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대장간)에서 앤드류 린지는 말한다.
종교지도자들은 다른 피조물들을 경축하도록 돕기는커녕 종종 동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인간만이 중요한 종인 것처럼, 그리고 모든 창조세계는 단지 인간 세계를 위한 단순한 극장 혹은 배경인 것처럼 말한다. … 너무나도 자주 종교인들은 마치 동물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54쪽)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람 앞으로 동물을 이끌고 오셔서 사람이 동물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보셨다고 알려준다(창 2:19). 다른 존재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은 관계의 활동이다. 이름 붙이기는 그 존재를 살펴서 개성과 의미를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상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전혀 다른 관계가 시작된다고 노래한다. 반려인들은 동물의 이름을 부르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서 아주 기본적이고 심오한 발견을 하게 된다. “동물은 기계나 상품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삶과 개성과 성품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최선의 상태에서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우리가 상호성과 자기희생과 신뢰 안에서 서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영적으로 훌륭한 관계는 종종 잘 인식되지 않는다.”(176쪽)
우리는 동물들과 함께 삼위 하나님의 친교·상호성·희생·신뢰 안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바꿔보면, 우리는 동물과 ‘함께’(‘데리고’가 아닌) 예배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애정뿐 아니라, 인간론·신론·창조론·구원론과 같은 신학적 이해, 성서를 보는 관점, 전통의 해석은 물론 실제 예배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구상까지 눌러 담은 농도 짙은 도전이다. 예배 안에는 그렇게나 많은 것이 담겨있다. 린지는 이 질문의 반응이 진지한 숙고와 고민보다는 방어와 조롱이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오래된 새 친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창조절, 이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절로 그만이다.
통상축제력은 현재 연중시기(비축제 기간)를 보내고 있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절기가 없는데, 1년 중 절반을 넘는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삶이 축제가 아닌 평범한 날의 연속임을 잘 나타내준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평범한 일상을 직면하고 살아내는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이 평범한 시간 위에 창조절을 포개어본다. 작고 평범한 존재들이 내뿜는 창조자의 숨결이 유달리 가깝게 들린다. “옆의 분과 인사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모든 피조물이 삼위 하나님의 친교 가운데 반가운 인사를 건네길.
이광희
그렇게나 교회를 좋아하더니 교회의 일꾼이 되어 ‘덕업일치’를 이루었다. 한신대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과 유튜브 〈예배에 관한 아무 말〉 등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 글도 쓴다. 옮긴 책으로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