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호 사람과 상황] 기후 정의 활동가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정치학자 채효정은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은 탄소가 아니며, 해법은 탄소 감축과 과학기술적 대응에서 찾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전공은 서양 정치사상,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와 불평등이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직 강사인 그는 교수와 강사 사이에 위계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느껴 투쟁했고, 이 기록을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에 담아냈다. 교육이 불평등과 계급 차별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을 길러내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13년간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했고, 지금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농업·농민 문제와 기후위기도 민주주의와 불평등, 그리고 노동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문제들이 어떻게 기후위기와 연결되는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과 이를 해결할 열쇠는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농촌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6년 전, 서울에서 살다가 인구감소로 인한 ‘소멸예정지’ 인제로 귀농했다. 주민들과는 6년째 ‘자급과 자치’ 공부 모임도 이어가고 있다. 7월 3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 카페에서 외부 일정으로 잠시 서울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그가 가족과 인제에 정착한 것은 6년 전이었다. 오래전부터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귀촌의 기회가 찾아온 때였다. 접경지이자 군사지역인 인제는 자연이 오롯하게 남아있었다. 한눈에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했고, 글을 쓰고 강의를 나가면서 농사를 짓고 주민들과 ‘자치와 자급’ 모임(이하 ‘자자 모임’)을 시작했다.
- 자자 모임…,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데요.
처음에는 지역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친해져서 4·16이 되면 함께 추도식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죠. 제가 어디서 왔고 뭐 하던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되면서 어느 날 한 분이 동네 공부 모임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저도 마침 공부 모임을 하고 싶은 갈구가 있었고, 더 친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처음 같이 읽은 책은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였어요. 책 첫 부분에 방글라데시 농촌 여성들과 힐러리가 등장하는데, 이 여성들에겐 막강한 권력과 배경을 가진 힐러리가 가난한 사람인 거예요. 암소도 없고, 자기 노동으로 버는 소득도 없고, 아이도 딸 하나뿐인 힐러리는 자급 기반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방글라데시 자매들의 이야기가 꼭 이곳의 우리 이야기 같고, 통쾌하더라고요. 다들 이 책에 꽂혀서 모임 이름도 ‘자치와 자급’이 됐죠. 이후로 계속 다양한 책을 읽으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어요.
- 지난해 그분들과 텃밭을 빌려 공동경작을 시도하셨죠?
공동경작을 시작한 계기도 함께 읽은 책이었어요. 특히 세상을 먹여 살리는 소농과 씨앗, 여성 농민의 중요성을 보여준 환경 사상가 반다나 시바의 영향이 컸어요. 종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농이 중요하다는 점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인제에서 빈 땅 찾기는 쉬우니 한번 해보자고 한 거죠. 채종부터 파종까지 제대로 농사를 지어본 멤버들은 별로 없었거든요. 다행히 멤버 중에 토종 농사에 신념이 있는 ‘씨앗 선생님’이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함께 텃밭 정원을 설계하고 씨앗을 나눠 모종을 내고, 돌보고, 수확한 작물을 나누었고요. 채종한 토종 씨앗은 관행대로 빌려온 곳에 두 배로 돌려줬어요. 그게 소중한 씨앗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 지식인인 선생님도 모임을 통해 배우신 게 있나요.
글을 쓰고 강의를 할 때 개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저를 훈련시킨 선생님들이 모임 동료들이에요. 학계에선 책에 나온 이론이나 개념을 갖고 설명하면 되는데, 여기선 개념들의 맥락부터 설명해야 하고 우리의 공통 경험 속에서 사례를 찾아내 이야기해야 해요. 그분들도 항상 그렇게 말을 하고요.
또 저는 이곳을 ‘사랑의 대피소’라고 표현하는데, 특정 신념에 대해 바보 취급하는 주류의 강고한 목소리에 저항하려면, 돌봄의 대피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걸 이 모임을 통해 깨달았어요. 혼자 싸우기는 무척 힘들고, 싸움만 해서는 사람이 살 수 없잖아요. 이곳에는 서로를 지지해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용기도 더 낼 수 있죠.
- 자자 모임 멤버분들이 ‘2019년 인제군 의료 실태 중간 조사’ 활동에 참여하신 적도 있죠.
멤버 중 세 사람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고 보고서를 썼어요. 농촌에서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는 의료인데, 인구가 적은 상황에서 공공재원으로 큰 병원을 지으면 예산이나 운영 적자를 어떡할 거냐고 하니 대안을 찾고 싶었던 거죠. 주민들에게 직접 생각을 물어본 건데, 인상적인 결과가 나왔어요. 지역 특성 질병이나 만성질환은 기존 보건소 기능을 확장해 주치의 제도와 예방의학 시스템을 도입해보자, 외상 환자는 드물지만 치명적이니 가장 가까운 지역의 군 병원을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 나온 거예요. 이곳에 살지 않는 전문가나 연구자들은 절대 떠올릴 수 없는 아이디어죠. 자기 삶의 절실함으로부터 구체적인 요구가 나오고 대안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다시 깨달았어요. 자치에 관한 책을 읽고 이렇게 행동에 옮기는 모습이 놀랍죠. 대다수 지식인은 자기 생각이 옳거나, 옳은 말을 하면 옳게 사는 줄 착각하잖아요. 여기선 그런 게 통하지 않아요.
- ‘농부’ ‘꿈이 농부’라는 소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호미 갖고 되겄나’ 해서 ‘호미면 충분하다’ 했다”고 SNS에 쓰신 적도 있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저는 호미가 소농의 도구이자 저항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다 조달해야 하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내 자존심을 굽히거나 타협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잖아요. 그런데 내가 내 먹을거리를 만들면 시장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고, 최선의 삶은 아니어도 조금은 더 나를 지키면서 살 수 있게 되죠. 물론 낭만화도 위험하죠. 호미로 과도한 노동을 하면 몸이 망가지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에게 백 명을 먹여 살리도록 강제된 호미질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열 명 정도를 먹이는 호미질이면 자신도 타인도 건강하게 만드는 농사가 될 수 있거든요. 어떤 좋은 일도 강제적이고 과도한 노동의 형태로 나타나면 노역이 되죠. 호미는 여러 도구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을 텐데요. 호미와 같은 도구를 통해 인간 노동을 즐겁게 감당할 수 있죠. 인간은 자기가 쓰는 도구에 종속되어 착취당하기도 하는데, 호미는 이 같은 종속과 착취가 없는 모든 도구를 상징하고요. 저항과 돌봄에 동시에 쓸 수 있는 그런 도구이기도 하죠.

- 농사지으시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있나요.
책이 가르쳐주는 것과 땅이 가르쳐주는 것은 아주 다르더라고요. 땅 선생님은 저를 계속 좌절시키거든요. 열심히 성실하게 한다고 잘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이번처럼 비가 많이 오면, 엊그제 새로 심은 모종이 다 떠내려가는 거거든요. 열심히 해놨는데, 낭패죠. 도시에서 사업이 망했다고 하면 심각하게 느끼는데, 농촌에서는 농사 망하는 게 일상다반사예요. 사람들은 절망하고 속이 뒤집히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주섬주섬 복구하러 가죠. 땅은 절망과 함께 희망도 줘요.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고, 쉽게 자만하지 않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키죠. 제가 단작으로 키웠던 블루베리도 봄철 냉해 때문에 3분의 1 정도가 죽은 듯했는데 다시 살아났어요. 그런 과정들이 경이로운 거죠. 한편으로는 독해지기도 해요. 가뭄이나 홍수가 올 때도 그렇고, 생각했던 평화로운 공생과는 달라요. 약을 안 치니까 벌레를 끊임없이 죽이고, 수확기에 열매를 쪼는 새들도 미워서 막 욕하고 쫓아내고.(웃음)
- 농사지을수록 빚만 는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합니다.
일단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고, 토지와 부채 문제가 크죠. ‘커지거나 아니면 꺼지거나’라는 말이 있는데요. 경쟁력이 있으려면 규모를 키우라는 애그리비즈니스(agribusiness)의 구호예요. 소농은 아무리 용을 써도 들어가는 비용만큼 수입을 얻을 수가 없죠. 그런데 규모를 키우려면 빚도 커지거든요. 노동력도, 시설도 키울 때마다 다 빚이 되는 거예요. 계약재배는 이윤은 기업으로 가고, 이자는 농민에게 오는 구조로 되어있어요. 빚을 못 갚으면 시설이나 부지가 은행이나 기업으로 넘어가게 되고, 빚으로 시설 깔아놨는데 계약이 철회되면 판로가 막히니 불공정함이 있어도 항변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농민이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주도성이나 자율성을 갖지 못하니, 이런 계약 생산방식은 결국 농민을 계약으로 노예로 만들고 부채로 예속화하는 수단이에요. 스마트팜 홍보하면서 ‘혁신하세요, 농부들도 벤츠 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빚 없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죠. 요즘은 기업농이 아니라도 ‘농가, 농민’을 농업경영체, 농업경영인이라고 하고, 시설농업 크게 하면 사장님이라고 부르지만, 소농인 작은 농부도 중소기업인 큰 농부도 글로벌 농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농업 생산 시스템 속에선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 농민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하려면 농민 수당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농민이 개인 사업자가 돼서 생계를 유지하는 지금의 농산업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수당 정책보다, 농업을 공공산업으로 보고 안정적으로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게 더 일차적이라고 봐요. 그 후에 농민들이 최소한의 생존만이 아니라 제대로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소득과 제도가 보장되어야죠. 사실상 농민들이 공공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농사 자체를 시장 상품이 아닌 공공재로 만들어야 하고요. 무엇보다 전 농업이 기후위기 시대의 ‘대안 경제’라고 생각해요.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전기차로 바꾸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 양식을 농업 기반의 생태적 경제로 바꿔야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봐요. 농업정책도 당연히 생태를 복구하는 방향으로 재수립되어야 하죠. 지금은 농사지으면 빚지지만 땅 빌려주면 돈이 되니까 논밭이 계속 태양광발전, 인삼밭으로 되고 있어요.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면서 농지를 지킬 수 있도록 농민을 지원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개인들은 어쩔 수 없이 농사를 포기하고 경작지는 계속 사라지는 거죠.
농촌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또 있다. 제철 개념이 흐릿해진 깨끗한 농작물을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도시 사람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기후위기. 농촌 지역 주민들은 어떨까. ‘기후위기’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최전선’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다.
- 올해 긴 가뭄 때 인제군의 최근 강우량은 평년(246㎜)의 절반 수준에 그쳤는데요. 기후변화에 따른 수확량의 차이도 있나요.
그럼요. 해마다 느끼는데요. ‘벌들의 실종 사건’은 도시 사람들은 뉴스로만 듣잖아요. 농촌은 수확량 자체가 반 토막이 났어요. 작년에 선녀벌레라는 처음 보는 흰 벌레가 나타났는데, 새카만 오디를 미라처럼 하얗게 말려버렸어요.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무서워요. 옛 지혜와 기술이 무용해지고, 숙련 농민들도 초보자가 되어서 당황하죠. 이런 수도 써보고 저런 수도 써보는데, 안 되는 거예요. 노동강도가 올라가면서 과로하게 되고 위험도도 올라가죠. 보통 도시에서 통제받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이나 과로가 입증되는데, 농민들 노동은 측정되지도 않아요. 사고가 나도 산재도 보험도 안 되고요. 기후위기로 수확량이 줄어도 인정받을 수단이 없어요. 어디까지가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인지 자신 있게 주장하기도 어렵고요.
-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은 탄소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배출한 탄소 누적량 중의 절반이 1990년대 이후에 배출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199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세계화’되었던 때예요. 탄소는 스스로 배출된 게 아니죠. 전후 자본주의 성장 체제는 선진국과 자본이 팔레스타인을 분쟁 지구로 만들고 아프리카도 내전 지구로 만들면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졌죠. 처음엔 석탄을, 그다음엔 석유를 뽑아내서 독점하고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왔잖아요.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과 규제가 높아지자 북반구의 자본은 제도가 불충분해 노동착취나 환경오염을 해도 벌금 내지 않아도 되는 가난한 나라로 오염 시설을 이전하거나 공장을 짓고 성장을 위한 탄소 배출까지 외주화해왔죠. 성장이 한계에 도달할 때마다 자본은 끊임없이 새롭게 팽창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냈어요. 물론 그 공간은 또 다른 착취를 이전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 자본과 기후위기의 연관성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2000년대 들어와서 자본이 만들어낸 팽창의 수단이 금융과 세계화였다면 지금은 메타버스 같은 가상공간을 열고 있죠. 하지만 가상 경제도 진짜 가상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반도체, 배터리, 전기저장장치, 태양광 패널 모듈판까지, 모든 단계에서 광물자원이 필요해요. 구리, 텅스텐, 리튬 같은 광물은 어디서 나오나요? 가상이 아닌 살아있는 지구 몸에서 나오잖아요. 메타버스가 무한하다고 해도 우리의 유니버스는 지구를 넘어설 수 없죠. 그래서 관건은 물질 소비를 줄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의 축소가 이뤄져야 하죠.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정책일 뿐 아니라 생태적 전환을 위한 대안이기도 한 이유가 그 때문이고요. 또한 이것이 기후위기와 민주주의가 연결되는 지점이죠.
- 기후위기와 민주주의의 연결 지점이라면?
민주주의는 ‘사람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사회적 강제,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노동시간을 공적으로 제약해야 한다’고 하는 사회적인 통제력이 작동하게 만드는 힘이니까요. 서구에서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을 실현하고 금융자본을 억제했던 시기도 노동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였어요. 대다수 시민은 노동자이고,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을 규제했던 거잖아요. 자본을 억제하는 민주적 힘들의 결속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와해되고 주권적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 자본은 다시 해방돼요. 그러면 할 수 없던 것들,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맘껏 할 수 있죠. 그래서 기후위기 원인과 해결의 직접적인 키가 민주주의인 거죠.
- ‘탄소중립’ ‘그린뉴딜’ 등 전문가들이 내놓는 기후위기 대응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뢰할 수 없죠. 과학자들이 내놓는 조사 결과가 아니라 나이브한 대안을 신뢰할 수 없었어요. 저는 ‘탄소중립’ 같은 탄소환원론은 기후위기만큼이나 해롭고 위험한 거라고 봐요. 지금 탄소중립 중심의 기후위기 대응은 ‘감축’과 ‘적응’이 두 축이에요. ‘감축’은 주로 온실가스 배출에 맞춰져 있고, 몇 년도까지 몇 퍼센트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 어디에서 흡수하고 어디에서 배출하겠다고 하는 계획이죠. 문제는 기존 체제가 그대로 지속될 것을 가정하고 대단히 경로의존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적응’은 해수면이 높아지면 물에 뜨는 집을 만들겠다, 기후가 불안정하니까 스마트팜을 하고 전기 자동차를 만들자 같은 대안이 대표적이죠. 근대 문명적 사유의 특징들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인 거예요. 인간과 서구중심주의, 성장과 기술에 대한 맹신 때문에 기후위기가 일어났다고 인정하면서 기후위기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모순 아닌가요.
- 기업의 ESG나 RE100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오고 계십니다. ‘기업들이 잘하게 놔두지, 왜 하기도 전에 비판하냐’는 입장도 있는데요.
기업이 기후위기 주범이라고 말하면서도 기업의 선의를 믿고 계속 기회를 주는 거죠. RE100(필요한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기업의 자발적 글로벌 신재생에너지 캠페인)은 정부나 국민이 지금까지 환경오염을 일으켜온 기업들을 평가하고 규제하여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을 내리는 민주적 통제 방식이 아니에요. 시장의 자율 규제이고 상품화된 평가인증 방식이죠. RE100을 검증하는 글로벌 평가인증기관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더 클라이밋 그룹’(The Climate Group)인데, 비영리 기구라고 되어있어서 공인된 국제단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민간 기업이고 평가 회사예요. 거기서 발행한 인증서를 받으면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입증이 되는 거죠. 그런데 RE100에 가입한 기업들 대다수가 금융 기업이에요. 다국적 기업과 은행, 보험회사, 평가회사, 투자사, 자산운용회사 등,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인 금융자본 업종들이 대거 들어가있단 말이에요. 금융은 소위 ‘굴뚝산업’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혁신경제 분야이고 탈석탄 산업이지만, 굴뚝에 불을 지피는 게 금융이잖아요. 결과적으로 RE100은 금융자본의 기후위기 책임을 은폐하고 세탁해주는 그린워싱인 거죠.
그런데 시민들이 RE100 시민클럽을 만들어서 캠페인을 해요. 기업도 솔선수범하는데 시민도 하자고요? 그 운동은 뭐가 되나요. 캠페인을 하려면 청소년기후행동에서 하는 것처럼 RE100이 그린워싱임을 폭로하는 캠페인을 하자는 거죠. ‘플로깅’ ‘제로 웨이스트’ 다 좋은데, 우리끼리 착하고 아름답게 하는 데서 끝낼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하려면 코카콜라 회사 앞에 코카콜라 페트병이라도 던지는, 그린워싱 기업에 녹색 페인트칠이라도 하는 식의 집단행동과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거죠.
- ‘탈성장’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대안 경제로 보는 학자들 중 한 분이시죠. 탈성장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데, 흔히 저성장이나 역성장은 공포로 인식됩니다.
탈성장을 역성장이나 저성장이라고 흔히 오해하는데요. 성장하는 체제 내에서의 역성장이나 저성장은 굉장히 고통스럽죠. 서민층부터 주가 하락과 금리 인상, 또는 긴축예산과 구조조정에 따른 시장 충격을 감내해야 하니까요. 탈성장은 이 성장체제 자체의 궤도를 이탈해서 다른 방식의 경제, 즉 자연의 경제에 인간의 경제를 맞추자는 거예요. 근대 문명과 자본주의의 성장체제가 이를 완전히 파기해 버렸지만, 자본주의 이전에는 밤에 쉬고 낮에 일하는 자연의 경제 즉 섭리 안에 인간의 경제가 있었잖아요. 오늘날은 시장 질서를 섭리처럼 생각하지만, 지금과 같이 24시간 노동체제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계속하게 된 때는 199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가 세계화된 시점부터였어요. 생태적인 존재인 사람의 몸을 자연의 시간에 맞추지 않고, 시장의 시간 특히 금융의 시간에 맞춘 거죠.
자연의 경제, 자연의 섭리에 무한히 성장하는 건 없어요. 모든 생명은 쇠퇴하고 다음 생명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죠. 과학기술 문명의 한계를 깨닫고, 돈이 돈을 위해 돈을 버는 경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생산하고 돌봄이 중심 되는 경제를 모색해야 하는 순간인 거죠. 계속 성장하는 경제 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기후위기가 드러낸 거잖아요.
- 경제성장이 계속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탈성장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상적으로 여겨지진 않을까요?
탈성장이 이런 거고 이게 바르다는 식으로는 사람들이 설득되지 않을 거고요. 저도 그렇게 개념적으로 설득시킬 자신은 없고, 그런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얘기하는 건, ‘저항’과 ‘돌봄’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에요. 저항은 일단 이 구조를 계속 유지해야겠다고 하는 힘들과 싸우는 거죠. 집요하게 성장을 붙들고 있는 체제와 대결하지 않고서는 순조롭게 탈성장 체제로 이행할 수가 없어요.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하는 순간 자본은 반드시 저항 세력을 핍박할 테니까요. 그런데 저항 없는 개인 실천은 개인적 ‘선의’지만, 최악의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아요. 열심히 분리배출해도 다 재활용하지 않는데1), 시간만 뺏기고 자기만족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항, 즉 사회운동만 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죠. 해체되고 있는 돌봄의 경로를 구축해야 돼요. 환경인문학자 롭 닉슨이 쓴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에서도 나오는 얘기인데,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언어를 발명해야 해요. 이 위기를 감각하고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길어 올릴 수 있는 언어 말이에요. 인제에서 전문가가 아닌 주민들이 대안을 찾은 것처럼, 최전선에서 공동체로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이를 수집하는 일이 필요해요.
-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리는 자극적인 보도가 이어지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피로도는 올라가고 있는데요.
운동이 주목하고 시작해야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부터라고 생각해요. 인식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많이 줘서 알리는 일은 지금으로선 맞지 않는 운동이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확산시키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절망하지 않도록 해야죠. 아까 말했듯, 저항하면서 돌봄을 구축하는 일이 지금 운동이 개입할 지점이라고 봐요.
기후위기 운동이 방향성을 제대로 잡으려면 자본이 왜 갑자기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는지 살펴봐야 해요. 이유는 하나죠. 기후위기가 돈이 되는 거니까. 탄소가 돈이 되고 ESG가 금융 상품이 되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니까요.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의식하면 할수록 파생되는 상품을 팔아먹을 수 있는 기후 시장이 열리고 주식·펀드·채권은 물론이고 위기로부터 개인들을 지켜줄 안전 용품부터 시작해서 주택이나 자동차까지, 다 이제 돈이 되는 거죠. 요새는 민관 협력도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진행하기 때문에 공공자원이 기후 대응에 투입되면 자본엔 또 새로운 공공서비스 시장이 열리게 되죠. 그래서 저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답을 가진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희망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게 맞는 건가?’라는 물음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는 일에서 시작될 거예요.
1) 국내에서 2018년 발생한 폐플라스틱 822만 톤 중 생활계 폐플라스틱 323만 톤의 44.9%인 145만 톤이 분리배출되었다. 이 중 선별되어 실제로 재활용된 것은 78만 톤(생활계 폐플라스틱 중 24.1%)으로 추정된다. (2050 탄소중립위원회 탄소중립시민회의 시민대토론회[2021년 9월 11-12일] 발표자료 ‘국내 폐기물 관리 현황’ 참조.)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