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호 나의 최애들]
1971년 대구 〈매일신문〉에 가작 입선을 하여 시상식에 갈 때 무릎을 기운 바지를 입고 나섰더니, 아랫마을 김 집사님이 조금 나은 바지를 가지고 와서 굳이 입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빌려 준 바지를 입으려 하니, 추운데 그냥 껴입고 가라고 하셔서 껴입었다.
매일신문사를 찾아가 시상식장에 앉아 있으니 위아래 옷을 껴입고 있어 너무 거북스러웠던 것이 생각난다. 상금은 2만 원이었다. 시상식이 끝나 입상자들과 심사위원이 어디 다른 장소로 갈 모양인데, 동화 심사를 맡았던 김성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등을 밀며 어서 돌아가라고 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 《빌뱅이 언덕》, 18쪽.
스스로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한 권정생은, 동화작가로 등단하던 그 순간조차 무릎을 기운 바지를 입은 채 ‘그들만의 세계’에서 배제되었던 장면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1937년 도쿄 빈민촌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가족과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여러 사정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그는 객지를 전전하며 10대를 보낸다. 20대에는 그리워하던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곧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동생만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권정생에게 집에서 나가기를 권유한다. 전신 결핵을 앓던 그는 집안의 짐이었다. 가족들에게조차 배제된 그는 그렇게 다시 객지를 전전한다. 집을 나온 권정생은 “철저한 거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3개월 동안 유랑하다가 몸이 불덩이가 될 정도로 아프게 되자 결국 집을 찾아 들어간다.
권정생은 3개월의 유랑 기간을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 기간”으로 여겼다. 그 기간 길에서 헤맨 경험과 그곳에서 10대와 20대에 만난 가난하며 소외된 이들은, 이후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로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그는 길에서 예수님과 깊게 사귀게 된다.
들판에 앉아서 읽은 성경을 생생하게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머리로 읽는 성경은 자칫하면 환상에 그치고 말지만 실제로 체험하면서 읽으면 성경의 주인공과 대화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죽음과의 싸움에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났고, 아모스를, 엘리야를, 애굽에 팔려 간 요셉을, 그리고 세례 요한을, 사도 바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깝게 나의 주 예수님을 사귈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 같은 책, 43쪽.
길에서 몸으로 체험한 성경은 이후 권정생이 쓴 주요 작품들의 밑바탕이 된다.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동화에 예수님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후에는 차차 직접적인 기독교 색채가 옅어진다. 점차 이야기 전체의 세계관 자체로 평화의 하나님 나라 비전을 그려낸다고나 할까. 그것도 우리 민담과 전설 속 존재들과 엮어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로. 마치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켄타우로스와 미노타우로스, 파우누스가 자유자재로 나오는 것처럼, 권정생의 작품에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한 늑대 할머니(《밥데기 죽데기》, 바오로딸, 1999)나 도깨비(《팔푼돌이네 삼형제》, 현암사, 2007)가 등장한다. 권정생은 한국적 맥락의 환상성으로 성서적 세계관을 다채롭게 펼쳐내 우리의 상상력을 돋운다. 그의 장편 동화들은 우리에게 다른 빛깔의 영적 감수성을 피어나게 하는 소중한 기독교적 자산이다. 권정생을 알면 알수록,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이 어떻게 배제된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지 벅찬 마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오직 그의 글을 읽은 자들만의 기쁨.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한 건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다. 지난 호에도 썼듯, 정희진 선생님이 30대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장학금 서류를 받으러 갔을 때 “어머니가 대신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대학원 다니는 30대 여성은 끼면 안 되는 시공간에 침입한 외계인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려 2010년대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