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시대를 잇는 읽기] 이철승의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후마니타스, 2019)

저자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복지국가와 불평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2005)를 받고, 2013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되었다. 《불평등의 세대》 《쌀 재난 국가》(문학과지성사) 등을 썼다.
저자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복지국가와 불평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2005)를 받고, 2013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되었다. 《불평등의 세대》 《쌀 재난 국가》(문학과지성사) 등을 썼다.

최근 ‘자유’와 ‘안전’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간섭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고 불의의 사고 혹은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좀 더 안전한 사회, 둘 다 누구나 원하는 사회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국가정책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가 시민사회 각 영역에 침투하여 전반적인 지배 논리가 된 현실에서, 국가가 강조하는 ‘자유’란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에 사회를 맡기고 국가는 주로 그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서 개입은 최소화하겠다는 이념과 정책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불가피하게 시장경제 논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한 삶을 확보하기 어려운 사회적 취약계층에는 국가가 어디까지 ‘안전’을 보장하느냐가 기초 생활수준과 생존 문제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국가정책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어떤 가치를 더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예산을 배분할 것인가? 이는 결국 국민 다수의 인식과 정치적인 선택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에 두고, 특히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형성이라는 구체적 사례에 주목하면서, 이철승 교수의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 배태된 응집성과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을 살펴보려 한다. 이 책은 복지국가 형성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연대가 어떤 작용을 해왔는지를 ‘배태성과 응집성’ 개념에 비추어 한국 사례를 중심으로 (다른 세 나라와의 비교 연구를 포함하여) 규명한다.

이 책은 일단 복지국가 형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저자는 먼저 그간 서구 사회 경험에 근거한 이론으로는 개발도상국의 복지제도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사회운동과 그 조직적인 연대를 중심으로 한 관점을 통해 설명을 시도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사회 세력으로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에 주목한다. 한국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규명하여 보편적인 사회정책을 수립하는 데 노동-시민 연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저자의 용어로 ‘배태된 응집성’ 모델) 또한 논증하려 한다. 저자는 먼저 한국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동-시민 연대가 어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의료보험 개혁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역사

1970년 11월, 22세의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분신은 당시 아주 소수의 관련자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 YH무역 사건 등 노동문제가 점점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 세력은 한국 사회 변화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주요 변수임이 드러나게 된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1995년 정부의 영향과 종속에서 벗어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건설하기에 이르며, 민주노총은 1997년 합법화되었고, 2010년 기준, 약 58만 명의 노동자를 망라하는 노조연맹으로 남아있다(고용노동부 자료에 의하면, 조직화된 전체 노동자 중 35.3%). 그리고 2000년 마침내 노조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동당이 탄생하고 2004년 총선에서는 정당 투표에서 13.1%를 득표, 비례대표제에 의한 8석과 지역구 당선자 2명을 포함하여 국회 의석 총 10석을 획득하는 성과를 얻는다.

여기서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 그 자체보다는 노동운동 성장 과정에서 어떻게 지식인과 중산층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결합하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둔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소수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노동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개신교 배경의 산업선교회와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돕는 활동을 전개한 것이 1970년대 후반 초기 노동운동의 형성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나아가 1980년대에는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 사상으로 무장한 수많은 대학생 활동가들이 대학 졸업 후, 또는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 현장에 들어가게 된다(학력을 속이고 공장에 위장 취업한 이들을 ‘학출’ 노동운동가라 불렀다). 이들은 이후에도 현장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노동 관련 상담가, 공장 밖 스터디 모임 조직자, 야학 교사, 노동단체 간사, 또는 (노동운동과의 연대 의식을 지닌) 시민단체 활동가의 길을 가게 되며, 노동-시민 연대의 기반이 된다는 점을 저자는 비중 있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 사회주의진영이 붕괴하자,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사회운동 안에서 큰 혼란과 변화가 일어난다. 와중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참여연대를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가 새롭게 등장하여 이른바 시민운동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흐름 중에서 저자는 노동 친화적 시민단체의 등장에 주목하며, 특히 참여연대에 대해 “당시 급진 노동운동과 의도적으로 거리 두기를 한 다른 많은 시민단체들과 달리” 의식적으로 노조와 사례별로 동맹을 맺었음을 지적하고, “경실련은 출범 당시부터 의식적으로 자신을 소위 급진 민중운동과 구별한 반면, 참여연대는 1990년대에 국가와 시민사회가 대립하던 결정적 순간들에도 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1990년대 초중반, 우후죽순 등장한 정치적 성향의 시민단체들은 주로 노동운동가 출신 또는 1980년대부터 노동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어온 이들이 주도했고, 이런 배경에서 형성된 시민-노동 연대의 기반이 이후 우리 사회 중요한 복지제도 수립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그 대표 사례로서,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주로 종교 기관과 연계하여 1970-1980년대 농민, 도시 빈민 등 의료 취약계층을 위한 의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의료 전공 대학생들은 전문적인 보건의료단체를 설립하여 지속적인 사회 활동을 전개한다. 한편 지역의료보험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조건 개선뿐 아니라, 건강보험 통합 운동을 통해 보편적인 사회적 시민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활동 목표를 설정하며 의료보험 개혁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농민들로 구성된 대중조직, 전국적으로 강력한 동원 역량을 보유한 지역의료보험 노동조합, 광범위하고 기술적인 전문성과 운동의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의료보험 전문가 및 지식인 단체 등이 모인 삼자 동맹이 형성되어, 마침내 1994년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및 보험적용 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의보연대회의)가 출범한다.

의보연대회의는 노조와 시민단체 사이의 연대 외에도 기성 정당과 정부 관료들에 대한 효과적인 로비 통로를 개발했다. 저자는 “의보연대회의는 정교한 논리와 자료를 가지고 정책 대안을 개발하고 (비)선거적 동원 위협을 통해 국회와 주요 정당을 압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한국 현대사 최초의 시민단체였다”고 평가한다.

그 결과 국민의료보험법이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에 공포됐고, 핵심 개혁들 ―분산된 기관의 통합과 자영업자로까지 보장 대상 확대― 은 김대중 정부에서 실현됐는데, 저자는 “이는 특히 민주노총과 시민단체가 연합해 보다 진보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를 최종안에 포함시킨 노력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의 형성과 달리 국민연금제도 성립 과정에서는 노동운동의 소극적인 대응과 시민사회와의 약한 연대로 인해 별로 긍정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후에도 “약한 응집성과 약한 배태성으로 말미암아 국민연금의 핵심 원리는 이후 노무현 정부의 축소 시도 앞에서 매우 쉽게 허물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한국 사례 외에도 별도의 장에서 대만·아르헨티나·브라질 사례를 연구하여, 복지제도 형성 과정에서 노동-시민 연대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한국 사례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배태성-응집성 이론 모델을 입증하려 한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저자는 노동-시민 연대가 보편적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갖는지를 규명하여, ‘배태된 응집성 모델’로 이론적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이론화가 사회과학 연구로서 어떤 가치와 한계를 갖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날 노동과 시민사회 영역 모두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하게 세분화·전문화되었고, 각 집단 간 갈등 전선도 훨씬 복잡한 형태로 분화·교차되고 있으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세력도 이 연구가 다루는 시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고 축소된 상태임을 생각할 때, 이런 상황에서 이 연구가 어떤 참고가 될지 질문을 품게 된다.

국민건강보험 개혁 운동 사례에서 노동-시민의 강한 연대가 가능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민주노총 중심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노동계급의 이익만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 개혁에 대한 이론적·정책적 관점을 견지했고, 시민단체들 역시 보다 평등한 사회로의 변화에서 노동문제가 갖는 의미를 깊이 인식하는 활동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1980년대 급진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거대 담론이 힘을 잃은 지금, 다양하게 분화된 시민사회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연대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가 오늘날 직면한 힘겨운 과제가 아닐까 한다.

한 가지 경계할 점은, 이런 이론 모델이 노동운동의 요구를 시민사회와의 연대 구조 안에 제한하는 논리로 활용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자기 집단(계급)의 이익 실현을 위한 조직(운동)이다. 노동운동의 요구는 시민사회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야 실현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그 요구가 정당하지 않다거나 통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때로는 실패를 예상하더라도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노동자 문제가 중산층 이익과 충돌하는 상황도 적지 않으며, 시민사회라는 말은 종종 중산층 계급 이익을 은폐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에 대해 환자도 의사도 불만이 많다. 아마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제한받는 의사와 병원들의 불만이 훨씬 클 것이다. 그래서 2002년과 2012년 대한의사협회는 건강보험의 보편적 의무조항이 “의료 기관의 ‘자유로운 사업 활동’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제소했다. 헌법재판소는 “현 의무가 헌법상 타당하고 시민의 (보편적)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선고했다.

국민 전체를 포괄하는 의료보험제도를 국가가 시행하지 않는다면 국민 다수의 보건의료 상황은 어떻게 될까? 미국처럼 민간 보험에 의존하는 형태라면? 특히 의료 취약계층은? 의료 불평등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고, 치료비가 비싸서 병원에 가지 않고 참다가 결국 치명적 상태에 이르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 될 것이다.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이전에 수립된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든 한계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괜찮은 제도 중 하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제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립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철승 교수의 연구는 지금과 같은 수준의 국민건강보험을 이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노동운동가들과 시민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저자는 “적어도 이 책에서 인터뷰한, 또는 하지 못한 수많은 시민운동과 노동 분야 활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 누리는 복지혜택은 훨씬 조야하고 덜 체계적이었을 것이다”라며, “1990년대 말, 한국의 노동-시민 연대는 그 포괄성 측면에서 (개발도상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며 통합적인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일구어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단지 과거의 공헌을 상찬하기보다는, 이 제도를 지키고 더욱 충실히 확장하기 위해 앞으로도 집단적인 노력과 연대가 지속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게 하는 의의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 어떤 국가를 원하는 걸까? 되도록 간섭받지 않고 내 이익과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와 이를 최대한 보장하는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의 삶은 그들의 능력과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는― 국가인가? 아니면,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국가와 그에 따른 일정한 의무를 수용하면서 내 이익과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인가? 둘 중에 어느 쪽인가?

김민수
1970-1980년대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활동가의 삶을 정리하고 생업에 매진했다. 느지막이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공부했고, 현재 기독교정치사회연구소(Somnium) 대표를 맡고 있다. 번역서로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한국신학연구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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