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몸의 치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시점은 2013년 어간이었다. 남은 일생을 아픈 몸으로 살아내야 함을, 2002년 진단 이후 11년 만에 ‘다시’ 명백하게 받아들였다. ‘치유 사역자’를 만나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2022년 7월·380호). 고등학생 때 예수를 영접한 후로 몸을 ‘치유’하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투철했기에 적잖은 충격이 남았다. 그동안 내가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기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고지론과 번영신학을 미워했으며,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박처럼 새기려 했다. 내가 꿈꾸었던 신앙 지향대로라면, 예수(눅 22:42)께서, 그리고 바울(고후 12:9)이 몸소 보여줬듯이 ‘(치유하시든 치유하지 않으시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반응했어야 맞았을 테다.
내 딴에는 회심하여 예수를 받아들인 시점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여겼는지 의아하다. 당시 닳도록 읽은 성경책에 적힌 누가복음 16장 31절 귀퉁이를 보면, “기적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을 일으킬 수 없다”라는 메모를 굵은 글씨로 써놓았는데, 허울뿐인 고백이었던가. 내가 자란 교회 문화 속 장애는 고침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쓰이는 간증 도구였을 따름이다. 젊은이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신앙을 갖는 첫 순간 외에는 누가 무어라 해도 덕스럽지 못하게 여겨졌다. 장애인은 전도 활동이나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봉사와 나눔을 ‘받는’ 객체로만 존재했다. 회심하면서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사용해달라’ 기도했지만, 상상 속 미래의 ‘나’는 응당 비장애인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욕망을 기도 제목으로 앞세우는 듯한 사람들을 내심 비웃었다. 경남의 그 기도원을 운영했던 목회자 부부에게 ‘예언’과 ‘치유’ 기도를 받으며 보낸 4-5년이, 나 자신을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으로 여기며 나와 다른 이들을 구분 짓는 시간이었다는 점을 뼈아프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과 관계를 끊고 돌아섰을 때 세차게 밀려드는 답답함과 막막함을 마주하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제 더는 기만하면서, 혹은 정신승리로 신앙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변화는 한꺼번에 찾아왔다. 내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신앙을 재검토하기로 마음먹은 데 따른 결과였다. 먼저는 덮어놓고 믿어온 성경무오설과 창조과학 등에 제기되는 의문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터 엔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CLC), 권연경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SFC), 우종학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 등이 변화의 계기를 열었다. 기존에는 방어적인 태도로 선을 긋고 경계하며 조심스러워했을 법한 자료까지 읽어나가며 실마리를 풀었다. ‘역사적 예수’와 관련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기독교 서적들이나 예수의 실존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책도 열린 자세로 학습해나갔다. 내가 갖고 있던 신앙을 시험대에 올리기로 했다.
그럼에도 치유되지 못한 몸은 어떻게 살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고쳐지지 않을 몸을, 그리고 내 ‘장애’를 당장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여러모로 지친 탓에, 딱히 다른 대안을 가늠해보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은 ‘불확실성’에 휩싸여있었다. 나도 의사도 물리치료사도 그때그때 내 몸 상태를 그저 확인하는 일 외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늘 은근한 감각으로 남아있는 근육통을 내버려둔 채 살았다. 어차피 근육이 점차 안 좋아질 텐데, 딱히 재활치료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관리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당장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예후나 차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내 몸은 내가 편한 쪽으로 마음대로 사용하는 길이 정답처럼 보였다. 관리한답시고 병원에 오가는 발걸음이나 기회비용, 애쓰는 일 자체가 번거롭고 불필요해 보였다. 이때의 심리 상태를 ‘운명론적 체념’이라고 한다면 알맞은 표현일까.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시 제자리.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하나만 달라졌을 뿐이다.
몸이 망가져도 상관없겠다는 충동 어린 마음도 불쑥불쑥 올라왔다. 몸 혹은 정신 상태가 막다른 국면에 접어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마음먹은, 따돌림당하던 중학생 시절 자아가 마음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듯했다(2022년 3월·376호). ‘갑자기 병이 확 진행되면, 콱 죽어버리고 말지.’ 당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뜻언뜻 비치던 여하한 상상은 비장애중심주의 관점에서 흔히 드러나는 단견1)을 보여줄 뿐이었지만, 이를 바로잡을 내면의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이영양증은 지방간을 불러오고, 호흡하는 근육에 영향을 줘서 술·담배는 되도록 피해야 했다. 물론 그 이전에 보수적 한국 장로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특유의 신앙관 때문에라도 술·담배는 일절 건드리지 않고 살았는데, 주초(酒草)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이르렀다. 취직 후 반복된 노동에 일과를 쏟아붓고 살며 담배를 배웠다. 애매하고 소심한 반항심 같은 것이었을까. 홀로 타지 생활을 하는 처지였으니, 돌아가신 아버지 냄새가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다. 피울 때마다 어린 시절 아버지 품에서 맡았던 그 담배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우면, 은근한 안정감이 생겼다. 나는 대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 병원 의사에게 ‘그러다 죽는다’는 강력한 경고까지 들었음에도 음주와 흡연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를 ‘자기 몸을 망치는 일이 취미 아닐까’ 싶은 눈초리로 멀찍이서 바라보곤 했다. 나는 반년 넘게 피웠었나. 별다른 노력 없이 끊어낼 수 있었다.
야곱의 밤
원점을 맴도는 듯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어지지 않는 기도를 붙잡고 자리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한창때는 쉬지 않고 하는 방언기도나 통성기도를 참 좋아했는데, ‘사람이 정말 답답하고 힘들면 기도할 때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분의 말씀이면 무엇이든 절실한 날들이었다. 기도가 ‘침묵’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적잖게 해왔음에도, 이 시기는 뭔가 달랐다. 너머에 아무것도 없어서 기도가 닿지 않는 느낌, 침묵을 넘어선 깊디깊은 ‘정적’ 그 자체였다. 고요에 몸을 맡기면 절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후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인간의 보편적이면서도 내밀한 욕망을 끌어안고 있었다고 솔직히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자명한 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음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삶을 내 통제 아래 두고 싶었음을 자인하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 그동안 교회나 책을 통해 들은풍월이 있었지만, 방언이나 예배 시간의 감동 등 고양된 신앙 감정 체험에 국한하여, ‘치유의 역사’로 내 몸을 바꿔놓을 개인적 차원의 도구로서만 인식해오지 않았나 싶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했다. 지금도 그 이해를 확장하는 여정 중에 있다.
잭 레비슨의 《내가 알지 못했던 성령》(감은사)은 기독교에서 간과하기 쉬운 성령의 입체적 면모를 성경을 통해 다시 읽어내도록 이끈다. 단적인 예로 세례받는 예수께 온화한 비둘기처럼 임하셨던 이 ‘거룩한 영’은 곧바로 “사나운 적대감이 흐르는 세계”인 광야로 예수를 “과격하게 몰아낸다.”(192쪽) 예수와 함께하며 온갖 귀신과 병을 ‘몰아낸’ 이 영과 함께한 제자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 놓였고, 마침내는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이 영-바람은 “우리가 결코 자진해서는 가지 않을 장소, 가지 않을 사람에게로 우리를 보낸다.”(198쪽)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에스겔 37장에서는 “우리의 안정된 실존을 뿌리째 뽑아내려는 듯 불어오는 회오리바람”(165쪽)으로 임한다. 이 구절에서 일어나는 ‘부활’은 고통 없는 안온한 과정이 아니었다. 거룩한 영과 함께 치유 사역을 했던 예수의 공생애 여정은 어떠했는가. 캐나다 루터교 신학자 해롤드 레무스는 성서학·의학·사회학·인류학 자료를 통해 예수의 치유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치유자 예수님》(가톨릭대학교출판부)에서 가정치료나 의술이 듣지 않았을 때 찾았던 2세기 치유자들 사례를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다른 치유자들은 예수님처럼 스승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어떤 치유자도 십자가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27쪽)
성경 속 서사는 삶과 만나면서 지속적인 생명을 입었다. 내가 경험한 한밤의 정적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던 성령의 모습은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한국기독교연구소)에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는 ‘성토요일의 성령’과 닮아있었다. 예수께서 성금요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을 맞이하자 제자들은 그야말로 절망의 급습 가운데 트라우마 상황에 빠져들었는데, 부활로 건너가기 전 혼돈의 어둠이 깔린 중간 날인 성토요일에 성령께서는 ‘고통의 목격자’이자 위로자로서 제자들 곁에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애달프고도 기이한 위로로 다가왔다. “이렇게 버림받은 상황을 증언하는 성령은 승리한 모습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없앨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은 살아남았다. 성령은 남아 있는 것으로 또한 남은 것들을 목격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 중간은 인간의 조용한 울음과 하느님의 조용한 울음이 만나는 곳이다. 심연에서 성령은 영혼과 만난다.”(348쪽)
한동안은 ‘완벽하게 병을 고쳐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현 상태라도 유지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기도하기도 했었다. 장애신학과 장애학을 탐구하는 과정 중 만난 논문2)에 나오는 사례를 읽다가 이 기도를 내려놓게 되었다. ‘진행성 희귀난치 장애인의 불안 경험’을 연구 참여자 9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하는 논문이다. 이 중 5명이 나와 같이 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이들로, 연령대는 2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걸쳐있었다. ‘좌상 상태’ ‘와상 상태’ ‘보행 불가능’으로 장애 정도가 정리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두 나보다 증상이 심한 타입의 근이영양증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이들이 겪는 불안 경험은 회복 불가능, 상태 악화, 장애로 인한 제약, 진행 가속도에 대한 불안 등으로 나타나는데, 한 참여자 말에 눈길이 머물렀다. “호흡기만 안 끼고 이렇게 불편하게 살라고 해도 살 수 있는데 … 그냥 여기서만 딱 멈춰줬으면 좋겠어요. 더 바라지도 않고 걷는 건 원하지도 않고요. … 그냥 이것만으로도 행복한데 한 해 한 해 자꾸 진행이 되니까.” 나보다 증상이 훨씬 심한 상태에서 한 고백이었기에 직접 비교하는 일이 타당할까 싶으나, 연속선상에서 여전히 상존하는 불안 가운데 파묻혀있는 스스로가 싫어지기도 했다. 치료와 치유 담론은 언제라도 질병과 장애 서사를 휘어잡으려 강력하고도 끈질긴 힘을 과시한다.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연구자 전혜은의 논문 〈‘아픈 사람’ 정체성을 위한 시론〉3)은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는 호명을 정체성으로 가질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이라는 말을 ‘정체성’으로 사유하고자 할 때 어떤 문제들이, 혹은 어떤 다른 세상이 새로이 열리게 될까?” 질문하는 것으로 ‘사유’를 시작한다. 이는 “장애라는 범주 안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장애가 있는 것처럼 질환도 무수히 많은 다양성을 갖고 있기에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획일적이고 고정된 정체성을 설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당연하게도 어떤 장애인이든 그렇듯이, 나 또한 장애인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점으로 둘 수 없다. 아마도 나는 질병과 장애에 한해 ‘아픈 사람’과 만성질환자와 장애인 사이 어디쯤에서 고민을 이어갈 것이다.
줄곧 품었던 인식과 고집과 예측이 뒤집히는 자리, 그러니까 한때는 진실로 원치 않았던 이 나날을, 에서와의 만남을 앞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며 보낸 밤(창 32:22-31)에 빗대어 생각해본다. 긴 씨름 끝에 엉덩이뼈를 다쳐 절뚝이게 되었지만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선 야곱처럼, 나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찬란한 패배”(프레드릭 비크너, 《어둠 속의 비밀》, 포이에마, 36쪽)를 고백할 수 있을까.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애와 치유는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
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세 가지 물음을 던지면서 지난 글을 맺었다.4) 그중 ‘병을 고치는 약이 앞에 있다면 먹을 것인가?’, 한마디로 ‘장애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애겠는가?’는 주요 장애학 서적에서 한 번씩은 다루는 물음이다.5)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자신의 장애에 자긍심을 갖고서 이 사회 가운데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비장애중심주의에 균열을 내는 활동가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장애’는 자기 정체성이자 일생의 활동과 관련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이다. 위 물음에 당당하게 ‘아니오’ 외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 ‘예’ ‘아니오’로 가를 만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퀴어’(queer)가 한때 멸칭으로 쓰였다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 의해 자긍심이 담긴 용어로 재전유되어 사용되듯이, 미국의 장애 운동 현장에서도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크립’(crip, ‘불구’ ‘병신’)이나 ‘프릭’(freak, ‘변종’ ‘괴물’)이라고 칭하며 새로운 길을 내는 정치적 흐름이 이어지기도 했다.6)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는 《짐을 끄는 짐승들》(오월의봄)에서 ‘선천적 다발성 관절굽음증’ 진단을 받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의학적으로 변형된 지금의 몸보다 장애가 있는 “선천적인” 몸에 더 끌린다. 다소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지만, 이런 끌림은 비장애중심주의 그리고 내면화된 억압을 온몸으로 탐색할 기회를 준다.”(214쪽) 장애를 ‘은사’나 ‘개성’으로 보는 일부 신학자의 목소리도 이에 잇닿아서 논할 수 있겠다.
김홍덕은 《장애신학》(15장 ‘장애의 종말론적 희망’)에서 다운증후군을 지닌 딸 조이가 천국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보면서 “하늘나라에서도 이 땅에서 가진 상처의 흔적들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느낄까? 성경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했다. … 이 땅에서는 장애가 된다 할지라도 천국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 땅의 장애의 모습을 벗어버릴 필요가 있을까?”(451쪽) 물음을 던진다.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이 땅에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동산도 물리법칙이 작용했다면 ‘장애’가 존재했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장애신학 2》, 이상 대장간, 287쪽). 반면, 데이비드 앤더슨은 《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밀알서원)에서 ‘장애’가 타락 이후 들어왔으리라 추정하는데, 장애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반된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무의미한 논의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성경이 그리는 사회와 인간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기독교적 실천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질병과 장애의 ‘치유’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짚으려는 점은, 장애인 중 누군가가 교회에서 기적적 치유를 경험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부분이다. 장애학자 김은정은 ‘타자가 지닌 차이를 지우려는 힘의 행사’로서 ‘치유 폭력’을 논하는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에서 “치유는 종종 장애 및 질병의 이력과 관련된 낙인을 없애지 않는다”(34쪽)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치유된 자는 이후로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치유’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남는다. 이는 본격적인 노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이어진다. 치유된 몸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재활’의 책임 또한 개인으로서 떠안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치유된 자는 치유된 자로서 재활의 책임을 요구받고, 치유되지 못한 자는 치유되지 못했기에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치유된 자의 병이 재발하거나, 그가 다른 질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는 또 어떠한가? 교회는 치유와 치유받지 못함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치유가 ‘장애인 접근성’ 등 문화적·사회적 차원에서 이뤄가야 할 실질적 평등으로 직결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의 전인적 치유 사역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선취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고 봤을 때, 교회 내 치유 담론은 개인적 차원에 국한하여 논의돼서는 안 된다.
장애인-비장애인의 해방
나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주목한 장소에는 장애인이 함께했다고 말한 바 있다(2022년 2월·375호). 데이비드 앤더슨은 마가복음만 대강 환산해도 전체 구절 중 17%가 장애인·병자와 관련해서 활동하는 예수를 다루고 있으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35개 기적 중 23개가 장애인을 포함한다고 언급한다(《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 62쪽). 누가복음 14장 15-24절에서는 장애인이 하나님 나라 혼인 잔치의 주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교회를 가장 간단히 정의하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우리는 말을 바꾸어 예수의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은 교회에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 눈에 보이는 교회의 경계 바깥을 바라봄으로써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배울 수 있음을 인식하려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비아, 175-176쪽)
우리가 장애인을 배려하고 장애인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언젠가 비장애인도 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 ‘장애인에게 편한 것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니까’ 같은 식으로 답하는 모습을 곧잘 본다. 나는 ‘관계’ 차원에서 장애인-비장애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장애 문제에 대한 고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권력관계를 해소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 ‘건강’과 ‘힘’을 우상시하는 사회에서 장애인 해방은 장애인의 해방으로 그치지 않는다. 장애인 해방은 비장애인 해방으로도 이어지며, 이는 곧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무관치 않다. “건강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는 보다 총체적이고 온전함과 기쁨으로 이해되는 샬롬의 개념으로부터 가져온다. … 성경적인 건강은 사람들의 욕구가 충족되고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건강”의 중심에는 사람이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다.”(《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 188쪽)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1:7-9, 새번역)
1) 장애학에서 비판하는 비장애인의 가정법이 있다. 이를테면, ‘하반신 마비인데 어떻게 살아? 그냥 죽고 말지’ 같은 표현이다. 특정 장애인이 성취한 결과에 감탄하고 이를 격려하면서 ‘나라면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거야’라는 식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애인 몸은 ‘불행의 씨앗’이고, 그들의 삶이 ‘고통’ ‘불행’으로 점철되었으리라 판단한다. 이는 사고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장애인에 대한 보도에 달린 댓글 등에서 은근히 발견할 수 있다. 장애인에게도 일상이 있으며, 한 인간으로서 다채로운 삶의 결을 경험하고 있다는 진실을 가리어버린다.
2) 이계승, 〈진행성 희귀난치 장애인의 불안경험 연구〉, 《한국사회복지학 Vol. 70 No. 2》(2018).
3) 전혜은, 〈‘아픈 사람’ 정체성을 위한 시론〉, 《인문과학 Vol. 111》(2017).
4)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내 병을 갑자기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무어라고 답하게 될까? 기약 없는 이 ‘침묵’ 앞에서 나는 내 질병과 장애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가? 만약에 병을 고치는 약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이것을 먹을 것인가?” (2023년 3월·388호)
5) 약 하나 먹는 것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가정은 논의를 위해 단순화한 물음이기는 하다. 우리가 경험상 알고 있듯이, 실제 치료 과정은 부작용과 다른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고려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가진 베커근이영양증을 고치는 약이 나오더라도, 비용이나 부작용을 비롯해 여러 현실적 조건을 입체적으로 고려해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6) ‘크립’과 ‘프릭’에 대한 설명은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현실문화) ‘옮긴이 후기’(전혜은)를 참고했다. “‘crip’과 ‘freak’은 낙인찍는 혐오 표현이었다가 당사자들이 되찾으려 시도하는 용어로, 고통의 역사를 증언하는 용어이자 자긍심의 용어라는 양가성이 그 용어와 관련된 이들에게 수많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300쪽)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11:26)라는 구절이 나온다. 몇몇 학자에 따르면,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놀림조와 비아냥거림이 섞인 명칭이었다. 한국의 경우 ‘예수쟁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이기도 한다.
■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는 이번 회로 마칩니다. 제 개인 서사와 신앙, 그리고 장애학 사이에서 많이 머뭇거렸습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이야기가 얼마큼이나 의미와 호소력을 가질까 고민하면서, 글쓰기에 있어서 저의 한계를 여러모로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