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계속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관계가 끊긴 한 지인의 인사말에 저렇게 답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그는 내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매번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냥 그래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대꾸했다. 이따금 시니컬한 태도를 드러냈지만 담아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마주침이 잦은 사이였다. 다른 얘길 하다가도, 공백이 생기면 그는 꼭 내 ‘몸’으로 화제를 돌렸다. 먹는 약은 없는지, 얼마큼 불편한지,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듣거나 답하다 보면 짜증이 밀려왔다. 당시에는 선의로 해석해서 참고 참았다. 실상은 ‘관심 없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또 물었고, 들었던 대답을 또 들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면’ 묻는 게 당연하겠으나, 정도가 지나쳤다. 근육이 점차 약해진다는 설명 한 번만 들어도 몸 상태를 반복해서 물어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처럼 똑같은 대답을 반복한 적도 처음이었다. 기대한 적 없지만 질문 말고 무언가 받아본 기억도 없다. 줄곧 ‘아픈 사람’을 걱정해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의무감의 발현이었나. 로완 윌리엄스는 말했다. “윤리의 핵심은 단순히 반응하는 게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데서 윤리가 시작되지요.”(《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비아, 1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