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몇 번이나 간절히 바랐다. 학창 시절 체력장, 특히 단거리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는 순서. 내 차례가 오면 어김없이 심장은 크게 뛰었다. 달음질할 때의 어색한 몸짓이 창피했고, 뛰고 난 뒤에 허벅지나 장딴지를 타고 흐르는 저릿한 느낌과 약간의 근육통도 싫었다. 단거리 최고 기록은 뒤에서 두 번째. 달리기로 인한 스트레스에 진저리가 나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딱 한 번이었다. 그 외 꼴찌 자리는 내 몫이었고, 나도 두 살 터울인 형과 마찬가지로 ‘거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중학교 이후로는 수행평가나 체력장 등 어쩔 수 없을 때만 달렸다. 이제 달리기 자체가 불가능한 몸이 돼버려서 달음질하는 감각이 그리울 법도 한데, 힘들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부모님이 감춰두어 병이 있는지도 몰랐던 꼬꼬마 시절, 형하고 같이 “엄마, 우리는 왜 달리기를 못할까요?”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몸이 약해서 그래 … 무리하지 마”라던 어머니의 물기 어린 대답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확률이란 참 얄궂다. 이환율은 50%라는데, 형제가 둘 다 근이영양증을 갖고 태어났으니 말이다. 큰외삼촌, 작은외삼촌까지 포함하면 줄줄이 병을 가졌다. 섭리·예정·경륜 같은 단어로 ‘하나님 뜻’이라고 못 박는 게 좋을까? ‘비장애형제’1)는 없었다. 형과 내가 같은 병을 가졌기에 서로의 몸을 잘 알게 된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큰외삼촌 외아들인 사촌 형은 유전되지 않았다. 근이영양증을 알게 된 후부터, 부러움보다는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를 보듯 어색한 거리감으로 사촌 형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병은 외삼촌 대에 발견되었다. 보인자인 외할머니로부터 ‘우연히’ 시작되었더랬다. “한 가계 내에서 근이영양증을 일으키는 돌연변이는 단순히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근이영양증이 어느 특정 가계 내에서 시작되는지는 아직 설명할 수 없습니다”(《근이영양증》, 백의, 28쪽)라는 말을 처음 들은 날, 짓쳐 올라오는 억울함을 되삼키기 어려웠다.
열세 살 때 서울의 재활의학과 의사로부터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은 후, 형과 서로의 병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부분적으로 ‘병원에서 아프다고 하더라’는 식의 말은 전했던 것 같은데, 노골적으로 근이영양증 자체를 토픽에 올리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불문율이었다. 본격적으로 발병했을 때 몸이 서서히 망가지게 된다는, ‘진행성 희귀난치병’이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고요한 절망, ‘미래 없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수전 손택이 쓴 《은유로서의 질병》(이후)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건강의 왕국’에서 ‘질병의 왕국’으로의 이주를 끝마친 상태였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난데없이 이국 공항 벤치 위에 있는 상황이라고 느꼈던가. 짙은 안개가 끼어들어 눈앞의 세계가 일순간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이는 사춘기다운 예민한 감수성이 낳은 과장된 반응이기도 했다. 하굣길, 또래 친구들 몇 명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현실을 가족들과 자세히 나누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어린 내게 부모님은 원망할 대상이었고, 형은 암담한 세계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서로 동정할 일도 아니었다.
“걸음이 빠른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 없다”
근이영양증에 관한 형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내가 병을 진단받은 날로부터 19년이 지난 2년 전 처음 이루어졌다. 장애학 서적을 연달아 읽으면서, 문득 형은 같은 질병과 장애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졌다. 오래 외면해온 과제를 직면하는 기분으로 질문지를 보낸 뒤, 긴 시간 통화를 했다. 짐작했던 바와 달리, 형과의 대화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맞닥뜨린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불러온 황망한 마음과 ‘왜 이제야 이야기하게 되었을까’라는 후회, 죄책감이었다. 나는 의사로부터 근이영양증 진단을 직접 받았지만, 형은 병에 대해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다. 당시 나와 같은 검사를 받은 형은 중학생이었고, 곧바로 삼천포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수원 큰고모네에 보름간 머물렀다. 나는 그 시절부터 형과 비슷한 감각을 공유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형이 자신의 병과 마주한 시점은 고등학생 시절 학교 수련회 때였고, 몇 년이 지나 병역판정검사를 받고자 병원 서류를 떼었을 때 근이영양증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돌아보니, 나는 검사 결과를 면전에서 전해 들었는데도, 추후 형에게 진단명을 전달하지 않았었다. 이미 병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의사로부터 그 결과를 듣게 한 부모님을 향한 원망, 거대한 파도처럼 몸과 마음을 덮쳐왔던 진단 당시 충격으로 인한 상실감과 박탈감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리가 안 좋다는 말과 무리하면 안 된다는 말은 전달했다고 기억하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이 장면은 형의 기억에 없었다. 병에 대한 언어를 갖고 있었던 나와, 그렇지 못했던 형 사이에는 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형은 한동안 자신이 ‘억세게 운이 안 좋아서’ 약한 몸으로 태어났고, 기를 쓰고 노력한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래 집단 영향도 한몫했는데, 나는 중학생 때 나를 따돌리던 아이들 대부분이 고등학생 때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던 탓에, 주변에선 내가 열외로 빠지든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 형 친구들은 겉보기에 멀쩡한 형의 몸을 보면서, 단체로 기합받거나 체육 시간에 형이 열외로 빠지는 모습을 ‘특혜’로 여기고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형은 고등학생 때 학교 수련회에서 열외가 되지 않으려고 ‘억지로 억지로’ 모든 활동에 참여했다. 혹사되어 후유증으로 며칠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서야, 자기 몸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주변 친구들도 형의 몸이 지닌 문제를 인식했다. 어릴 적부터 궁금한 것들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봐야 직성이 풀렸던 나와 다르게, 형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안들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겨도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조금만 갑갑해도 견디지 못해 터틀넥 입기를 강하게 거부했고 엄살 부리는 솜씨 또한 출중했다. 형은 몸이 힘들고 불편해도 어떻게든 참아내려 애쓰면서 되도록 자신을 주변에 맞추는 요령부득한 인물이었다. 동생에게도 늘 져주는 쪽을 택했다. ‘환자와 가족을 위한 책’ 《근이영양증》은 가족 내에서 병을 대할 때는 ‘열려있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언제고 권장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가족 사이에서는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일이다. 그 때문인지 형 또한 부모님에게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왜 몸 상태를 설명해주지 않아서 학창 시절 ‘헛수고’하게 만들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얼마 전 반년 정도 만에 형과 어머니가 있는 부산의 집으로 내려갔다가 형의 걸음걸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취직한 뒤로는 부산에 어쩌다 내려가도, 집에 거의 틀어박혀 지냈기 때문에 관찰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형이 지팡이를 짚고서 걷는데, 속도가 나의 두 배에 가까웠다. 넘어질 듯한 모습으로 불안정하게 걸음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걷느냐고 물었더니, ‘성격이 급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연찮게 성동혁 시인이 쓴 〈계단〉을 읽다가, 웬만하면 몸이 편한 쪽을 택하여 조심조심 걷는 나와 달랐던 형의 몸놀림에 담긴 뜻을 작게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걸음이 빠른 사람과는 / 가까워질 수 없다 … 저기 거기 / 하는데 나를 앞질러간 사람의 얼굴은 / 알 수 없다 … (《마음과 엄마는 초록이었다》, 난다, 68쪽)
빠른 걸음은 일종의 ‘분투’였다. 비장애인 지인들과의 사귐 가운데, 형은 그들의 보폭에 자신을 맞추었다.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던 내 말은 닿지 않았었다. 그제야, 나는 지팡이를 짚기 전까지 자주 넘어졌다던 형의 말 이면에 담겼을 숱한 삶의 장면들을 짐작하게 되었다. 현재 형의 병 진행 속도와 증상은 나보다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나이가 많은 만큼 더 진행된 탓도 있다. 하지만 형이 한창 지팡이를 사용하던 나이에 놓인 지금의 나는 보장구 없이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 무리하는 일은 최대한 안 만드는 방향으로 습관을 붙였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나는 ‘나중에 제대로 못 걸을 때가 올지 모르니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더 움직이려 하는’ 형의 생활 태도가 병 진행을 더욱 촉진했다고 본다. 나에게 유전상담을 해주었던 의사는 형의 예후가 조금 더 안 좋은 까닭을 단지 유전에 따른 차이로 보았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머니는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으로 가는 길, 승용차로 역까지 태워주시던 어머니에게 형이 고등학교 수련회에서 몸을 혹사했던 에피소드를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망설임 끝에 마음 깊이 묻어둔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셨다. 스냅숏사진처럼 간직된 장면은 28년 전 것이었다. 형은 초등학교 1학년, 나는 그곳 병설유치원을 다니던 여섯 살짜리였다. 내가 건물 안에서 열심히 율동하던 때에 바깥 운동장은 북적거렸다. 운동회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학년 릴레이 계주 시간. 형이 순서에 들어있었다. 이미 소식을 들었던 어머니는 교사에게 차마 빼달라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당장 몸이 걱정돼서 이것도 저것도 안 하도록 조치하면, ‘포기부터 하는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운동회 날 형과 내가 있는 장소를 오가다가 학부모들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형이 운동장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잘 달리지 못해 우스꽝스러웠든지, 조그마한 아이의 서툰 뜀박질이 귀여웠든지. 웃음소리의 진의는 모르겠다.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웃음소리 가운데서 어머니는 가슴이 꽉 막혀왔고, 달리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기억이 사무쳐있지만, 부끄럽고 힘들어도 잔꾀를 부리지 않고 꿋꿋이 달리던 형의 모습이 기특했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어머니는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항시 등을 돌린 채 무언가 하고 계셨다. 집에선 그 앞이 싱크대일 때가 많았으나, 늘 온갖 집안일은 물론 보험 설계, 화장품 판매, 대리운전, 경락 마사지 등 시기마다 직장 생활이나 자영업자 일을 끊임없이 해나갔다. 아버지가 컴퓨터 가게를 하실 때는 본업에 더하여 물품 배달까지 맡았다. 형과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투잡, 쓰리잡까지 뛰셨다. 와중에도 건강 관련 정보를 수소문하여 보조 식품 따위가 곧잘 식탁 위에 준비되었고, 재활과 관련한 소소한 기구들 또한 들여오곤 했다. 나이 들어 경락 마사지를 배우신 까닭도, 돈벌이도 돈벌이지만 병원 방문의 수고를 들여야 하는 아들들 물리치료를 대신할 만한 방책이기도 했던 데 있다. 어머니는 명절, 제사, 추도 예배를 비롯하여 시가 친척들 모이는 자리에서 먼저 소매를 걷어붙였다. 요리나 상차림, 설거지, 소일거리 등을 눈치껏 파악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의좋게 지내던 친가 쪽 식구들이 말려도 붙잡은 일을 한사코 놓지 않았다. 가족 내 혹은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어머니 태도가 우리 형제의 장애와 관련 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헌신적이고 지식 집약적인 어머니 노릇은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아동의 어머니에게 더 강하게 요청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목격자들》, 에디토리얼, 215쪽)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은 “가족 구성원 누군가에게 장애가 있을 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의무감을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역동”(140쪽)에 주목한다. 관계자들이 의도했든지 안 했든지, 우리 가족 내에서 혹은 연결된 관계들 가운데 이러한 역동이 은근한 형태로 존재해왔음은 분명하다.
이 책은 다양한 장르로 변주돼온 한국 전통 설화 〈심청전〉 분석을 통해 ‘대리 치유’(cure by proxy, 대리인을 통한 치유) 개념을 설명해낸다. 딸 심청은 맹인 아버지 시력을 치유하고자 바다에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효심을 증명하고, 보상으로 ‘왕후’ 자리에 오른다. 그 뒤 수소문하여 재회한 심청의 아버지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는데, 여기서 심청의 희생을 통한 가족의 지위 상승과 비장애, 신체적 치유는 연결돼있다.
비장애인의 ‘정상적인 몸’만을 디폴트값으로 할당하는 세상에서는 ‘장애화된 몸’을 가진 존재가 치유되고 싶은 열망, “정상적인 몸을 향한 바람”을 끊임없이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병적인 상태’로 취급된다. 설령 치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하나의 신체성으로 묶인 “장애화된 가족”(143쪽)은 생존과 명예를 이어가기 위해, 그러니까 ‘정상성’을 기준으로 세워지는 사다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에 도달하고자 힘써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이와 관련된 사례일지 모르겠으나, 어머니가 ‘너희가 몸이 약하니까 다른 애들 이기려면 머리를 무기로 삼고 공부하는 일밖에 답이 없다’라는 식으로 다그치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때마다 기회가 생기면 형과 나를 치유 집회 같은 곳에 데려가거나, 대체 의학으로 분류할 법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죄-장애’ ‘믿음-치유’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외가 쪽에 갔을 때는 어쩌다 한 번씩 어색한 기류를 목격했다. 큰외삼촌은 외아들만 낳아 병이 유전되지 않았고, 이모는 딸만 둘을 낳아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다. 작은외삼촌도 슬하에 5남매를 두었지만 모두 증상은 없다. 공교롭게도 어머니만 근이영양증을 가진 아들 둘을 낳았다. 누구도 그것이 어머니 탓이 아님을 알았지만, 이환되지 않은 이들을 자녀로 낳은 다른 가족들과 우리 가족을 향하는 시선 사이에는 떨떠름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었다. “장애아를 낳으면 안 된다는 우생학적 명령 … 을 따르지 못했을 때, 어머니는 자녀의 장애 때문에 종종 비난받는다.”(144쪽)
사실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나보다 어린 나이, 막 30대에 접어드는 중이었을 어머니가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두 아이 진단서를 확인하고 마음 졸이며 보냈을 두려움과 불안의 밤들에 대해서.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밀알서원)는 장애를 지닌 아이를 낳거나 본인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다양한 반응이 가족 내에 나타난다고 언급하면서 이렇게 밝힌다.
처음 반응은 보통 비난할 대상을 찾으면서 충격과 부인 그리고 부적절하고 비생산적인 죄책감이다. 다른 일반적인 반응은 우울과 위축, 상황에 맞지 않는 분노 그리고 하나님과의 흥정(“만일 당신이 장애를 제거해 주신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을 포함한다. (165쪽)
안타깝게도 ‘죄-질병/장애’로 이어지는 잘못된 인과의 사슬은 여전히 흔하게 발견되는 가정이다. 특정한 죄 때문에 그 사람 혹은 가족에게 질병/장애가 생겼다는 관점이다. 성경에 이 같은 뉘앙스를 품은 사례가 다수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유한한 인간의 눈으로 이를 공식화할 수는 없다. 질병과 장애가 발생한 이유를 특정한 원인에 귀착해 환원주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만일 개인적인 죄가 장애를 가져왔다면, 모든 사람들은 장애인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187쪽)
‘예수의 장애 해방 선언’ 요한복음 9장은 죄-장애 이데올로기를 끊어내는 대표적인 내용이다.2) 날 때부터 눈먼 시각장애인을 보고 제자들이 묻는다. 저 사람이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부모의 죄 때문인지, 본인의 죄 때문인지. 예수께서 답하신다. “이 사람이 지은 죄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3, 새번역) 그 후 예수께서 진흙을 그의 눈에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명령하시고, 그대로 해서 ‘눈이 밝아진’ 시각장애인과 바리새파 사람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장면이 쭉 이어진다. 이 9장을 복음서의 다른 치유 기사들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특별한 점이 발견된다. 우선, 죄-질병/장애 이데올로기 비판과 더불어서 ‘믿음-치유’ 이데올로기까지 간접적으로 배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대열은 이 둘을 묶어서 “장애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명명한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의 경우, 치유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적인 부분은 ‘믿음’에 대한 강조(막 10:52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현대인의성경)이다.3) 4장 이후 예수의 치유는 계속해서 믿음과 병치 관계인 것처럼 그려진다. 자칫 믿음이 건강/치유와 절대적인 관계 쌍으로 인식되면 장애인들은 교회 내에서조차 배제될 수밖에 없다. 질병/장애가 장애인들의 ‘믿음 없음’ 탓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홍덕은 마가복음 1-3장을 마가복음 전체의 요약으로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출구 전략을 세우기도 하는데, 요한복음 9장에서의 치유는 어떤 전제 없이 ‘무조건적’으로 일어났다. 시각장애인이 예수께 자신을 고쳐달라고 요구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다. 시각장애인의 ‘믿음’은 표면상 드러나있지 않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지중해의 의료-문화에서는 ‘아픔’(illness)이 “세균 감염에 의해 유발된 질병”으로 이해되는 생의학적 전망(biomedical perspective)과 달리, “개인의 문제를 뛰어 넘어 사회적(가족과 마을의) 문제로, 몸의 병을 뛰어 넘어 존재와 신분 전체에 찾아온 혼돈”으로 이해되었다.4) 지금은 이 같은 이해가 분절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더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을 테지만, 저 이해가 예수의 치유를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치유라고 보는 강력한 근거이기도 하다. 한데 요한복음 9장에서 치유된 시각장애인은 사회로 오롯이 복귀하지 못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와 논쟁하던 중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34, 새번역) 되물으며 내쫓아버리고 만다. 논쟁 과정에 소환된 부모조차도 회당에서 내쫓길까 두려워하여(22) 그의 ‘곁’에 서지 않고 얼버무린다. 어쩌면 이전처럼 ‘구걸’(8)하는 길이 오히려 안온한 삶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논쟁에 나서면서, 예수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의 확장(11: 예수라는 사람 → 17: 예언자 → 33: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 37: 인자)을 바탕으로 자기 앞에 펼쳐진 새로운 가능성 위에 주체적으로 삶을 던진다.
1)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둔 비장애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비장애형제’는 대체로 어렸을 적부터 장애인 형제자매에 비해 관심과 돌봄을 덜 받을 가능성이 크고, 본인 또한 형제자매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쉬워서 그에 따른 심리적 문제를 겪는다. 뇌병변장애인을 언니로 둔 케이트 스트롬은 비장애형제들과의 대화 및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쓴 《나는 여전히, 오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 ‘혼란과 고립’ ‘두려움과 불안’ ‘또래들과 다른 삶’ ‘모진 말과 불편한 시선’ 등을 비장애형제의 공통된 특징으로 꼽는다. 한국의 비장애형제들이 쓴 책으로, ‘정신적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둔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의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이상 한울림스페셜)가 있다.
2) 요한복음 9장에 대한 해석 중 일부는 최대열의 논문 〈예수의 장애 해방 선언: 요한복음 9장을 토대로 한 장애(인) 신학의 시도〉(《한국조직신학 논총 No. 17》, 2006)을 참고했다. 김홍덕의 《장애신학2》(대장간, 271쪽)를 보면, 요한복음 9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장애 이미지로 본문을 해석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지적한다. 시각장애를 ‘죄와 무지의 메타포’로 사용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실제 삶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은유를 사용하면서 장애인의 현실을 간과하는 셈이다. 장애인을 ‘도덕적 교훈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가능성도 있다.
3) 마가복음 치유 이야기에 관한 내용은 《장애신학2》 8장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참조한 것이다.
4) 박윤만, 〈예수, 총체적 종말론적 구원자: 마가복음의 예수의 치유와 축귀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성경과 신학 Vol. 77》(2016), 264-266쪽. 김신권, 〈기독교 성서의 치유 전통과 생의학: 의료인류학적 관점에서〉, 《종교연구 Vol. 81 No. 1》(2021) 참조.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