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호 사람과 상황]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는 희망이고, 역할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이 있습니다. 확신할 수 없었고, 지금도 확신할 수 없어요. 일본인으로서 이 화해 프로젝트에 동참할 자격이 되는지…. 제가 준비가 되었는지…. 일본은 동북아시아와 남아시아에 너무 많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6월 8일, 포럼 넷째 날 소감을 나누는 시간.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그의 이름은 치히로. 일본에서 온 청년의 눈물에 주위가 숙연해졌다.
제10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천 포럼’1)(이하 ‘화해 포럼’)이 파주 예수마음배움터에서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열렸다. 동북아시아의 국가 간 과거사 문제와 현 갈등 상황 가운데 자국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의 아픔을 듣고 각자의 상황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돕기 위한 취지로 진행되었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다양한 신앙 배경을 지닌 동북아시아 및 북미 국적 참여자들이 함께했다. 예배와 여러 공통·선택 강의, 주제별 테이블 토크 등으로 구성됐는데, 한반도의 아픔이 담긴 장소들을 순례하는 날도 있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가 처한 여러 정황 속에서 다양한 참여자들 목소리를 조각보처럼 이어보았다.
용서를 구한다면 진심이 담겨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셋째 날 오후, 순례길에 오른 참여자들은 ‘파주 적군 묘지’를 방문했다. 1996년 조성된 이곳 제1묘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북한군(718구)이, 제2묘역에는 1·21 사태를 도발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등의 유해가 묻혀있다.2) 이름과 계급이 쓰인 비석도 소수 있지만, 유해 발견 장소와 날짜, 소속만 적힌 ‘무명인’이 훨씬 많다.
2014년부터 위령의 날에 이곳에서 추모 미사를 드리는 천주교 의정부교구 강주석 신부는 이곳이 ‘남남(南南) 갈등’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추모하기 위해 찾는 시민도 있지만 ‘왜 적군을 위해 기도를 하냐, 무장공비도 묻혔는데 종북 아니냐’고 하면서 천막을 치고 추모를 방해하는 집회도 열려요. 한국전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곳이죠.”
이어서 방문한 곳은 실향민3)들이 묻힌 ‘동화경모공원’. 파주 적군 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비석은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북쪽을 향해있다.
야마사키 치히로(Chihiro Yamasaki, 24)는 이날 적군 묘지에서 무리와 떨어져, 한쪽 무릎을 꿇고 ‘무명인’의 비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일본인 참가자였다. 국제기독교대학교(ICU)4) 졸업생(국제법 전공)인 그는 지난겨울 ICU를 방문한 NARI 자문위원회팀에 의해 화해 포럼에 초대를 받았지만, 처음엔 이를 거절했다.
“일본인으로서 화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건데, 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전후 세대로서 전쟁 세대가 저지른 참상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전쟁에 대한 저 자신의 책임을 찾는 건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워요…. 조부모님은 2차 세계대전 때 무기 만드는 공장에 동원되어 일했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셨어요.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역사 해석과 정책, 외교에 있어 보수적 태도를 갖고 있지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제가 투표한 상당수의 정치인은 당선되지 못했죠. 화해는 가해자가 잘못을 인식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서 출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진심이 담기고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용서를 구하는 건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꼈어요.”
자민당이 아시아 지역의 일제강점기 역사를 해석하거나 수정하려 하는 데 동의할 수 없었던 그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쓴 관련 문헌을 읽어나갔고, 방한 기회가 생겨 또래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일제강점기 때 가해진 억압을 보았다. 그는 법적 의미의 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끝났지만,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전쟁과 전쟁 이전에 시작된 고통이 아직 봉합되거나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피해자들을 위한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이에 빠진 건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해요. 식민 지배가 확대되던 시기, 일본은 세계화 사회에서 문명국가로 인정받고자 서양처럼 되려 했고 이웃 국가를 식민지화하기로 결정했죠. 일본 정부가 점령지에서 벌인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역사 인식이 수반돼야, 마음 깊이 사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저를 포함한 전후 세대가 가질 책임이고,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일본 정부에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라 믿어요.”
영국 유학을 앞둔 그는 국제사회와 국제법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면에 숨겨진 식민주의와 서구 헤게모니의 역사를 검토하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일본어를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가자 츠부야라 메구미(Megumi Tsuburaya, 64)는 1980년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자매결연 교회인 서울제일교회 초청을 받아 민주화 운동가이자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였던 박형규 목사와 교인들을 만났다. “한 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셨어요. 제게 아주 친절하셨죠, 일본어를 강제로 배워야 했기 때문에 제 말을 알아들으셨지만, 막상 일본어로 말하려 하면 숨이 막혀 말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요…. 한국에서만큼은 일본어를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만남을 계기로 그는 한국에 와서 잠시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고, 은퇴 후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전무이사로 일하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도쿄 고려박물관은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NPO 법인으로, 왜곡된 한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일본인들의 후원과 자원봉사로 운영되는데 회원의 80% 이상이 일본인이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군 ‘위안부’, 전후 재일 한인 등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역사를 알리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메구미는 제주 출신이 많은 재일 한인 사회가 오키나와 이슈를 자신들의 역사와 겹쳐본다고 알려주기도 했다.5) “최근 오키나와(이시가키섬6))에 일본 육상자위대 미사일 기지가 들어섰고, 주민들은 두려워하고 있어요. 오키나와는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독립된 나라였죠. (태평양전쟁 말미 미국에 점령된)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주일 미군 전용 시설 면적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돼있어요. 일본에 있는 제 한국어 선생님은 오키나와가 제주 역사와 비슷하다고 하셨는데, 당신도 알고 있나요?”
재일 한인 친구를 괴롭혔던 내가 재일 한인 3세대
“일본에 재일 교포들이 다니는 조선학교가 있어요. 일본 정부가 다른 학교들은 지원하는데 조선학교만 그런 지원을 안 하잖아요. 완전히 북한이라 생각해서. 그런데 거기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있어요.”
‘20% 정도 한국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모리시타 시게루(Shigeru Morishita, 47)는 자신이 재일 교포 배경을 가졌다는 사실을 20대까지 몰랐다. 제주 애월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형제들과 일본으로 건너왔고 일본인과 결혼해 어머니를 낳았다. 해방 후에도 재일 한인 차별이 심했던 일본 사회에서, ‘조선 국적’ 어머니는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 국적을 택했다. “어머니는 막내였던 제게는 이 사실을 늦게 알려줬어요. 큰 충격이었죠. 중고등학교 때 반에 재일 교포가 두어 명 있었는데, 제가 차별했던 거죠. 조선인 너무 시끄럽다, 기무치 냄새 난다. 제가 차별했는데 어떻게 알았겠어요. 저에게 한국인 피가 흐른다는 걸. 너무 후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 제가 저지른 죄,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다가 마흔이 넘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동경 신학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시게루 씨는 목사로서 한일 관계에 대한 실제적 연구가 하고 싶어 한국 유학을 왔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한국의 징병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 군대 문화, 이게 한국 사회에서 비폭력주의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어요. 전후 세대 일본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70-80% 정도가 좌·우파 상관없이 비폭력주의를 지지해요. 하지만 한국교회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고, ‘비폭력으로 통일을 달성하기 어렵다’ ‘북한과 전쟁해야 한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있어요. 그리스도인은 이상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해야 하지 않나요? 군대는 한국 성차별과 남녀 분단도 심화하는 중요한 원인 아닌가요?”
영향력이 아닌 화해의 길이 예수가 전한 복음
미국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7) 전무이사 앤 그래버 허쉬버거(Ann Graber Hershberger)와, 목사이자 버지니아 메노나이트 컨퍼런스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짐 허쉬버거(Jim Hershberger) 부부(69)는 포럼 일주일 전부터 한국에 와서 교동도, ‘펀치볼’ 등 분단의 아픔이 새겨진 다른 공간들을 찾았다. 베트남참전기념관도 방문했다고 앤은 말했다. “베트남전쟁 역시 미국 진영과 소련 진영의 대리전이었다는 것8), 또 교회가 신앙보다 이데올로기에 더 연결돼있을 때 전쟁의 장기적 영향이 어떻게 교회를 분열시키는지 알게 되었어요.”
냉전 시기 일어난 니카라과 혁명(1961-1990)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평가되는데, 허쉬버거 부부는 이때 현지인들을 도왔다. 니카라과 혁명은 반독재정권 투쟁(1961-1979) 이후 혁명정부와 반공주의 반군 사이의 내전(1979-1990)으로 이어졌고, 직후엔 역대 최악의 허리케인이 이곳을 덮쳤다. 혁명 당시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약 9년간 니카라과에 머무른 두 사람은 각각 지역사회 진료소에서 간호 업무, 공중보건과 문맹 퇴치 프로그램, 성경 공부 등을 맡아서 진행했다. 허리케인 이후에는 구호 및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기간 두 사람은 메노나이트뿐 아니라 개신교 에큐메니컬 기관을 비롯한 비영리 단체, 비정부 기관과도 함께 일했다.
니카라과 혁명 기간에 정부는 두 번 교체되었는데, 이에 따라 달라지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경험했다고 앤은 말했다. “더 나은 의료와 교육, 경제적 기회와 더 많은 자유를 위해 일하겠다고 많은 주류 교회들이 들어왔지만, 사회주의 정부와 공산주의자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떠났어요. 복음주의권에 대한 정부의 압박도 있었지만요. 반대로 다시 보수적인 정부가 들어서자, 에큐메니컬 단체 동료들은 사회주의 인민 운동은 끝났고, 보수화될 거라며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으리라 생각했죠. 그 모습을 보며 짐과 저는 혼란스러웠어요. 도움 되는 정책들이 생겨나면 반가워했지만, 정부가 바뀌어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짐은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정부와 손을 잡기란 쉬운 일인데,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교회가 특정 정당이나 사회운동의 도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일부는 매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일부는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치권력을 가져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해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두 가지 색깔로 분열된 대만
“대만과 중국은 완전히 다르고, 내 정체성은 중국이 아니라 대만”이라고 말한 차이 밍웨이(Ming-Wei Tsai, 53)는 대만기독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aiwan, PCT) 목사이자 타이난 신학대학교 신약학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는 대만이 분열된 세상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대만을 중국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보지만, 지금 상황을 빠른 시일 내에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는 인식이 공통된 생각이에요. 그러나 대만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라요. 친중 성향 중국국민당과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민주진보당으로 갈라져있는데9), 국민들도,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하나님 나라 시민들인 기독교인들도 분열돼있죠. 파란색(중국국민당)과 초록색(민주진보당)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크리스천은 대화와 화해의 자리에 있어야 해요.”
대만의 복음화율은 전체 인구의 7% 정도인데, 그중 1965년 세워진 PCT는 가장 역사가 깊고 큰 교단으로 사회적 억압과 불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대만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중국국민당 정부의 세계 최장기 계엄령(1949-1987)을 경험한 바 있는데, 1970년대에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UN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 PCT는 민주주의와 대만 국민의 자결권, 정부의 사회 개혁을 요구하며 중요한 시국 선언들을 한 바 있다. “이 때문에 60년간 정권을 잡아온 중국국민당 정부는 우리 교단을 많이 탄압해왔고, 그 모습을 보면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어 하지 않게 됐죠. 반대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게 우리 교단의 특징이 됐고요.”
기독 청년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해온 PCT는 또한 해방신학자인 송천성(C. S. Song) 등이 주도한 신학 전통이 있다. “우리 교단은 고국 신학(Homeland Theology)을 만들었는데, 대만을 넘어 국가와 공동체를 잃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중신학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다다른 것처럼, 대만 사람들은 대만이 우리의 ‘가나안’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이 우리 집이고, 우리는 여행객이 아니라고요.”
2019년에도,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구하고 계셔
2019년 6월 9일 백만 명이 넘는 홍콩 시민들은 ‘범죄인 인도법’ 제정을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홍콩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6월 12일, 입법회가 범죄인 송환 법안을 심의할 때 수만의 홍콩 시민들이 입법회 주변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과 충돌이 빚어지자 경찰들은 처음으로 최루가스를 사용했다.
홍콩 목사인 제시카(가명)는 이날의 기억을 전했다. “그 전날 밤, 제 친구를 포함한 열두 명의 목사, 신부들이 현장에 있었어요. 경찰들이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죠. 목사와 신부들은 경찰과 시민 사이에 서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평화로운 시위임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도 다치거나 죽거나 잡혀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찬송을 불렀어요. 3천 명의 시민들도 따라 불렀죠. 그 노래가 〈Sing Hallelujah to the Lord〉였어요. 물러간 경찰들이 다시 돌아오니까 계속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다음 날 아침 저는 현장에 도착했는데, 밤을 샌 친구와 함께 그곳에 열린 기도회에 참석했죠.”
이후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홍콩 인구의 200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로 번졌으나, 2020년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의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한 법이지만 내용이 모호해 시위는 물론 온라인에서조차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없다. 제시카는 인터뷰에 본명이 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일(7월 1일)에 일어난 시위의 경우엔 주최자가 있었지만 2019년 당시엔 매일 여기저기서 주최자 없는 집회가 열렸어요. 불법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1-2년간 감옥에 수감됐죠. 주최자가 없는데 어떻게 시위 등록을 하나요? 모든 시위는 ‘불법 시위’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줄지어있는 불법 시위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을 지금도 방청하러 다닌다.
민주화 운동 이후 희망이 사라진 상황 가운데 트라우마와 PTSD를 겪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자녀들과 부모, 청년과 어른 세대 간 갈등도 깊어졌다. 젊은 사람들은 교회 바깥 세상을 고민하면서 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변했다. 제시카는 현재 교회와 교회 바깥, 크리스천 선교 NGO에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10대들과 35세 이하 청년들을 만나고 있는데, 기독교인 여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홍콩이 원래의 홍콩으로 돌아가길 정말 바라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지속되거나 매우 가까운 미래에 홍콩은 중국이 될 거고, 이를 받아들여야겠죠. 홍콩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지만, 고통과 깨어짐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한국의 ‘광주’, 중국, 일본을 비롯해 심지어 미국에도 있으며, 이러한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니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며 홍콩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게 제 믿음이죠. 2019년에도 지금도 저는 체포되지 않았어요. 물론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무죄여도 홍콩에선 체포될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저를 매 순간 구하고, 함께하고 계세요. 저는 그분에게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는지 묻고요.”
지난 6월 4일, 홍콩에서 천안문 민주화시위 희생자를 기리며 단식을 하던 시민들은 경찰에 체포됐다.
나는 충분히 홍콩인인가?
홍콩에서 온 올리비아(가명)는 2019년 당시 독일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밤에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친구들에게 괜찮은지 메시지를 보내고, 낮에는 안부를 묻는 독일인들에게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는 ‘이중 삶’을 살았다. 홍콩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공기로 느꼈다. 그처럼 해외에서 체류했던 몇몇 홍콩 참여자들은 민주화 운동을 함께하지 못한 데 대해 ‘나는 충분히 홍콩인인가?’ 자문했다.
“내가 홍콩에 있었어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면 죄책감을 덜 수 있지만, 친구들 중 몇몇은 2019년 이후로 교회를 비판하며 떠났고, 이후로 관계가 깊게 이어지지 않고 있어요. 그건 좀 슬프죠…. 독일에 갈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가 함께하고 싶었다는 걸 아무도 몰라요….” 이날 새벽, 올리비아는 눈물을 흘렸다.
대학에서 중국 역사를 전공했던 그는 포럼을 돌아보며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라는 전공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많은 사진과 텍스트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떤 무기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공부하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왜 그렇게 신나하는지 전 잘 이해가 안 됐고, 그래서 정치나 전쟁 역사를 피해 여성, 민중, 미디어, 경제 역사로 도망치곤 했죠. 하지만 이번 순례길에 두 묘지를 방문했을 때, ‘도망칠 수 없다’고 느꼈어요. 너무 가깝게 느껴졌고, 죽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땅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보다 오랜 세월을 사는 땅과 강은 목격했을 거라고요…. 중국 역사도 슬픔으로 가득차 있지만, 한국도 ‘광주’처럼 슬프고 고통받는 역사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 오기 전까진 케이드라마만 알았는데, 그건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니죠.”
서로의 평화를 기도하는 시간
마지막 예배가 열린 날, 참여자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성소수자 이슈를 둘러싼 대만 교계의 갈등 상황, 팬데믹 기간 사회적 혼란이 깊었던 중국 등 자신들 나라가 겪는 사회적 혼란들에 대해서도 전했다.
한 미국인 참여자의 고백도 있었다. “치히로의 고백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들이 처한 문제에 있어 미국의 역할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했죠…. 한국에선 미국이 좋은 일도 했지만, 끔찍한 일도 벌였고… 베트남, 그리고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과 우리의 관계 등… 그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과, 아시안 혐오도 팬데믹 이후 심해져왔죠. 또, 왜 미국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어서 소통의 창구를 만들지 않는지 한 번도 질문을 던진 적 없었는데, 여기 와서 깊게 생각해 보았어요.”
포럼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이날은 모국어 참여자의 리드를 따라 낯선 억양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다양한 모국어로 성경을 낭독하기도 했다. 미묘한 긴장 속에 서로 어색했던 중국과 홍콩, 대만 참여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참여자들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손바닥 위에 십자가를 그린 후 손을 포갰고, 서로에게 평화를 빌었다. ‘반드시’(definitely) 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수년간 포럼에 참여해온 한 일본인 참여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2017년 제주에서 열린 첫 포럼이 아직도 기억나요. 젊은 복음주의자로서 에큐메니컬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함께 예배하고, 함께 탄식하고, 울고, 과거사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며 함께 기도할 때, 제 마음이 크게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니었고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왔어요. 제가 감히 같은 고통을 이해하거나 느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같은 몸의 일부임을 느꼈어요. 그 집단적 애도의 순간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한다는 강력한 증언으로 다가왔습니다.”
1) 듀크 대학교 신학대학원 화해 센터와 MCC 중앙위원회, 동북아시아 여러 기관 및 개인들의 협력으로 주최된 이 포럼은 2014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가평과 제주도, 일본 나가사키, 홍콩 등에서 매해 열렸다.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미국, 캐나다 등지의 대학 교직원, 파러처치 단체·NGO·시민사회 대표 및 간사, 목회자, 교단 및 평신도 리더, 학생들이 참여했다.
2) 제2묘역에 안장되었던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362구)의 유해는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중국 정부로 송환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인명 피해(사망·부상·실종)는 한국군 60만여 명, 북한군 80만여 명(미군 자료), 유엔군 15만여 명, 중공군 97만여 명(한국 측 추정)의 인명 피해를 낳았다.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으며, 민간인 학살도 대량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3) 한국전쟁 이후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생존자의 평균연령은 83.2세다. (2022년, 통일부)
4)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참담한 결과를 반성하며 미래 세대를 향해 책임을 느껴온 일본의 기독교 교육자 그룹과 북미 해외 선교회의 및 미국 교육 선교부가 협력하여 1949년 세워진 초교파적 기독교 대학이다. ICU 대학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품 개발에 사용되었던 나카지마 항공기 미타카 연구소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졸업생들과 교류하면서 ICU에 관심을 갖게 된 치히로는, 입학 후 학생들과 성경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신앙을 갖게 되었다.
5) 일본 사회에서 소수집단인 재일 한인과 오니카와 사람들은 서로를 겹쳐보는 경향이 있다. 2016년 일본 본토에서 기동대가 동원돼 오키나와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을 벌인 주민들을 제압한 사건이 있었는데, 재일 한인들은 이를 보고 제주 4·3을 떠올리기도 했다. 더 알고 싶다면 다음 글을 참고하라. 임경화, 〈오키나와와 재일조선인 연대의 가능성 - 1972년 오키나와 복귀 이후〉(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7).
6) 대만에서 2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이 섬은 일본의 ‘대중국 전초기지’로 꼽힌다. 자위대를 둘러싼 여러 논란과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적 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하고 5년 내 방위비를 2배 이상 올리겠다는 계획을 최근 결정한 일본은 사실상 전쟁 가능 국가로 변모하고 있으며, 미국도 이를 지지한다. ([스트레이트] 평온한 일본 섬마을에 미사일기지, MBC, 2023.4.02.)
7) MCC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황폐화된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1920년 결성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44개국에서 전쟁, 기근, 재난에 놓인 이들을 돕고 다양한 국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한국전쟁 때부터 대구, 경산, 부산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재건과 구호 사업 등을 진행한 바 있다.
8)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비무장 민간인 집단 학살 피해를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올해 2월 한국 대법원은 국내 공식 기관 최초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국가 배상을 명령했으나, 아직까지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예섭, “법원도 인정 시작했는데”…진화위는 베트남 학살 ‘조사 거부’, 〈프레시안〉, 2023.7.19.)
9) 국민당 지지자들의 조상은 1949년 이후 장제스와 함께 본토로부터 건너온 이들이기에 지금도 중국 본토에 가족 관계가 남아있는 편이다. 이와 달리, 민주진보당 지지자들의 조상은 청나라 시기에 이주해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