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 ㈜두레셈 안재영 대표
제가 처음 안재영 ㈜두레셈 대표님을 만났을 땐 참 특이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기업가이시면서 독도 영토 문제를 위해 활동하시고, 또 북한학 연구자로서도 활동하시면서 최근에는 접경지역 탐방 등 평화 관련 활동의 폭을 더욱 넓혀 가셨으니까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가는 비범한 분들은 늘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저희 성서한국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안재영 대표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침 일찍 자유로를 달려 파주 ‘양일헌’으로 향했습니다.
-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파주에 있는 장파교회를 섬기고 있는 안재영이라고 합니다. 파주가 고향이고요. 접경 마을에서 참 오랜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주)두레샘을 운영하고 있고, ‘영토문화관 독도’의 관장으로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학 연구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 ‘복상’의 꽤 오랜 독자라고 들었습니다.
복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고, 약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굉장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교제한 지 10년 조금 넘는 것 같은데요. 그전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점에 집중했다면, 요즘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더 이야기하게 됩니다. 복상을 읽으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게 된 것 같아요.
- 파주가 고향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쭉 교회에 다니셨는지요?
10대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당시 교회에 실향민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새벽예배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먼저 와서 꼭 기도를 해주고 가셨어요. 그분 집이 가까웠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제가 귀가 밝아서 집사님이 오시면 일어나 문을 열어 드렸는데요. 처음엔 짜증이 났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분이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호기심 때문에 새벽예배에 따라가게 된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새벽에 교회에 가니까 또 새벽종 치는 맛이 좋더라고요.
- 신앙의 첫 시작이 새벽예배였다니 무척 신박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 신앙 여정은 전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요. 시골에서 그렇게 살다가 서울로 가서 10대 중반부터 계속 직장 생활을 했는데요. 첫 직장이 소개를 통해 일하게 된 생명의말씀사(광화문점)였습니다. 그곳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근처의 내수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 다음에는 한국성서유니온의 윤종하 총무님이 처음으로 교회를 시작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 당시 내수동교회에 계셨던 이성두 전도사님이 협력 목회로 광야교회를 함께 시작했거든요. 거기에 저도 같이하게 되면서 광야교회 초기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일성경〉을 만나게 됐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매일성경〉으로 성경을 묵상한 것이 제 신앙의 전부입니다.
- ㈜두레샘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기업인으로서의 도전과 성취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두레샘은 1995년에 시작되었는데요. 5년 정도 직장에 다니다가 시작했습니다. 기업에 대한 거창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라 당시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아 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었거든요.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했던 게 새벽 신문 배달이었는데, 충정로 빌딩 사이로 양복 입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을 몹시 부러워했으니까요. 아직도 기업을 운영하는 게 체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일을 할 때 있어서 사람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좀 싫어하는 문구가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입니다. 저는 창대해지는 꿈보다 그냥 가까운 사람한테 욕 안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한테 욕 안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 ‘영토문화관 독도’ 홈페이지에 있는 설립 동기 글에 “안재영 대표이사가 대학 3학년 때 가입한 ‘외대독도연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청년 시절부터 영토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는데요. 친구 중 한 명이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독도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이 친구 꼬임(?)에 넘어가서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뭔가를 시작하면 결국은 좀 깊이 빠지는 것 같아요.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1987년에는 15박 16일 독도 탐사를 가기도 했는데요. 대학생이 그렇게까지 독도 가는 일에 열심을 낸 것은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아요.(웃음)
대학 졸업하고 독도 문제를 사실 좀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저희 회사가 파주 헤이리에 입주하면서, 헤이리 규정인 ‘공간 60퍼센트는 공적인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해야 했거든요. 지금도 그 규정이 있긴 해요. 아무튼 저는 예술인은 아니니까 문화 공간은 적절하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영토문화관 독도’를 시작하게 된 거죠.
- 지금도 독도에 대한 강연이나 여러 활동을 이어가고 계시는데요. 독도 논쟁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어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도 운동은 항상 일본의 패러다임에 끌려다녀요.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강탈한 뒤로 1906년부터 ‘죽도’(竹島: 대나무 섬, 다케시마)라고 부르는데요. 사실 우리 역사 기록에서 독도는 512년에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거의 1천5백 년 동안 기록이 지속됐습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는 이 ‘우산도’를 독도가 아니라고 몹시 강조합니다. 우산도의 존재가 독도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데 매우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산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일본 측은 독도를 국제법적으로 ‘섬’(island)이 아니라, ‘암석’(rock)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루에 10명 이상이 마실 수 있는 식수 양 4백 리터 이상의 물이 나와야 ‘섬’으로 인정받게 되는데요. 독도에서는 현재 하루에 4백 리터 이상의 물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어요. 그런데도 독도를 ‘암석’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래야 독도로 인해 섬이 가지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한국이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토 문제에 있어 너무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러한 독도의 영토와 역사적 쟁점들을 인식하고 우리는 확실한 근거와 패러다임으로 독도 논쟁을 대해야 합니다.
- 대표님의 관심 분야는 북한학까지 이어지셨는데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2019년에 발표하신 석사논문 제목이 ‘우표로 본 북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 연구’입니다. 어떻게 북한에까지 관심을 확장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학생 때 사회과학 분야는 관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접경지역에 살면서 반공 이야기와 대북 선전방송만 줄곧 듣고 자랐지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어릴 때 저만큼 ‘삐라’를 많이 주웠던 사람은 없을걸요?(웃음) 그래서 저는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였어요.
독도 연구를 하면서, 북한이 독도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호기심이 생겨 여기저기 강연을 열심히 찾아다녔죠. 그렇지만 갈증 해소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던 중 박근혜 퇴진 집회 때문에 광화문으로 다닐 때였어요. 삼청동 쪽으로 가다 보니까 ‘북한대학원대학교’라는 팻말이 보이는 거예요. 역시 또 호기심으로 확 지원해서 다니기 시작했죠.
우표 연구도 우연히 시작했어요. 제가 하나누리 후원자이기도 한데, 어느 날 하나누리 대표인 방인성 목사님이 갑자기 우표 책자를 두 권을 주시는 거예요. 지금도 방인성 목사님은 그 책자를 왜 제게 주셨는지는 몰라요.(웃음) 아무튼 그렇게 우표에 관심이 생겼어요. 사실 우표야말로 당대 사회상과 정치적 의도의 핵심을 담은 중요한 이미지이거든요. 그렇게 우표를 통한 북한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고 이를 토대로 《우표로 보는 북한 현대사》(좋은땅, 2021)라는 단행본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박사과정은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에서 마쳤습니다. 박사논문 제목이 ‘북한우표의 국가적 상징성에 관한 연구’입니다.

- 지금 저희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양일헌’이라는 이름의 대표님 자택인데요. 집을 북향으로 짓고, 바로 임진강 너머 북한 땅이 보이는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매일 북한 땅을 바라보실 텐데요.
이렇게 매일 바라보니 북한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어두운 밤에 강 건너 북한 땅을 핸드폰 카메라 줌을 이용해 보니까 예전에는 없던 불빛이 몇 개 생겼더라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거든요. 즉 그동안 북한의 전력 사정이 아주 나빴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꽤 좋아졌다는 방증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북한의 경제 사정이 마냥 좋지 않고, 더 안 좋아질 거라고 막연하게 판단합니다. 지금 북한 입장에서는 가장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저곳 최전방 집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우리와 비교하면야 턱없이 낮은 수치이긴 하지만, 저는 실제 북한의 경제성장률이 지금 거의 20퍼센트에 달한다고 봅니다.
-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네요.
그게 바로 현장과 공간의 힘이죠. 이곳에 와서 직접 보시면 체감하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죠. 기존에 가지고 있던 확증 편향을 뚫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 대표님께서는 섬기는 교회(장파교회)에도 헌신적이시고, 또 복음주의 운동에 관심과 지원을 늘 이어오고 계십니다. 현재 대표님께서 한국교회에 대해 품고 계시는 마음과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과연 한국교회에 비전이 있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아예 무너져야 새로 세울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요.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너무 강하게 작동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제가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까지 새벽예배에 꼬박꼬박 나오시면서 기도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물론 많이 돌아가셨어요. 그분들이 계시는 한, 저는 그분들이 했던 지금까지의 헌신을 존중해 드리고 싶어요. 아직 교회에 남아있는 어린 친구들의 성장도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들과 어린 친구들을 향한 이 두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 앞으로 대표님의 활동과 사업에서 어떤 계획들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기독 실업인들이 꽤 많이 계시는데 이분들 중에서 의식은 있지만, 어떻게 참여하고 어떤 방법으로 도울지 몰라서 복음주의 운동에 못 오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거예요. 이 운동에 후원하고 싶고 동참하고 싶은 분들이 더 계실 텐데, 잘 알려지지 않고 확산이 안 되는 것 같아 아쉬워요. 오늘 아침에도, 의식이 있고 함께 운동을 공유할 수 있는 기독 실업인이 한 열 명만 있어도 복음주의 운동의 숨통이 좀 트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함께할 분들을 찾고 동참시킬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봐야죠.
그리고 지금 양일헌 옆에 평화교육원을 건립 중인데요. 8월 말까지 완공될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초청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공간으로 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DMZ action for peace’라는 단체도 함께 만들어서 비무장지대(DMZ)와 연결되는 다양한 활동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DMZ 탐방 투어도 계속해서 이어갈 예정이고요. 언제 이런 영업 활동을 그만둘 수 있을까 싶어요. 해야 할 일이 계속 늘어가네요.
기업가인 저에게는 무엇보다 회사를 잘 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1순위입니다. 회사가 계속 잘 유지되고 성장해야 이런 활동들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성이 생기니까요.
- 한국교회 성도들과 복상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젊은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기가 어떤 소질이 있다면 사업에 조금 일찍 뛰어들면 좋겠어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도전을 과감하게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아쉬움과 바람이 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말씀을 좋아하는데요. 가난함으로 인해 남의 것을 훔칠까 두렵고, 부자가 됨으로 인해 하나님 없이 잘 산다고 교만해질까 두렵다는 아굴의 기도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습니다. 그 말씀대로 끝까지 살아가고 싶어요.
인터뷰를 끝내고 안재영 대표님과 함께 접경지역 일부를 탐방했습니다. 탐방을 마친 후 식사까지 대접을 해주셨는데요. 노을까지 보고 가야 이야기가 제대로 마무리된다고 하셔서, 식사 후 뒷산에 올랐습니다. 임진강 너머 북한 땅 저편으로 지는 노을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만약 통일되었다면 언제든 맘껏 볼 수 있는 광경이었겠다 싶었습니다. 남북한의 평화 기류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일 수도 있겠죠. 그럴수록 더 평화에 대해 말하고, 접경지역도 걸어보고, 북한 땅에 걸쳐진 아름다운 노을을 눈에 담으며 인고의 시간을 함께 헤쳐가면 좋겠습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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