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호 커버스토리] (사)우리누리 평화운동 김영애 대표

김영애 대표가 미사를 드리는 천주교 교동공소. ⓒ복음과상황 김다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 강화도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는 북한과의 거리가 약 3킬로미터에 불과한 민간인 통제 구역이다. 이 섬은 ‘실향민의 섬’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3만 명에 이르는 황해도 연백군민들이 폭격을 피해 왔다. 분단 후에는 1만 명이 남아 실향민 집성촌을 형성했다.

10년간 교동도를 ‘평화의 섬’으로 알리기 위해 애써온 ‘(사)우리누리 평화운동’ 김영애 대표를 5월 7일 만나 가이드를 부탁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무기가 없고 군사적 충돌을 할 수 없는, 한강하구에 둘러싸인 섬. 온전한 한강하구를 돌려달라는 염원을 담아, 섬에서 평화의 배를 띄우고 인간 띠를 이어온 이야기를 들었다.

ⓒ복음과상황 김다혜
ⓒ복음과상황 김다혜

1. 실향민의 섬

김영애 대표를 만난 곳은 대룡시장. 전시에 피난민들이 연백평야에서 가져온 쌀을 파는 미전마당으로 시작했다. 평일이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가게 문이 닫혀있었다. ‘시계 장인’으로 불렸던 교동 출신 고(故) 황세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시계방, 연백 실향민 1세대 안순모 할머니가 1952년부터 운영해온 만물가게 등을 지나쳤다. 가게 곳곳 처마 아래 제비집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곳 실향민들은 제비들이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와 집을 짓는다고 여긴다.

- 부모님이 실향민이시라고요.

인천 상륙작전 이후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인민군에서 먼저 점령하다 보니, 연합군이 폭격을 많이 했어요. 목숨을 부지해야 하니까 연백군민들이 쌀 포대를 이고 이곳으로 건너온 거죠. 동동거리며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가, 휴전되고 분단선이 한강하구로 결정되면서 이남이었던 고향은 이북이 되어 갈 수 없게 됐어요. 이곳에서 한 1만 명이 강화도로, 또 1만 명 정도가 서울·인천 쪽으로 갔어요. 평택이나 군산 같은 농경지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죠. 우리 부모님은 강화로 갔기 때문에,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어요. 형제가 넷인데, 언니는 북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업혀서 피난 왔죠.

명절만 되면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북한을 향해 먼저 절을 시켰어요. 그 뒤에야 앉아서 절을 받으셨죠. 절 받으시다가 뒤돌아서 우시고, 떡만둣국을 드시다가도 우셨죠. 음식은 북한식으로 맛있게 준비했지만, 굉장히 우울했어요. 아버지는 늘 고향 얘기를 하셨고요. “연백군 연안읍 연성리 48번지가 우리 집이다.” 또 피난민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가난과 전염병, 이방인으로서의 어려움…. 이곳 실향민들은 연백평야 기술로 교동도의 갯벌을 농경지로 일궈낸 분들이에요. 아버지는 피난민대책위원회장 등 동네일을 도맡아 하시던 분이셨어요. 고향 사람들이랑 연백군민회에 가시기도 했죠.

제게도 트라우마와 피난민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았어요. 20대 후반에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고 고향에 돌아와 깨달은 거죠. 여기가 난민촌이었고 부모님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셨구나,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매일 고향 얘기를 하던 아버지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우리는 통일해야 하는구나 생각했고요. 통일을 앞당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 왜 하필 교동에서였나요?

다른 섬 아이들처럼 자라서 서울로 나가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는데요. 현실 정치에 몸담았다가 강화도로 돌아갔어요. 북한을 수십 차례 다니면서 교류 협력과 인도적 지원 등의 일을 했죠. 그러다 10년간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모든 것이 닫혔고,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 정의평화대학원에서 갈등전환학으로 석사 공부를 했어요. 여성 가톨릭 신자로서는 제가 처음이었죠. 배운 걸 어디에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교동이 떠올랐어요. 부모님이 피난 오셔서 가슴앓이한 곳이고, 친인척도 교동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실향민이 많았고요.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된 뒤로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이 섬에서 뭘 느끼고 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죠.

저는 이 섬을 평화의 섬으로 홍보하고 싶었어요. 여긴 정전협정에 따라 중립지대에 둘러싸여 무기를 사용할 수 없고 전투를 벌일 수도 없어요. 실향민의 섬이기도 하고요. 고향의 연백시장을 닮은 대룡시장엔 1세대 어르신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외지 상인이 들어와 실향민 콘텐츠를 마음대로 각색하는 경우도 있는데, 방문객들은 잘 모르실 때가 많아요. 더 넓게 보고, 북한과 가장 가깝다는 교동도에서 이웃으로 왕래하며 살았던 북한을 가깝게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대룡시장. ⓒ복음과상황 김다혜

2.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온 섬

마을버스를 타고 장소를 옮겨 망향대에 올랐다. 율두산(밤머리산)에 위치한 이곳은 실향민들이 1980년대에 조성되었다. 제사를 지내고 고향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망향대를 향하는 언덕에 오르니 정면으로 연백평야가 가까웠다. 북쪽에서 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날이 흐렸지만 맨눈으로도 북쪽에 철조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 아파트들이 눈에 띄었고, 농번기를 맞아 밭에서 일하는 주민들도 보였다. “저기가 초소인데 군인이 없어요. 우리 쪽에도 낮에는 군인이 없고 저녁때만 나와서 경계 근무해요. 저쪽(북한)도 우리 섬에도 공격용 무기가 없고요.” 망향대에는 이곳을 조성한 실향민들 이름이 적힌 비석이 있었다.

- 망향대는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도 잘 모를 것 같아요.

사람들이 고향의 조부모님들에게 제사 지내려고, 고향 바람 맞으려고 돈을 각출해서 이 산자락에 조그맣게 땅을 샀어요. 스토리가 있고 염원도 많이 품은 곳이죠. 망향대에서 700미터 정도 능선을 따라 나들잇길을 내면 정상에서 바로 연안읍이 내려다보일 거예요. 망향대에선 아스라하고 나무가 우거지면 잘 보이지 않죠. 이것도 실향민들이 몰래 만든 거예요. 비석에 한자로 실향민 이름들이 적혀있죠? 우리 작은아버지 이름과 외삼촌 이름도 있어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향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실향민들의 유언에 따라 율두산 아래 산자락에 줄무덤이 형성되었어요. 군청 사람들과 율두산을 3년간 조사했는데, 맞은편 백석포에서 교동의 율두포로 많은 사람이 피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우리 어머니도 그중 한 분이셨고요.

망향대에서 바라본 연백평야와 마을. (사진: 인터뷰이 제공)
망향대에서 바라본 연백평야와 마을. (사진: 인터뷰이 제공)

- 교동도 실향민 어르신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격강천리라더니》, 전 2권)으로 내셨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으세요?

나룻배에 동네 사람들이 매달려 가면서 물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아기가 울면 인민군이 총을 쏘니까 사람들이 애를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엄마가 아기를 찾겠다고 같이 빠져 죽거나, 저녁만 되면 베개 갖다놓고 아이라고 어르거나…. 그 비참함이란 말도 못하죠. 인터뷰할 때 다 쏟아져 나오는데, 어르신들이 평상시 못 했던 말들을 하시면서 막 우세요. 누가 도와준 적도 없고 이야기 들어준 사람도 없고, 평생 가슴에 담아놓고만 사신 거죠. 실향민들은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남들에게 오랫동안 하지 못하셨어요. 지금까지도 어떤 분은 고향 얘기만 꺼내면 울기만 하고 저를 의심하기도 하세요. 분단 트라우마죠. 전쟁 때는 쌀, 이불 등을 갖고 왕래하던 곳이 갑자기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졌어요. 그렇게 드나든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어요. 강 건너에 가족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빨갱이 가족이나 첩자로 몰렸고요.

- 1·4 후퇴 전후로 이곳에도 민간인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해군(병) 특공대와 북에서 내려온 치안대, 유격대가 저지른 일이었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조사 결과(2007년 발표), 183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어요. 지금은 그때 미처 조사하지 못한 희생자들을 조사하고 있고요. 한 가지 눈여겨볼 지점은 교동은 피해자 유족이 민간인 학살 문제를 가슴에 묻고, 유배 온 후손들, 실향민들과 서로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에요. 싸우거나 갈등할 겨를도 없었죠. 먹고사는 문제가 더 컸으니까요.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부모가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3세대인 아이들이 결혼하려 했다가 반대에 부딪히기도 해요.

가해자 측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명령을 받고 빨갱이를 퇴출한 공신으로 여기죠. 70여 년 전 사건을 성찰할 수 있어야 답이 달라질 텐데, 아무도 이를 건드려주지 않아요. 피해자는 왜 억울하다고 하는가, 왜 가해자는 총을 겨누고 내 가족을 죽였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대가 왜 내게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를 돌아봐야죠.

군인이었던 가해자는 피해자를 무조건 빨갱이로 여기도록 교육받았을 테고, 명령에 의해 죽였을 수 있죠.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국가는 오랫동안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고요. 이제는 진화위에서 강화와 교동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규명했지만, 마음의 트라우마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참고 살아온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분들을 치유해 드리는 일이 공정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있지요. 저는 평화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이미 이곳에 평화가 와있다는 사실이었어요. 교동을 지키고 일구며 살아오신 유배 후손들, 피난민들, 민간인 학살 유족과 같은 분단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증폭하거나 갈등을 더 만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웠겠지만, 참고 인내하고 살아주셔서 교동도가 평화로웠고 마침내 평화의 섬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부분에 대해 교동 주민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교동이 화해와 수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배경엔 교회의 역할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교동도는 1899년에 교회가 처음 세워졌고, 현재 12곳이 있어요. 문화시설도 없는 농어촌에서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과 삶의 지혜가 담긴 덕담을 들려주셨을 거예요. 황해도 피난민들에 의해 시작된 천주교 공소도 실향민들에게 위안의 피신처가 되었겠고요. 미국 선교사로 63년 전 한국에 오셨다가 은퇴 후 교동공소에서 19년 동안 봉사하신 분이 계셨어요. 방인이(로베르토) 신부님이에요. 이제 94세신데, 고향으로 가시기 위해 이번 달에 교동도를 떠나셨죠.

- 피해자 유족과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만나는 ‘교동도 이념갈등 전환 및 화해포럼’도 열고 계시죠?

지난해 10월에 열린 것이 가장 최근인데요. 교동을 방문하는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였습니다. 가해자 유족도 오시길 바랐는데요. 오지 않으셨죠. 피해자 유족, 민간인 학살 문제를 조사한 선생님들을 초대했습니다. 학살터를 함께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짧은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참여자들은, 피해자 유족과 조사에 참여한 선생님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 등으로 나뉘어 토론을 해요. 다양한 질문과 대답이 나오죠. 피해자 측 참여자는 가족을 죽인 원수를 어떻게 용서하느냐고 하다가, 토론 이후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고 느낄 수 있죠. 가해자 측도 피해자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요.

마지막엔 장미꽃으로 코사지를 해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때 가해자 측에 선 참가자에게 물어요. 피해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냐고. 가해자 측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면, 피해자 측이 “용서합니다, 화해합시다”라고 답합니다. 어설프지만 이렇게 체험하고 나면, 생각들이 정리가 되죠. 누군가에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고요. 피해자와 가해자 얘기를 듣고, 토론도 하고, 진심 어린 솔직한 표현을 심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죠. 강의만 들어서는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 저는 현장 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평화의 섬이 됐다고 끝내면 안 돼요. 이 평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죠. 인천시교육청에서 지난해 교동도에 인천난정평화교육원을 세웠어요. 국내 교육청 최초로 평화교육 전문 기관을 세운 셈이죠. 이를 위해 많은 분들과 함께 노력했어요. 아이들이 미래를 생각하고 꿈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요.

2018.7.27. 제5회 평화의 배 띄우기. (사진: 인터뷰이 제공)
2018.7.27. 제5회 평화의 배 띄우기. (사진: 인터뷰이 제공)

3. 중립평화의 섬

김 대표는 2005년부터 강화·김포·고양·파주·영등포·마포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7·27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평화의 배를 띄우는 운동은 이어지고 있다. 정전협정(1조 5항)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만우리부터 서쪽 강화군 말도까지 67킬로미터를 민간 선박의 쌍방 항행이 가능한 ‘한강하구 중립수역’으로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사가 선박 운항을 통제하면서 70년간 뱃길이 막혔다. 2018년 판문점 선언 후, 그해 말 남북은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한강하구 공동이용수역 수로조사를 약 한 달간 실시했다. 남북관계가 교착되면서 뱃길 복원은 더 진전되지 않았다.

- 이곳에서 평화의 배를 띄우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프로젝트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남북의 민간 선박이 서로 항행할 수 있다는 정전협정 조항에 주목해 시민단체들과 민간 선박을 빌려서 띄운 거예요. 300명 정도 신청해 주셨는데, 실향민분도 많았어요. 조강이라 불리던 한강하구는 물동량이 많아 조운 사업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교동도 주민들이 연백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뱃길이었죠. 6·25가 발발하면서 이곳이 피난의 경로가 사용됐어요. 뱃길이 복원되면, 실향민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또, 과거의 한강하구는 오랫동안 물건과 사람을 실어 나르고, 같이 어업도 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평화로운 곳이었기에, 단절된 것을 복원한다는 의미가 있죠. 교동도는 고려 시대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로 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의 기착지이기도 했어요. 단순히 연백과 교동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왕래를 트고 압록강을 건너 지구촌 인류와 만난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는 사업이 될 수도 있죠.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난 후, 지난 10년간은 배를 띄우지 못했어요. 2018년에 재개했다가, 코로나로 2년간 멈췄다가, 2022년에 다시 배를 띄웠어요. 중립지대 중간 지점까지라도 가보고 싶은 것이 모두의 염원이었는데, 저는 여태 최대 어로한계선 2.3킬로미터(교동대교)까지밖에 못 갔어요. 10·4 남북정상선언 때도 한강하구의 공동 이용을 합의해 교동이 주목받았는데요. 이렇게 남북 관계가 얼어붙고 물꼬가 닫히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복음과상황 김다혜  
ⓒ복음과상황 김다혜  

- 육지에선 고성부터 강화까지였던 ‘DMZ 평화인간띠잇기’를 교동으로도 연장하셨죠. 

판문점 선언 1주년을 기념해 2019년 4월 27일 ‘DMZ(民) + 평화손잡기’ 인간띠잇기 행사에 전국민이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300명을 모집하여, 교동대교 걷기를 통해 이젠 육지가 된 교동도까지 이었죠. 남해, 서울, 인천을 비롯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오셨어요. 교동대교 입구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풍물·노래·춤이 어우러졌죠. 실향민, 이산가족, 탈북어린이, 학교선생님, 목사님, 신부님이 와서 발언하고, 함께 교동대교를 걸었어요.

그 이후, 여름이 오면 7·27, 8·15 행사를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고성에서 교동도까지 DMZ 국제평화대행진으로 500킬로미터 걸어서 와요. 평소 걸어서 통행할 수 없는 교동대교 3.3킬로미터 구간을, 군부대 협조로 들어옵니다. 마지막 구간인 지석리 망향대까지 20킬로미터를 걸어 DMZ평화순례를 마치게 되죠. 교동도까지 걸어오느라 힘들었으니, 여기서는 작은 평화음악회로 치유와 휴식의 시간을 마련합니다. 교동도까지 걸은 사람들은 다시 광화문으로, 지금은 용산으로 가 행사에 참여해요.

-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는데요. 시민들의 노력이 이런 상황을 얼마큼 바꿀 수 있을까요?

지금은 남남갈등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바라고 이루기 위해서는 소원이 필요하잖아요. 실향민 어르신들은 영정 사진이라도 고향에 들고 가달라, 죽을 때 북쪽을 향해 묻어달라고 하세요. 죽을 때까지 고향 가겠다는 염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희망과 소망이 없으면 어떻게 꿈을 이룰 수가 있어요? 좋은 꿈이 있더라도 의지가 없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겠어요? 그 의지와 소망, 실향민들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염원이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에너지인 셈이죠. 언제까지나 제가 현장에서 일할 수는 없을 텐데, 이곳 교동에도 기억 공간인 실향민 역사문화관이 세워지길 바라요. 교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면, 또 다른 현장 지킴이가 나와서 이 일을 계속 이어가야죠.

진행 김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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