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호 사회선교 더하기]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해 주었던 교회가 지금은 그들을 교회 가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자선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그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다. 현대 미국 교회들은 재정적인 이유로 부유한 사람들을 겨냥하고 그들이 편안해하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적인 환대는 문제가 있는 곳에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위의 책, 51쪽)
위의 글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초대교회 모습과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초대교회의 핵심 정신은 환대였다. 성경에서의 환대는 가난한 사람을 향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2-13, 개역개정) 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은 타자를 향한 환대를 통해 해소 내지 극복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타자를 향한 환대의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청년 시절 같은 교회에 다녔던 자매님을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남식 형제, 지금 어디 살아요?” “천동에 살고 있어요.” 천동이라고 말하고는 이 지역이 어디쯤에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천동이요? 나 그곳 잘 알아요. 우리 교회에서 매년 연탄 나눔 하던 곳이거든요.” 그에게 천동은 겨울철에 연탄을 때야 하는 곳이고, 자신이 속한 교회는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곳이었다. 아마도 그가 속한 교회에서는 연탄을 때면서 겨울을 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교회의 다수는 중산층 지식인이다. 그들은 저소득층에게 연탄을 나눠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위무하는 자들이다.
《탈기독교시대 교회》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는 교회가 문화 전쟁만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사랑·온유·친절·베풂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인종을 비롯한 성(젠더)을 차별하는 데 있었다. 교회가 거룩한 삶은 곧 타자를 향한 차별·혐오·배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셨고, 당시에 부정한 자들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셨는데 말이다.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