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호 특집]

이번 호 특집 주제는 ‘멸종’입니다. 편집부는 이 주제를 우리 일상과 문화로 확장해서, 변화로 인해 사라지거나 대체된 다양한 대상과 현상까지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번 도전은 특별히 ‘구선우의 동물기’를 연재하는 구선우 필자도 함께했습니다. 도전에 참여한 여섯 명은 4월 29일 복음과상황 상황실에 모여 간단하게 자신이 찾은 내용을 공유하고 글로 정리했습니다.

차에녹 -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

언젠가부터 거리의 공중전화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내의 교차로, 버스 정류장 옆, 골목 어귀… 어디나 하나쯤은 있었던 전화박스들. 투명한 유리 벽 안으로 고개를 숙인 사람이 보이면, 우리는 그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반가운 표정, 울먹이는 목소리, 밝고 호탕한 웃음. 거기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었다. 그 시절, 공중전화는 거리 한복판에 서있는 작은 연결점이었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던 곳, 싸우고 집 나온 아이가 엄마에게 미안하다 전하던 곳, 군대 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던 곳. 사람들의 마음은 그 좁은 박스를 통해 서로에게 오갔다.

지금은 어떨까. 1999년 56만 대를 넘었던 공중전화는 2023년 기준 2만 4천 대에 불과하다. 인터넷과 디지털통신의 발달로 공중전화는 더 이상 필수 시설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공중전화의 역할이 휴대전화로 대체되면서 이용률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그 많던 전화 부스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중전화와 함께 우리의 ‘소통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은 터치 한 번으로 쉽게 전화를 걸 수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전화보다 문자메시지를 선호하고 안부를 묻기보다는 알림을 보낸다. 동전을 손에 쥔 채 줄을 서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일도 드물다. 목소리가 아닌 텍스트로 소통하고, 소식은 단체 채팅방으로 공유된다. 모두와 연락할 수 있지만,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

변한 것은 기계와 통신 수단만이 아니다. 어쩌면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무시하고 살아간다. 가끔 길을 걷다 보면 버려진 공중전화를 본다. 유리 벽은 지저분하고, 관리하지 않아 뿌옇게 먼지가 쌓여있다. 이제는 침묵만 남은 공간이 되었지만, 누군가의 눈물이, 설렘이, 기쁨이 머물렀던 곳이다.

사라진 공중전화는 다시 거리에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머지않아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것이다. 공중전화는 사라졌지만, 우리 마음을 건네는 일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정민호 - 교회에서 사라진 풍경

새벽송, 밤샘 철야 기도회, CCM 악보집, 찬양 가사를 써넣은 전지, 봉투에 담아 내던 성미(誠米), 세로쓰기로 된 성경책, 담력 훈련, 토요일 교문 앞 반갑게 맞아주시던 교회학교 전도사님, 달란트 시장, 문학의 밤….

지금은 교회에서 보기 힘든, 옛 풍경이 되어버린 것들이다. 가장 그리운 것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CCM 악보집이다. 죠이선교회에서 발간한 《많은물소리》. 초판이 1992년 8월인데 내가 기억하는 건 2009년 버전이다. 교회에서 자주 이 책을 펼쳐놓고 찬양했던 기억이 난다. 악보를 내려받고 편집하고 복사하는 기술이 흔해지면서 ‘복사된 콘티’로 대체되고, 스마트폰으로 악보를 검색해서 보는 일이 쉬워져 교회에서 사라진 것 같다.

이 악보집은 서점에서도 절판되었다. 찾아보니, 중고서점 딱 한 군데서 판매 중이었다. 망설임 없이 구매해왔다. 처음으로 서문도 읽어보니, 이 책이 나왔던 시기는 “2000년 초반에 표지에서 내용까지 그대로 베낀 해적판이 한때 유통되”거나 “표지만 달랑 바꾸고 내용을 그대로 베낀 교회용 비매품들이 나름 상당히 많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노래방에서도 리모컨으로 가수나 노래 제목을 검색하기보다 익숙한 곡목집 책자를 보는 게 편한 내게는 아무래도 이 악보집이 반갑다. 마감 기간이 끝나면 한 장씩 넘기면서 추억의 노래들을 찾아봐야겠다.

어릴 적 교회에는 노래 가사를 커다란 종이에 써놓고, 그 종이를 넘기며 찬양곡을 불렀다.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고, 절절하고 비장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손때가 묻어 종이가 반질반질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아직도 여름성경학교 수련회 시간표처럼 일부 행사에서 전지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토요일 오전, 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교회학교 전도사님이 서있었다. 당시 학교 앞에는 종종 장난감이나 게임 CD, 병아리 등 초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걸 파는 상인들이 진을 치곤 했는데, 전도사님이 보이면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반겨주는 어른이 있다는 걸 친구들한테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내가 교회 다니길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 중 하나다.

강동석 - 곤충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벌레라면 질색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도전’ 주제로 곤충이 떠올랐다. 기후위기로 곤충의 멸종 규모도 상당할 텐데,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관련 내용은 《침묵의 지구》(까치)에 정리되어 있었다. 저자는 곤충의 생태와 보전을 연구해온 생물학 교수로, 곤충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 글에서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있는 곤충이 100만 종이고 이름조차 붙지 못한 곤충이 400만 종이며, 인간이 곤충 종의 99.9퍼센트를 모른다는 사실부터 뜨악했다. 아마추어 곤충 마니아나 소수 학자만 관심을 두다 보니, 데이터가 균질하지 않아 그동안 곤충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완벽하게 측정하기는 어려운데, 저자는 1970년 이래로 적어도 50퍼센트 이상, 많으면 90퍼센트까지 줄어들었을 것으로 봤다. 2014년 야생 척추동물(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조류) 개체수가 1974년과 비교했을 때 60퍼센트 줄었다고 추정되니 과장된 수치는 아닐 것이다.

곤충은 식물이 씨를 뿌리는 데 도움을 주고,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 곤충의 멸종이 생태계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그렇다면 곤충 멸종 원인은 무엇인가? 원시 자연 서식지와 준자연 서식지 상실, 농약과 살충제, 유독해진 땅, 잡초 제거(순진하게도 지구 생태계 유지에 잡초가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인공조명, 전자기장과 주파수 등이다. 저자는 2080년 지구 시나리오도 한 챕터에 할애할 정도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환경 인식 제고’ ‘도시 녹화’ ‘식량 체계 바꾸기’ ‘희귀한 곤충과 서식지 보호’를 대안으로 언급하면서, ‘중앙정부의 행동’ ‘지방정부의 행동’ ‘모두의 행동’ 등 구체적 방법을 나누니, 일독을 권한다.

구선우 - 똥개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반려동물 양육 인구는 전체의 28.6퍼센트로 2010년 첫 조사(17.4퍼센트)에 비해 1.5배 이상 늘었고, 2023년 기준 등록된 반려견은 324만 마리(실추정 500만 마리)에 달한다.

이 화려한 반려견의 시대에, 한때 골목을 누비던 ‘똥개’가 조용히 사라졌다. 언제 마지막으로 똥개를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똥개는 ‘똥을 먹는 잡종 개’를 일컫는데, 근본 없는 잡종개가 똥을 먹는다는 이유로 비하하는 의미로 쓰였다.

길고양이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유기견이나 떠돌이 개는 동물보호법과 지자체의 관리 정책 강화로 줄어들었다. 20-30대 사이에서 유기동물 입양 문화가 확산되며, 동물보호센터나 직접 구조를 통한 입양이 활발해진 점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KB금융그룹, 〈2023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

물론 잡종견인 똥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선호하는 견종 순위에는 몰티즈, 푸들에 이어 ‘믹스견’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똥개’ 말고 ‘믹스견’이라는 다국적의 중립적 용어가 자리를 대신한다. 믹스견에는 의도적으로 다른 품종을 교배한 ‘몰티푸’(몰티즈+푸들), ‘코카푸’(코커스패니얼+푸들), ‘폼피츠’(포메라니안+스피츠) 같은 디자이너 도그(하이브리드견)가 포함되며, 어떤 품종이 섞였는지 알 수 없는 잡종도 있다(〈2023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 후자는 시골 잡종견에서 파생한 ‘시고르자브종’이라는 우아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똥개라 불리던 길거리 개들은 구조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안락사 위기에 처한다. 보호소에 들어온 순종견은 입양이 제법 되지만, 잡종견은 좀처럼 새로운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디자이너 도그는 분양가가 수백만 원에 이르는 등 인기를 끌지만, 한번 버려지면 믹스견으로 분류되어 입양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믹스견, 시고르자브종이라는 새 이름은 이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여전히 많은 똥개가 보호소의 좁은 우리 안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다가, 공간이 부족해지면 가장 먼저 안락사 대상이 된다.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순종 중심 문화를 비판한다. 순종 유지와 품종개량을 위한 인위적 교배와 혈통 관리가 유전적 질병과 건강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품종에 집착하는 반려견 문화는 유전적 다양성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견종 전체의 건강과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이러한 문화는 혈통이나 외형적 기준을 중시하는 인간 사회의 계급 구조와도 닮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순종견 유지를 위한 인간의 폭력적 개입을 비판한다. 동시에 등록되지 않은 개들(undocumented mutts)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양성의 가치와 인간과 개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전환을 요청한다.1)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똥개’ ‘똥강아지’ 같은 별명으로 불러주곤 한다. 귀한 존재를 일부러 천하게 부르는 풍습은 사랑하는 이가 부정을 타거나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한 오랜 유산이다. ‘개’라는 말은 여전히 남을 비하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깃든 말로 쓰이기도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했던가, 똥개가 더욱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이범진 - 네안데르탈인

‘월간 에디터의 도전’ 주제를 들었을 때 《한국인의 기원》(바다출판사)을 읽고 있었다. 곧바로 네안데르탈인이 떠올랐다. 《한국인의 기원》은 고기후학·고생태학을 연구하는 지리학자 박정재 서울대 교수가 쓴 책이다. 주요 내용은 아프리카에서 살던 사피엔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한반도에 이르게 되었는지다. 주기적인 기후변화가 주된 원인이라는 게 과학적 추론인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커서 놀랐다. 1천 년 전 세상도 잘 가늠이 안 되는데, 수천만 년 전부터 1만 년 단위로 거슬러 내려오는 서술이 무척 낯설다.

네안데르탈인은 대략 40만 년 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4만 년 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현생인류보다 열등했기 때문에 소멸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빙기와 간빙기를 오가는 엄청난 기후변화를 5~6차례나 견딘 존재였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네안데르탈인의 비밀〉에서는 이들이 망자에게 꽃을 바친 사실 등을 다루며, 네안데르탈인의 문화가 호모사피엔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급기야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사촌”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그렇게까지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수십만 년 지구에 적응하던 그들이었지만, 강력한 경쟁자와 불안정한 기후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최근(?) 1만 년은 인류에게 가장 온난하고 안정적인 기후의 시기라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갑자기 기후가 급변하여 인류가 멸망하여도, 약 46억 년을 산 지구 입장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 않을까.

이예은 - 내 곁을 떠난 분실물들

따르릉따르릉, 거실을 가득 채웠던 집 전화벨 소리가 언젠가부터 들리지 않는다.

한집에 사는 가족은 똑같은 전화번호를 사용했다. 전화번호를 묻는 말에, 가족 구성원은 모두 하나의 번호로 대답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 휴대전화가 생기면서 집 전화를 사용하는 일도 없어졌다. 집안 어디에 있든 또렷이 들리던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자, 전화기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됐다.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귀와 입에 닿는 부분이 툭 튀어나온 동그란 수화기와 통화가 길어질 때마다 손가락으로 배배 꼬던 돼지 꼬리 전화선, 지금의 휴대전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컸던 투박한 집 전화기가 문득 보고 싶어진다.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 라디오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어 음악을 틀어달라는 엄마의 부탁은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오빠 방에서 몰래 듣던 CD 플레이어와 마이마이는? 친구와 온라인 메신저에 동시 접속했을 때 반갑던 그 순간은? 가족들과 그동안 찍은 필름을 인화해서 돌려보며,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두꺼운 앨범에 하나하나 붙이던 시간도 아득하다. 반듯하게 붙이려 손끝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했었는데. 모르는 단어가 생기면 얇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손가락으로 짚어 단어를 찾던 백과사전도 책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제는 경험하기 힘든 물건과 추억이 한가득이다. 떠올리면 웃음이 나다가도, 마음을 콕콕 찌른다. 애정하던 일상의 시간을 무심히도 흘려보냈다. 낭만이 없어진 자리에는 스마트폰만이 남았다. 직접적이고 다채롭게 느끼던 감각들이 모두 손가락 끝의 터치로 변했다. 지면을 빌려, 이미 내 곁을 떠난 분실물들에게 한마디 전해본다. ‘덕분에 내가 있다, 고마워. 안녕!’

■ 주

1) 자세한 논의는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 2019)의 〈반려종 선언〉과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종과 종이 만날 때》(갈무리, 2022)의 4-5장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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