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호 특집]

한국교회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곤혹스러운 건 신앙생활을 안 하다가 망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열심과 헌신은 지금도 대단하다. 새벽기도도 열심이고, 다독을 넘어 필사할 정도로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상당하며, 사회봉사 활동은 양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타 종교를 압도할 정도이고, 자신이 믿는 성경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 나가 외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구약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선민을 자처하며 여호와만을 믿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나고 결국 멸망한 것도 신앙생활을 안 해서가 아니었다. 신앙적 열심과 열정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북이스라엘 멸망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최초의 문서예언자 아모스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암 4:4, 새번역)

베델과 길갈은 성소가 있는 곳이다. 성소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우상숭배? 아니다. 제사,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모자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드리고, 심지어 율법에 있지도 않은데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기까지 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심이다. 제사(예배)도 열심이고 헌금도 철저히 드렸는데 이게 범죄이고 그래서 멸망할 거라니,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을까.

무엇이 범죄라는 걸까?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일이 범죄다. 하나님은 안식일·안식년(면제년)·희년의 말씀에 순종하고, 맏물과 십일조와 3년 십일조에 담긴 정신을 실천하는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열방에 모범을 보이라고 가나안 땅을 주셨다.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헌금의 본래 정신인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우상 종교처럼 신전에 모여 예배드리면,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께 정성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그 신앙이 범죄라는 말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암 4:1, 새번역)라는 구절에 잘 드러난다. 이 외침을 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언제 가난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거야.’ 하지 않았을까? 아모스 비판에 담긴 본뜻은 안식년(면제년)이 되었는데도 생계형 빚을 탕감하거나 종을 해방하지도 않으며, 희년이 되어도 땅과 집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식일·안식년·희년의 정신을 지키지 않은 일이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행위라는 뜻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길로 간 한국교회

구약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살펴보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참한 상황에 이른 까닭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한국교회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는 말씀을 봐도 희년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성령님이 강림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초대교회가 희년 정신을 실천해서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받았다는 이야기(행 2:47)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은 힘주어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대행자라면 정작 관심 보여야 할 것들, 곧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구조적 가난의 문제, 노예 노동의 문제, 땅과 집 문제, 평화 문제엔 무관심하다.

희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희년을 외면하고 이방의 우상 종교와 다를 바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포로기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 아모스·호세아·예레미야 등의 예언, 즉 안식일·안식년·희년을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산 일이 동력이 되어 ‘귀환’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낸다. “꿈꾸는 것 같았다”(시 126:1)라고 표현된 귀환은 ‘역사의 기적’이다. 희년으로 돌아가야 ‘역사적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준다는 말이다.

희년에 대한 입체적 설명

교회가 희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희년을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희년은 안식일이 확장되고 완성된 것이니 안식일부터 살펴보자. 안식일은 먹고살 만한 사람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 종과 노예를 위해 제정한 날이다. 밤낮 일하던 종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해주는 날인 안식일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면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때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신 24:22). 가장 비참한 존재인 노예 입장에 서는 게 거룩함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약 3천5백 년 전에 안식일이 제정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이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은 안식일보다 더 파격적이다. 안식년에는 아예 노예와 종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고, 자유인이 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도록 먹을 것을 넉넉히 주었다. 심지어 부채도 완전히 면제해주었다. 부채 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신명기는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 고쳐 불렀다. 여기에는, 다시는 이집트에서처럼 비참한 노예로 살지 말라는 하나님의 절절한 심정과 호소가 담겨있다. 그뿐 아니라 안식년에는 땅과 가축도 쉬게 하고, 땅에서 스스로 나는 소출을 거두지 말라고 말씀한다. 땅을 혹사하지 말고 땅 없는 사람들이 과수원을 비롯한 토지의 소출을 거두게 하려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율법은 땅과 가축, 들짐승까지 배려하고 있다. 율법은 복음 자체이다.

이런 파격적인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그다음 해, 즉 50년째 되는 해인 희년에는 잃어버린 토지까지 돌려받을 수 있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하고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받고 지파 안에서 각 가정도 땅을 분배받았다. 그리고 그 땅에 대한 영구 매매를 금지했다(레 25:23). 물론 한시적 매매는 허용했다. 그러나 중간에 돌려받는 장치 ─이것을 무르기라고 부른다. 이 무르기는 가장 가까운 친척의 의무이기도 한데, 만약 친척이 능력이 안 되면 스스로 무르기를 할 수 있었다─ 가 있었고, 그것이 어려우면 최장 50년, 희년이 되면 땅을 회복했다.

한편 성서의 희년법은 주택에 대해 세심한 규정을 두었다. 성(城)안의 주택은 매각한 사람이 1년 이내에 무르기를 하지 않으면 매입한 사람 소유로 확정되는데, 성 밖의 주택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무르기 제도를 두어 희년이 되면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줘야 했다. 성안의 주택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 까닭은 ‘나그네와 이방인 개종자들의 정착을 장려하고 그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가장 자연스럽다. 성 밖의 토지와 주택은 나그네와 개종한 이방인이 매입하더라도 중간에 무르기를 할 수 있고 희년이 되면 반환해야 하는데, 이러면 이들은 농사와 목축을 할 수 없고 생활은 불안정해진다. 그들을 위한 주거 대책과 생계 대책이 필요한데, 방법은 그들이 성안의 집을 매입하여 그곳에서 상업이나 수공업을 통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1년이 지나면 성안의 집은 영원히 그들 소유가 되게 했다. 희년은 주거가 불안한 극빈층도 도와주고 함께 살라고 말씀하는데(레 25:35), 여기서 희년이 전 국민의 주거권 보장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1)

그러므로 희년은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자유의 몸이 되고 부채도 면제받을 뿐 아니라 생활 터전인 땅과 집까지 돌려받았으니 말이다. 안식년에 이어 희년에도 휴경이었으니 가축도, 땅도 쉴 수 있었다. 희년은 피조물 전체에 복음, 기쁜 소식이었다. 

평등한 토지권, 전 국민 주거권이 중요한 이유

희년은 부채의 문제, 노예 노동의 문제, 토지와 주택의 문제, 동물의 문제, 생태환경의 문제를 모두 다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땅과 집의 문제다. 인간은 토지가 없으면 생존이 안 되기 때문이다. 부채를 탕감받아도, 노예 노동에서 해방되어도 부쳐 먹을 땅이 없으면 다시 부채의 늪에 빠지기 쉽고 노예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거가 불안하면 인간다운 생활은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식(食)이 있어도 적절한 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옷[衣]이 있어도 거처가 불안정하면 인간다운 생활은 불가능하다. 주택에 거한다는 의미의 주거(住居)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 행위다. 주거가 이루어져야 평화로운 휴식이 가능하며 사생활 보호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땅과 집은 돈벌이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것을 재테크 혹은 투자라고 부르지만 본질적으로 땅과 집을 통해서 버는 소득은 불로소득이다.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 더 나쁜 것은 땅과 집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땅과 집을 과다하게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격차를 더욱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투기 대상이 된 땅과 집의 가격이 너무 올라 사람들이 자기 소득으로 주거를 마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청년들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땅과 집을 알아보려고 다니는 일도 ‘노력’ 아닌가. 왜 ‘불로’소득이라고 하는가. 불로소득이라는 말은 그것을 얻는 사람 관점에서 매우 불쾌한 말이다. 좋은 위치의 땅과 집을 알아보기 위한 현장 방문도, 정보 취합 및 분석도 분명 노력이기 때문이다. ‘투기’가 아닌 ‘투자’라는 것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뜻의 ‘영끌’도 노력이라는 말이다.

땅과 집의 투기를 책망하는 선지자의 외침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불로소득’이 철저히 ‘사회적 관점’의 용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 집과 건물을 알아보러 다니는 행위 등은 개인적 관점에서 ‘노력’이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 행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GDP가 1도 증가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부동산을 알아보고 정보를 취합해도 생산량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를 사회과학에서는 비생산적 경제활동, 좀 더 그럴싸한 말로 지대 추구 행위(rent seeking behavior)라고 부른다. 불로소득이냐 아니냐는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땅과 집의 투기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얼마나 될까? 필자가 근무하는 연구소 자체 추산에 의하면 2007년 161.4조 원, 2010년 216.9조 원, 2018년 315.9조 원, 2020년 436.3조 원, 2021년에는 무려 461.6조 원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2022년 415.3조 원, 2023년 288.7조 원으로 줄었다. 17년(2007-2023) 동안 GDP 대비 부동산 불로소득 평균은 16.8퍼센트나 된다. 심지어 2020년, 2021년에는 땅값과 집값의 폭등으로 부동산 불로소득 규모가 20퍼센트를 넘었다. 이것은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적게 소유한 개인과 회사가 노력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개인과 회사에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 무주택자가 집을 사거나 부동산이 필요한 회사가 건물이나 땅을 살 때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증가한 비용만큼 이전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불로소득은 합법적 도둑질인 셈이다.

투기 대상이 된 까닭에 땅과 집이 초래한 불평등은 매우 심각하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가구는 2024년에 37퍼센트나 되었고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무려 0.914(면적 기준, 완전평등 0 완전불평등 1)나 된다. 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43퍼센트가 넘고 집이 아닌 비닐하우스·쪽방·고시원에 사는 가구가 50만 가구 정도이며, 반지하·옥탑방 등 주거취약계층이 100만 가구가 넘는다. 

어떤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라는 준엄한 꾸지람이 귀에 들리지 않는가?

교회의 희년 실천과 역사적 기적

교회는, 기독교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땅과 집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벌었던 ‘그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부동산 투기라는 경제행위는 결과적으로 이웃을 더 고통에 빠뜨린다.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가 했던 것과 같은 회개가 필요하다. 그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내에 전월세를 전전하는 청년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대사회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차단하고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회복하고 전 국민 주거권을 실현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거기에 더해 교인 중에, 특히 청년 중에 생계형 부채에 신음하는 형제들의 고통에, 억울한 갑질에 희생된 노동자들의 문제에 교회가 지혜롭게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실천이다. 이렇듯 교회는 희년 앞에 섰을 때 벌거벗은 모습을 볼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냐고. 아니, 세상은 더 나빠질 것이 뻔하지만 성서에 나와있으니까 해야 하는 거냐고. 그런 생각은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성서는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행동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성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멸망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건 이미 결정된 일이 아니다. 성서는 결코 역사 결정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회개하고 희년을 실천하고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쳤기에 ‘귀환’이라는 기적(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희년 앞에서 회개하고, 먼저 교회 안에서 희년을 실천하고, 바깥에서도 제도적으로 실현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을 통해서 한국 사회는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교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면서 행하는 교회가 역사의, 세계의 희망이라고 성서 전체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남기업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토지공개념 원류인 헨리 조지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토지 정의를 핵심으로 하는 부동산 개혁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희년이 학문적·실천적 과제이고,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공저), 《불로소득 환수형 부동산 체제론》, 《아파트 민주주의》, 《희년》(공저) 외에 여러 책과 논문을 썼으며, 희년함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수원성교회 사회환경선교부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